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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구속 (2), 확보된 영적 블레싱

구속 (2), 확보된 영적 블레싱

메가라의 왕 알카투스는 분노한 민족신인 몰록을 달래기 위해 아폴로 제단에서 자기 아들 칼리폴리스를 태워드리는 번제로 바칩니다. 그리고 참전한 전투에서 승리합니다.  고대 사회에서는 신들의 비위를 맞추고 달래서 복을 받기 위해 제물을 바쳤습니다. 이방 종교에서는 사람과 신의 화목을 이루기 위해 사람이 뇌물로 자신의 신들을 조정하고 다뤘던 것입니다. 제물을 동반한 제사를 드리는 것은 상황에 따라 쉽게 변하는 신들의 마음을 달래고 바꾸기 위한 일상이었고, 또한 반드시 치러야 하는 곤욕스러운 절차들 중의 하나였습니다. 헌납의 크기에 따라 신들의 반응도 달랐습니다. 큰 희생이 따르는 인간을제물로 바치는 것은 최고의 효과를 얻는 길이었습니다.

   성경의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다”는 말씀을 이방 종교적 사상으로 간주하여, 성부 하나님은 자기 아들을 화목제물로 바친 극도로 부도덕한 분으로 해석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다른 사람들의 죄가 용서되도록 성자 그리스도께 고통을 가하는 성부 하나님은 불의한 신이라는 주장은 성경을 왜곡시키는 반기독교적인 태도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십자가의 죽으심은 성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의 합으로 이루어진 계획임을 무시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진노를 불러 일으키는 악한 대상들을 너무 사랑하신 나머지, 그 진노를 소멸하여 그들이 즐거워 할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죽음을 계획한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진노를 제거하기 위한 하나님의 그 신성한 계획에 자발적으로 참여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이 이 땅에 오신 목적을 죽음과 관계해서 말씀합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곳에 언급된 대속물은 죄로 인해 사망 선고 받은 상태에 있는 자를 자유케 하도록 지불된 대가입니다. 예수님의 대리적 죽음을 통해 다른 사람이 혜택을 은 입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습니다. 사도 바울은 이 원리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의 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하심을 받았으니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받을 것이니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죄없으신 예수님께서 죄인들을 위한 필요한 대가를 지불하셔서 그들이 구원 받게 하는 것이 구속의 교리입니다.

   구속은 죄인을 위해 가장 큰 대가를 치른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그리스도는 죄인들에게 다른 무엇가를 주신 것이 아니라 자기자신을 주셨습니다. 죄인이 받은 구속은 그리스도의 죽음과 맞바꾼 최상의 가치 있는 선물입니다 (롬 5:6-10).  구속을 설명하는 다양한 낱말들은 전혀 희망이 없었던 사람들에게 그리스도께서 얼마나 큰 축복을 가져 오셨는지를 보여줍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이 사람들에게 미치는 가치와 관련하여 사용되는 희랍어 단어들은 “구속”으로 번역되는 “아폴루트로시스,” “화해 (화목)”으로 번역되는 “카탈라게,” 그리고 “화목제물”로 번역되는 “히라스모스”입니다. 이 셋은 구속이라는 위대한 하나의 완전체를 이루는 각각의 고유한 역할이 있기 때문에 동의어로 취급되어서는 안됩니다. 각각의 구체적인 특성은 명백합니다.  

   첫째, 구속 (Redemption)인 아폴루트로시스는 인간의 죄값을 대신 지불하는 하나님의 행위입니다. 하나님의 거룩한 성품에 적대적인 인간들의 사악함은 진노와 심판을 불러 일으킵니다. 인간을 너무 사랑하시는 하나님께서 그의 아들의 피로 진노를 씻기 위해 그 아들을 주셨습니다. 신약 성경에는 구속을 설명하기 위해 세 단어를 사용합니다. 핏값으로 샀다는 “아고라조”와, 노예 상태에 완전히 꺼냈다는 “엑사고라조 (속량하다),” 그리고 자유를 얻게 되었다는 “루트론 (속전)”입니다.   

   둘째, 화해 (Reconciliation)”로 번역되는 “카탈라게”는 십자가 위해서 그리스도께서 이루신 일입니다. 더 구체적으로는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죄인들의 삶에 가능하게 된 일입니다.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카탈라게의 어근은 “완전히 변화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 “그의 십자가의 피로 화평을 이루사 전에 악한 행실로 멀리 떠나 마음으로 원수가 되었던 너희를 이제는 그의 육체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화목하게 하사 너희를 거룩하고 흠 없고 책망할 것이 없는 자로 그 앞에 세우고자 하셨으니.” 그리스도의 죽음은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완전히 화목하게 했습니다.

   셋째, 화목제물 (Propitiation)은 ”로 번역되는 “히라스모스”는 화해의 장소를 의미합니다. “이 예수를 하나님이 그의 피로써 믿음으로 말미암는 화목제물로 세우셨으니 이는 하나님께서 길이 참으시는 중에 전에 지은 죄를 간과하심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려 하심이니.” 하나님께서 화목제물을 받는 그곳에서 죄인과 하나님과의 관계가 화해되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제물이 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죄인들에게 자비를 베푸십니다. 그리스도는 화해제, 즉 “은혜의 보좌”입니다. 

   그리스도의 죽음으로 이뤄진 구속은 죄인들의 삶에 헤아릴 수 없는 축복의 세계를 열어 놓았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이면 누구든지 자연적으로 확보하는 블레씽이 있습니다. 죄용서를 받고, 거듭나게 되며, 은혜의 보좌 앞에 설 수 있습니다. “자기 아들을 아끼지 아니하시고 우리 모든 사람을 위하여 내주신 이가 어찌 그 아들과 함께 모든 것을 우리에게 주시지 아니하겠느냐.” 하나님은 주시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를 주심으로 사실상 우리에게 나머지 모든 것을 주시기 위한 문이 열렸습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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