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인도, “은혜 안에 들어감”
희랍어 동사 “프로사고”는 “데려오다” 또는 “소개하다”를 의미하고, 명사 형 “프로사고게”는 “접근,” “들어감,” 혹은 “소개”를 뜻합니다. 스파르타 군인이며 역사가였던 크세노폰은 『키루스의 교육』에서 전쟁 포로들이 왕의 면전에 오게된 배경을 이렇게 적습니다. “그들은 사슬에 묶인 포로 한 명과 부상당한 군인들을 키루스 왕에게 데려왔다.” 포로을 “데려 왔다”고 번역된 희랍어는 “프로사고”입니다. 그는 또한 키루스 왕에게 이런 제안을 합니다. “이제 왕께 요청하는 것은 저의 친구들 중에 누구든지 무엇인가를 원하는 사람들은 왕인 당신의 호의를 얻을 수 있도록 제가 그들을 ‘왕의 면전에 인도’하는 것입니다.” 왕의 호의를 받을 수 있도록 자신의 친구들을 키루스 앞에 데려오는 행위를 프로사고게로 표현했습니다.
그는 술 맡은 관원장 사카스가 자신과 거래하는 사람들을 페르시라 제국의 왕인 아스티아게스에게 소개 (프로사고게) 하는 내용을 기록합니다. 왕은 농담으로 “그가 얼마나 멋지고 우아하게 포도주를 따르는지 모르나?” 이 말은 술관원장이 특정 사람들을 왕의 면전으로 데려와 왕께 소개하는 직무를 잘 수행한다는 의미입니다. 실제로 페르시아 궁정에는 프로사고게우스라는 관리가 있었는데, 그들의 역할은 사람들을 왕 앞에 소개하는 일이었습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들은 일상적인 생활 용어로 사용되기도 하지만, 인간들을 위해 행하신 예수님의 사역을 나타냅니다. 일상적인 예에는 채무자가 빚을 계산하기 위해 돈을 빌려준 채권자 앞에 “끌려 오는” 경우, 어떤 사람을 특정한 곳으로 데리고 올 때 사용됩니다. 예수님께서는 소년의 간질병을 고치기 위해 그의 아버지를 향하여 “네 아들을 이리로 데리고 오라”고 명령합니다. 사도행전에서는 바울과 실라를 로마 관리들 앞에 데려오는 행동에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 단어는 배가 육지에 가까이 왔다는 뜻으로도 쓰입니다. 사도 바울이 승선했던 배가 바다에서 푹풍을 만나 이리저리 표류하다가 어느 육지에 “가까가 왔다”는 표현에 프로사고가 쓰였습니다.
이 두 단어는 예수님의 특별한 사역을 설명합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죽음의 목적을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씁니다. “그리스도께서도 단번에 죄를 위하여 죽으사 의인으로서 불의한 자를 대신하셨으니 이는 우리를 하나님 앞으로 인도하려 하심이라.” 불경건한 자들이 하나님과의 관계를 맺도록 흠없으신 예수님께서 희생하신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인간이 하나님께 나아가는 길을 오픈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친히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십니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 나아갈 수 있는 방법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가능합니다. 영적 질서에서 이제 그리스도은 현재 하나님의 현존 앞에 사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죽으심이 유대인과 이방인 모두가 하나님 아버지께 접근 (프로사고게) 하는 길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는 그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 (프로사고게)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예수님의 십자가 희생을 통해서만 둘, 즉 유대인과 이방인이 하나님의 자녀가 되어 아버지 하나님의 면전에 나아갈 수 있습니다. 바울은 누구든지 “그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담대함과 확신을 가지고 하나님께 나아감 (프로사고게)을 얻었다”고 강조합니다. 그 이유는일반 사람들에게는 하나님은 범접할 수 없는 왕이시지만,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신앙인들에게는 하나님은 아버지시기 때문입니다.
크세노폰이 언급했던 것처럼 프로사고게는 왕의 호의를 받도록 사람을 왕 앞에 데려가는 행위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은 하나님의 놀랍고 크신 사랑과 은혜 안으로 우리를 데려오는 일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로마서에서 “그로 말미암아 우리가 믿음으로 서 있는 이 은혜에 들어감을 얻었으며”라고, 신앙인은 그리스도를 통해서 현재 하나님의 임재 안에 인도된 자들임을 분명히 합니다.
이 두 단어들은 예수님께서 사람들을 위해서 하시는 일을 나타낼 때 가장 빛을 발합니다. 예수님은 우리를 하나님 아버지의 왕궁으로 인도하십니다.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아무 두려움 없이 담대함으로 왕이신 하나님의 현존 앞에 서게 됩니다. 예수님은 왕이신 하나님께 우리들을 소개하십니다. 예수님께서 우리를 소개하시는 분은 인류 역사 속에 그리고 현재 인간 삶에 최고의 권위를 가지신 분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같은 죄인들을 가장 거룩하고 가장 신성하며 가장 위대하신 존재 앞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은 자신의 희생을 통해서 우리가 이 땅에서 하나님의 위대하신 일을 이룰 수 있다고 소개하십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를 받아 하나님께 봉사할 수 있도록 우리를 하나님의 면전으로 “인도”하십니다.
예수님을 통해서 우리가 하나님의 은혜에 들어간 원리를 알렉산더 맥클라렌은 매우 아름답게 표현합니다. “사도는 은유적으로 은혜를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넉넉한 공간으로 비유한다. 그는 은혜를 큰 보물 창고로 생각하고 있다. 우리는 그곳에 들어갈 권리가 있다. 말하자면, 사방에는 주조되지 않은 금괴와 엄청난 양의 보물이 놓여 있으며, 우리가 원하는 만큼 많이 가질 수도 있고 적게 가질 수도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부를 얼마나 많이 소유할 것인지는 전적으로 우리 자신의 결단에 달려 있다. 우리는 보물창고에 들어갈 수 있으며 이 허가증이 우리 손에 맡겨져 있다. 옛 이야기에는 그 사람이 가져온 자루의 크기는 그가 가져간 부의 양을 결정한다고 했다. 어떤 사람들은 아주 작은 바구니를 가져오고 거의 기대하지 않고 거의 원하지 않았다.
하나님의 충만함인 그 부유함은 담는 그릇의 크기에 따라 모양이 정해지고 그 크기도 결정된다. 꽃병에 부은 물이 붓는 꽃병의 모양을 가지듯이, 하나의 선물은 그 사람의 필요에 따라 무한히 다양한 방식으로 펼쳐진다. 작가의 펜, 목수의 망치, 농부의 쟁기 등, 이 모두가 같은 인간 정신으로 만들어지는 것과 같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은혜는 다양한 부르심과 필요에 따라서 우리의 상황과 형편에 맞는 다른 형태로 우리들에게 오는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의 충만함에 들어 왔지만, 당신이 비어 있으면 누구의 잘못인가?” 히브리서 저자는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라고 권합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