온유, “통제된 힘”
무지를 깨달아 사리를 분별하도록 젊은이들을 가르쳤던 소크라테스는 누명을 쓰고 법정에 서게 됩니다. “젊은이들을 타락시키고 나라가 인정하는 신 대신 다른 새로운 신을 믿게 한다”는 죄목으로 사형 선고를 받습니다. 죽마고우였던 크리톤은 자신이 보석금을 내준다며 외국으로 도망칠 것을 소크라테스에게 제안합니다. 자신은 지금까지 아테네 시민으로서 법이 주는 모든 자유와 특권을 누려왔는데, 이제 자신이 불리하게 되었다고 법을 따르지 않는 것은 옳지않다며 친구의 제안을 거절합니다. 소크라테스의 의연한 태도를 보며 크리톤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지금까지 모든 면에서 당신이 법정에 온 사람 중 가장 고귀하고 온유한 최고의 사람이라는 것을 알고 있소.”
소크라테스의 인품을 표현하는 단어 “온유한”은 희랍어 “프라우스”입니다. 온화한, 부드러운, 달래는, 협력하는, 친절한, 등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는 예수님께서 팔복을 언급할 때 “온유한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땅을 기업으로 받을 것임이요”라고 사용합니다. 아리스토텔레스는 온유란 영혼의 미덕을 생산하는 인간의 성품으로 “정의, 용기, 절제, 아량, 장엄함, 그리고 이와 유사한 모든 마음의 상태”라고 정의합니다. 이 낱말은 거칠고 고약한 성질을 가진 사람과 정반대 되는 사람의 성품을 설명하는 단어 입니다. 고대 그리스인들 사이에서 온유한 우정은 인간 관계에서 가장 고결하게 평가되는 개인의 성품이었습니다. 온유는 학대에도 불구하고 침착함을 유지하는 고상하고 교양있는, 즉 현명한 사람의 표시입니다. 온유란 지도적인 사람의 특성으로 백성들에게 끊임없이 칭송되었으며, 통치자를 묘사할 때 두드러진 위치를 차지했습니다. 플라톤은 온유는 아틀란티스 섬에 세워지는 이상 국가에 속한 시민들이 소유하는 신성한 성품이라고 언급했습니다.
고전 그리스 작품 속에서 이 낱말은 매우 사랑스러운 사람의 마음을 전달하는 단어입니다. 무엇보다도 “부드럽다”는 뜻입니다. 예를 들어, 살랑거리는 부드러운 바람이나 감미로운 사람의 목소리를 수식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그리스의 극작가 메난드로스의 글에 “마음이 온화하고 젊은 아버지는 얼마나 다정합니까?”’는 표현이 있습니다. 다정한 젊은 아버지의 마음을 프라우스로 표현했습니다. 은혜로우며 다정스런 성품을 묘사할 때 이 낱말이 사용됩니다.
이 낱말은 마태복음에서 예수님의 성품과 관련되어 사용됩니다. 예수님의 말씀인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는곧 그분의 이 땅에서의 사명이 겸손하고 약함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을 암시합니다. 예수님의 삶은 법정에서 논쟁하는 모습이 아닙니다. 대신 마음이 겸손한 자, 즉 마음이 전적으로 하나님께 고정된 분으로 묘사됩니다. 스가랴 선지자는 예수님의 사명을 이루기 위한 그분의 성품에 관해서 이렇게 예언했습니다. “시온의 딸아 크게 기뻐할지어다 예루살렘의 딸아 즐거이 부를지어다 보라 네 왕이 네게 임하시나니 그는 공의로우시며 구원을 베푸시며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시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 새끼니라.” 그리고 예수님은 비폭력적이고 비호전적인 평화의 왕으로 예루살렘에 입성하셨습니다. 자신의 뜻이 아니라 하나님의 위대하고 은혜로운 계획에 이끌리는 예수님의 태도가 프라우스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교회 성도들의 논쟁과 오만에 관해서 언급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나 바울은 그리스도의 온유함과 너그러움을 의지하여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그릇된 성도들을 향한 바울의 호소는 그리스도께서 지상 생애 동안 공동체를 위해 모범을 보이신 온유함과 사랑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기독교 공동체 안에서 훈계는 예수 그리스도의 온유의 모범을 따라야 한다는 것을 거듭 강조합니다. “주의 종은 마땅히 다투지 아니하고 모든 사람에 대하여 온유하며 가르치기를 잘하며 참으며 거역하는 자를 온유함으로 훈계할지니.” 범사에 온유함을 추구했던 바울은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 속에 온유를 포함시킵니다.
프라우스가 동물과 관계하여 사용될 때는 길들여진 야생마를 의미했습니다. 고대 그리스인들은 들에서 자기 멋대로 뛰어 다니던 야생마를 붙잡아 와서 길들여 승마용 말로 사용했습니다. 이 말을 프라우스라고 했습니다. 길들여진 야생마는 여전히 강인하고 놀라운 힘과 에너지를 갖고 있습니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 맘대로 뛰어 다니는 것이 아니라, 주인이 이끄는 데로 갑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길들려진 야생마는 말을 타는 기수가 고삐를 트는 방향으로 날렵하게 달립니다 힘이 넘쳐 나지만 그 힘이 말을 잘 다루는 기수의 조정에 따라 통제되어 기수가 고삐를 트는 방향으로 힘을 분출합니다. 이것이 온유입니다. 온유함이란 결코 나약함이나 소심한 것을 뜻하지 않습니다. 온유함이란 주인의 목적을 위해서 절제되고 통제된 말의 힘을 뜻합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가 나약해 지는 것을 원치 않으십니다. 대신 온유해지시기를 원하십니다. 온유한 자에게 복이 있다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온유한 사람은 어떤 사람입니까? 주인의 목적을 위해서 잘 길들여진 말처럼,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자신의 본능을 잘 다리는 사람입니다. 감정적 충동을 억제할 수 있는 인격이 온유한 자입니다. 그래서 온유한 사람은 자신이 가진 힘을 하나님의 목적을 위해서 강력하게 발산합니다.
이러한 예수님의 성품인 프라우스는 어느 누구도 스스로 자기 노력으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성령의 열매인 온유는 인간의 지혜, 열심, 혹은 훈련을 통해 습득되는 것이 아닙니다. 오직 하나님의 통제 아래서 얻어지고 경험되는 힘입니다. “사람은 스스로의 능력으로 완전하게 온유할 수 있다”는 말은 그릇된 표현입니다. 온유는 하나님의 통제로만 가능합니다. 왜냐하면, 온유는 하나님의 영역이며, 오직 하나님께서 공급하실 때 얻어지는 성품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고 말씀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온유한 마음을 이렇게 표현합니다. “예수님은 원래 하나님이셨는데,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 하시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 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십자가의 길은 힘이 없고 무능한 것같았지만 그곳에 죽음을 이기는 힘이 있었습니다. “오직 온유한 자는 땅을 차지하며 풍부한 화평으로 즐기리로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