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설교 (1), 원조 교회 설교
제임스 팩커는 “왜 설교인가?”라는 글에서 기독교 신앙과 교회에 설교가 무엇인지를 네 요소로 설명합니다. 첫째, 설교는 하나님께서 자신과 구원의 언약을 우리에게 알리시는 계시된 방법입니다. 성경은 창조주 하나님을 소통하시는 분으로 보여줍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만나시고, 자신과 구원의 은혜를 우리에게 알려주시는 것은 여전히 설교를 통해서, 즉 메시지와 전달자가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통해서입니다.
둘째, 설교는 다른 어떤 방식보다도 성경의 힘을 전달합니다. 이는 성경 자체의 본질에서 입증된 내용입니다. 성경은 그 자체로 설교입니다. 모든 성경은 예외 없이 사람을 교화하기 위해, 즉 사람들에게 살아 계신 하나님을 알게 하고, 그분을 사랑하고 경배하고 섬기도록 가르치기 위해 기록되었으며, 그러한 점에서 성경은 모두 설교의 본질을 지닙니다. 따라서 성경을 설교하는 것은 그 성경의 본질을 인정하고, 그 내용을 그 자체로 우리에게 드러내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닙니다.
셋째, 설교는 다른 어떤 활동보다도 교회의 정체성에 초점을 맞추고 소명을 명확히 합니다. 교회는 모든 시대에 정체성 문제를 겪었고, 어떤 시대에는 정체성 위기를 겪었습니다. 왜 그럴까요? 세상은 항상 교회를 자기에게 동화시켜 삼켜버리려 하며, 그렇게 하도록 교회에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세속적 공격에서 교회가 하나님께서 주신 정체성과 소명을 잃지 않고 유지하도록 돕는 유일한 방법은 설교 활동입니다.
넷째, 설교는 기독교 교육 방식으로서 고유한 장점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는 교회의 가르침이라는 사명의 본질에서 도출된 내용입니다. 설교는 무엇보다도 가르침입니다. 단순히 가르치는 것 이상입니다. 그것은 마음과 정신 모두를 겨냥한 일종의 연설이며, 사람들의 생각과 삶의 방식을 부끄러움 없는 정직함으로 바꾸려는 행위입니다. 따라서 그것은 항상 설득을 위한 시도입니다. 설교자는 자신이 다루는 존재의 위대함, 즉 하나님의 위대하심과 신성한 은혜와 영원함의 위대함을 강조해야합니다.
설교가 기독교의 핵심이며 고유한 특징이라는 사실은 교회 역사의 길고도 다채로운 사건들을 통해서 지속적으로 확인되어 왔습니다. 이와같이 설교는 기독교에 절대적인 요소이기 때문에 그것이 없게 되면 기독교 진정성의 필수적인 부분이 상실됩니다. 기독교 신앙의 본질인 하나님 말씀이 설교를 통해 전해져서 교회의 정체성과 소명이 유지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어떤 회중도 성경적 설교 없이는 건강할 수 없으며, 어떤 목회자도 설교를 자신의 소명 중 최우선 순위에서 밀어내는 것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것이 매우 분명합니다.
설교로 이해되는 희랍어는 “케리그마”는 공개적으로 선포한다는 의미입니다. 동사 “케리스세인”은 본래 “공개적으로 알리다” 혹은 “선포하다”는 뜻으로 고대 그리스 문헌에 매우 자주 언급되는 낱말입니다. 선포하는 사람인 “케릭스”는 마을의 대소사를 알리는 포고자, 혹은 소리내어 장사하는 경매인, 또는 전쟁이나 국가의 일들을 시민들에게 알리는 전령자였습니다. 초기의 전령자들은 왕족이나 영주들에 속하여 그들을섬겼으나 후기에는 국가의 일을 알리고 선포하는 사람들로 이해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설교하다”라는 동사는 종종 “복음”을 목적으로 합니다. 실제로, 이러한 개념들의 연관성은 매우 밀접하여, 선포하다는 케리스세인은 “복음을 전파하다”와 사실상 동일한 의미를 지닙니다. 선포, 즉 설교가 언급될 때마다 항상 “좋은 소식”을 선포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사도 바울은 “하나님이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느니라”고 말씀합니다. 여기서 “전도”로 번역된 케리그마는 “설교”로도 번역되며, 설교자의 행위가 아니라 그가 전하는 것, 즉 우리가 흔히 말하듯이 그의 “메시지”를 의미합니다.
복음서 저자들이 선포한 메시지는 모두가 일치되며 매우 분명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나라였습니다. 마가는 그의 복음 서두에 예수님의 사역을 이렇게 소개합니다. “예수께서 갈릴리에 오셔서 하나님의 복음을 전파하여 이르시되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이 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시더라.”마가는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수 많은 설교들을 “때가 찼고 하나님의 나라가 가까웠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로 요약한 것입니다. 예수님의 사역을 소개하는 마태도 동일한 메시지를 전합니다. “이 때부터 예수께서 비로소 전파하여 이르시되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이 왔느니라 하시더라.” 누가는 예수님께서 하나님 나라를 위해 하실 사역을 구체적으로 소개합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 된 자에게 자유를, 눈 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롭게 하고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 하였더라.”
공관 복음서 저자들이 전한 설교의 큰 주제가 “하나님의 나라”라면, 원시교회가 선포한 큰 주네는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사도행전에는 베드로의 설교가 다섯 편, 그리고 바울의 설교가 세 차례 나타납니다. 이 설교들은 모두 그 내용이 일정한 패턴을 이루고 있습니다. 그것은 예언의 성취, 예수의 사역, 예수의 죽음, 예수의 부활, 예수의 승귀, 예수의 재림, 회개와 믿음의 권면,등 일곱 가지 주제들로 구 성되어 있습니다. 일정한 패턴으로 구성되는 원시 교회 설교는 그 주제들이 기독교 신앙의 변함 없는 핵심 내용임을 역설하는 것입니다.
원시 교회의 설교 패턴은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전했던 메시지에도 동일하게 나타납니다. “그리스도께서 성경대로 우리 죄를 위하여 죽으셨고, 장사 지낸 바 되셨다가 성경대로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사 게바에게 보이시고 후에 모든 사도에게도 보이셨느니라. 그러므로 나나 그들이나 이같이 전파하매 너희도 이같이 믿었느니라.” 로마 교회의 설교에도 선포되는 말씀은 “예수께서 주님이시요.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셨다”는 것입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곧 그분의 주권과 통치를 선포한 것입니다. 바울은 데살로니가 교회에 전했던 설교의 효과를 이렇게 요약합니다. “너희는 우상을 버리고 하나님께로 돌아와 살아 계시고 참되신 하나님만을 섬기며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그의 아들 곧 장차 올 보응에서 우리를 구원하신 예수를 하늘로부터 기다린다.”
설교의 원조는 성경 예언의 성취로 그리스도께서는 죽으셨다가 부활하셨으며, 그분은 도래한 천국을 다스리시며, 그리고 이 시대의 종말에 심판관과 구원자로서 자신의 주권을 행사하기 위해 다시 오신다는 내용입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