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경건의 훈련: 일관성 있는 사람(빌립보서 3:10-14)
밴쿠버한인감리교회 임덕규 목사
하나님의 평화가 우리 모든 하나님의 가족들 위에 함께 하시길 축원합니다.
지난 주, 은혜 가운데 선교회 찬양제를 마쳤습니다. 웃음이 있고, 감동이 있는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지난 한 주간 제 마음 속에 각 선교회에서 불렀던 찬송들이 남아 있었습니다. ‘우물가의 여인처럼’, ‘나의 등 뒤에서’ ‘내게 강 같은 사랑’ 등등. 그 중에서도 ‘에바다’라는 찬송이 제게 강렬히 남아 유튜브에서 몇차례 찾아 들었습니다.
“열려라 에바다 열려라 눈을 뜨게 하소서 죄악으로 어두워진 나의 영혼을 나의 눈을 뜨게 하소서”
지난 주 마리아 선교회에서 이 부분을 부르는데 제 마음이 뭉클해지며 설랬습니다. 그 이유가 있습니다. “에바다”는 아람어로 “열리다”라는 뜻인데, 지난 주 말씀을 읽다가 제 영혼의 눈이 열렸기 때문입니다.
지난 한 주간 새벽기도회 때 열왕기상을 읽으며 새벽에 성도들과 함께 은혜를 나누었습니다. 특히 아합 왕에 대해 읽을 때 주님이 제 영혼의 눈을 열어주셨습니다. 여러분도 아시는 것처럼 북 이스라엘의 아합 왕은 이스라엘 역사상 가장 악한 왕 중의 한 명입니다. 그가 악한 왕이라 평가받은 이유는 이세벨과 결혼하여 우상을 위한 신전을 지어 이스라엘 백성이 우상 숭배에 빠지게 했기 때문이라고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새벽기도회 때 아합 왕의 행적을 다시 꼼꼼히 읽을 때 이 보다 더 큰 악을 그가 행했다는 것을 주께서 영의 눈을 열어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아합 왕은 하나님의 은혜로 아람과의 전쟁에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그런데, 아합 왕은 승리를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지도 않고, 그 승리가 자신의 힘으로 얻은 것처럼 행동했습니다. 이와 관련된 말씀을 읽던 중, 주께서 저의 영의 눈을 열어, 아합 왕에게 있어 우상숭배 보다 더 큰 악은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한 것’이란 사실을 깨닫게 해 주셨습니다. 순간, 제 삶을 돌아보게 되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한 적은 없었는가? 그 순간 눈물이 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알지 못했던 적이 저라고 왜 없었겠습니까? 제 자신이 아합과 같은 죄인이란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고도 은혜에 합당한 삶을 살지 못했던 저 자신…
이를 묵상하다 사도 바울이 한 말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딤전 1:15)란 말씀이 이해가 됐습니다. 성령님이 제 눈을 열어 주시니 ‘제가 죄인 중의 괴수’라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뿐만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은혜가 얼마나 큰지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아합 왕에 대해 읽으면서, ‘참 이 사람 한결 같구나’란 생각을 했습니다. ‘어쩜 자기 중심적으로 모든 것을 생각하고 행동하는지…,’ 참 이런 면에선 변함이 없는 사람이었습니다. 나봇의 포도원의 예에서도 알 수 있듯 하나님의 법을 알면서도 자신의 즐거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선 다른 사람은 안중에도 없는 사람. 언제나 타인의 유익보다 자신의 유익이 먼저인 사람. 이 사람이 아합이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아합에 대해 알아가면 알아 갈수록 이런 질문이 제 마음에 들었습니다. “그럼, 나는…?” 이 질문을 제 자신에게 할 때마다 아합이 내 안에도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가 없었습니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 부끄럽고, 또한 감사했습니다. 이를 알게 해 주신 하나님의 은혜에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아합에 관한 말씀을 읽으면서 변하지 않는 아합에게, 또한 변함없이 은혜를 베푸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은혜로 여기지 않았던 아합에게, 늘 자기 유익만 쫓던 아합에게 하나님은 변함없이, 일관성 있게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한결 같이 은혜를 베푸시던 하나님이 도저히 참을 수 없으셔서 ‘심판을 선언하자’, 회개의 모양만 취했던 아합에게 하나님은 또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한결 같으신 은혜의 하나님. 이 하나님이 ‘아합 같은 나에게도 은혜를 베푸시겠구나!’ 란 믿음의 확신이 들었습니다. 이 은혜를 깨닫고 나니 찬송이 나왔습니다.
“나 같은 죄인 살리신 주 은혜 놀라워.”
Amazing Grace, 여러분이 다 아시는 것처럼 존 뉴턴(John Newton)이 회심한 후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지은 찬송시입니다. 존 뉴턴은 믿음의 가정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아들을 참된 그리스도인으로 키우는 것이 최고의 목표였습니다. 그녀는 날마다 아들에게 성경 이야기를 해 주었고, 찬송가를 가르쳤으며, 아들을 위해 기도했습니다. 이런 어머니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젊은 날의 뉴턴은 다른 사람들의 믿음을 비아냥거리며 신앙을 단념시키려고 노력했던 사람이었습니다. 뉴턴은 당시 많은 사람들처럼 노예들이 존엄하고 친절한 대우받는 한 노예제도가 비성경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뉴턴은 세상 사람들처럼 많은 돈을 벌기 위해 노예상이 되어 배를 탔습니다. 그러다 폭풍우를 만나 죽게 되었을 때, 그는 믿음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하고, 이 일을 계기로 회심하게 되었습니다. 회심 후 그는 일관성 있게 하나님의 자녀로 살기 위해 노력했으며, 노예제도 폐지에 힘썼습니다. 그러다가 노예제도가 폐지되던 해인 1807년 82세의 나이로 하나님의 부름을 받았습니다.
“고난 당한 것이 내게 유익이라”(시 119:71)는 말씀이 뉴턴의 생애를 보면 진리임을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폭풍이라는 고난 가운데서 주님을 찾고 만나, 거듭난 뉴턴을 보면 고난이 하나님이 주신 선물이란 생각이 듭니다.
여러분 가운데서도 삶에서, 또 교회 생활을 하면서 어려움을 당하는 분이 계십니까? 그 고난이 견디기 힘들고 어렵겠지만, 그 고난이 하나님을 만나는 계기가 되고,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이 되길 소원합니다.
존 뉴턴(John Newton)은 회심한 후 하나님의 자녀로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참 변함없이 일관성 있게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보면 부럽습니다. 일관성 있게 변함없는 신앙 생활하는 사람들은, 그 생활을 어떻게 계속해 나갈 수 있을까요? 사도 바울이 오늘 본문에서 그 이유를 밝히고 있습니다.
14 푯대를 향하여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위하여 달려가노라
사도 바울이 많은 고난 가운데서도 일관성 있는 신앙을 가지고 갈 수 있었던 것은, 그의 말 대로 푯대 즉, 목적이 분명했기 때문입니다. 분명한 목적이 있을 때 사람들은 어떤 유혹에도 고난에도 흔들리지 않습니다. 사도 바울은 자신의 목적을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이라고 했습니다. 그 상은 무엇일까요?
10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여함을 알고자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11 어떻게 해서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
사도 바울이 목표로 했던 것은 부활의 새 생명이었습니다. 이를 얻고자 그는 고난에 참여하는 자가 되었고, 고난을 이겨내고 극복하는 하며 푯대를 향하여 일관성 있는 삶을 살았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삶을, “12 내가 이미 얻었다 함도 아니요 온전히 이루었다 함도 아니라 오직 내가 그리스도 예수께 잡힌 바 된 그것을 잡으려고 달려가노라”라고 표현했습니다.
바라기는 우리 모두 사도 바울처럼 푯대를 향하여 달려가기 원합니다. 어려움 가운데서도 일관성 있는 삶, 신앙의 길을 달려가길 원합니다.
오늘 말씀을 정리하겠습니다. 아합은 자기 중심으로 자기 유익을 위해 살았습니다. 그런 아합에게 한결 같이, 변함없이 일관성 있게 하나님은 은혜를 베푸셨습니다. 오늘도 우리는 아합처럼 나 중심, 내 이익을 추구하며 삽니다. 그렇기에 우리도 아합입니다. 아합에게 한결 같은 은혜를 베푸셨던 주님이 우리에게도 같은 은혜를 베풀어 주실 줄 믿습니다. 바라기는 그 은혜를 은혜로 받지 못하는 악한 자가 되지 말고, 은혜를 은혜로 받아 새 사람이 되어 살았던 많은 신앙의 선배들처럼 우리도 그렇게 살기 원합니다. 믿음의 선배들이 하나님이 위에서 부르신 부름의 상을 바라보며 변함없이 일관성 있게 새 삶을 산 것처럼, 우리 또한 그런 삶을 살아 하나님이 부르시는 곳이라면 어디든지 갈 수 있는 믿음의 사람들이 되길 소망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