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스라엘, “혈통이 아닌 언약 공동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들으면 대부분 사람들은 중동에 위치한 현대 국가를 먼저 떠올립니다. 그러나 성경이 말하는 이스라엘은 단순히 눈에 보이는 하나의 나라와 영토를 의미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하나님의 선택과 언약, 그리고 구속 역사를 담고 있는 특별한 이름입니다. 복음서에는 “이스라엘”이 30번 언급됩니다. 비록 빈번히 등장하지 않는 단어이지만, 그 개념은 예수님의 사역과 가르침 전체를 지탱하는 중요한 토대를 이룹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이해하려면 먼저 이스라엘을 이해해야 하고, 복음서를 올바르게 읽으려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 속에 담긴 성경적 의미를 살펴보아야 합니다.
“이스라엘,” 이 이름의 기원은 창세기 32장에 등장합니다. 야곱은 형 에서를 만나기 전날 밤 얍복강 나루에서 한 사람과 밤새 씨름합니다. 날이 새어 갈 무렵 그 사람은 야곱에게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라고 선언합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이름 변경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야곱 개인의 인생 전환점이었을 뿐 아니라, 훗날 하나님의 언약 백성을 대표하는 이름이 탄생한 순간이었습니다.
언어적으로 이 이름은 “겨루다,” “싸우다,” 또는 “힘을 가지다”를 뜻하는 히브리어 어근 “사라”와 “하나님”을 뜻하는 신성한 명칭 “엘”이 결합된 동사형 단어입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의 본래 언어적 의미는 “하나님과 겨루다,” “하나님과 싸우다,” 또는 “하나님께서 다스리신다”는 뜻입니다. 그러므로 이 이름은 그 시작부터 결코 생물학적 혈통이나 지리적 위치를 나타내는 수동적인 표식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명백하게 영적 품격을 나타내는 명예로운 지칭이었습니다. 살아 계신 하나님을 향한 한 개인의 믿음과 회개, 그리고 신성한 축복을 간절히 구하는 행위로 특징지어지는 역동적이고 관계적인 씨름을 뜻했습니다. 구약학자 브루스 월키는 이 이름은 “하나님께 대항하는 반역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붙들고 끝까지 매달리는 신앙의 투쟁”을 상징한다고 설명합니다. 따라서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은 단순한 민족적 호칭이 아니라 하나님과의 관계 안에서 형성된 언약 공동체의 정체성을 나타냅니다.
예수님 시대의 유대인들에게도 이스라엘은 단순한 정치적 개념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자신들을 아브라함과 이삭과 야곱의 후손으로 이해했으며,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언약 백성으로 여겼습니다. 또한 다윗 왕국의 영광을 기억하며 메시아를 통한 회복을 기대했습니다. 예레미야스는 당시 유대인들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들을 때 세 가지를 동시에 떠올렸다고 말합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선택, 언약에 대한 충성, 그리고 장차 회복될 하나님 나라의 소망이었습니다.
흥미로운 사실은 복음서가 기록될 당시 이스라엘이라는 독립 국가는 존재하지 않았다는 점입니다. 유대 땅은 로마 제국의 지배 아래 있었으며, 정치적으로는 분열되고 종교적으로도 다양한 갈등이 존재했었습니다. 이스라엘 국가라는 개념은 존재하지 않았지만, 예루살렘 성전은 여전히 민족과 신앙의 중심지였고, 사람들은 자신들을 “이스라엘”이라 부르며 하나님의 약속을 기다렸습니다.
복음서에서 예수님은 이스라엘을 무시하거나 폐기하지 않으셨습니다. 오히려 그분의 사역은 이스라엘을 향한 하나님의 약속을 성취하는 데 집중되어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내가 율법이나 선지자를 폐하러 온 줄로 생각하지 말라. 폐하러 온 것이 아니요 완전하게 하려 함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께서는 열두 제자를 세우셨는데, 이는 우연이 아닙니다. 열두 제자는 이스라엘 열두 지파를 상징하며, 하나님께서 자신의 백성을 새롭게 회복하실 것을 보여 주는 상징적 행위였습니다. 또한 예수께서는 제자들을 파송하시면서 “이방인의 길로도 가지 말고 사마리아인의 고을에도 들어가지 말고 오히려 이스라엘 집의 잃어버린 양에게로 가라”고 명령하셨습니다.
신약학자 N. T. 라이트는 예수님의 사역 전체를 “이스라엘의 회복 운동”으로 이해합니다. 그는 예수님은 단순히 개인의 구원을 선포하신 것이 아니라, 포로 상태와 같은 영적 억압의 상태에 있던 이스라엘을 회복시키고 하나님의 언약을 완성하기 위해 오셨다고 설명합니다. 예수님의 복음 선포는 처음부터 이스라엘과 분리될 수 없는 사건이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는 동시에 이스라엘의 실패와 불신앙도 숨기지 않습니다. 예수께서는 예루살렘을 바라보며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라고 눈물을 흘리며 탄식하셨습니다. 포도원 농부의 비유에서도,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을 거절하는 백성의 모습을 통해 이스라엘 지도자들의 완고함을 지적하셨습니다. “포도원 주인이 어떻게 하겠느냐 와서 그 농부들을 진멸하고 포도원을 다른 사람에게 주리라.”
이런 이유로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버리시고 교회를 대신 선택하셨다는 이른바 “대체신학 Replacement Theology가 등장하기도 했었습니다. 그러나 복음서 자체는 그러한 결론을 직접적으로 제시하지는 않습니다. 오히려 예수님께서는 로마 백부장의 믿음을 칭찬하시면서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 말씀은 이스라엘의 특별한 지위를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만일 이스라엘이 이미 버림받은 공동체였다면 이러한 비교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탄식과 지적은 이스라엘 민족 자체를 향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거부하는 사람들의 불신앙을 향한 것입니다. 복음서 어디에서도 “이스라엘은 영원히 폐기되었다”는 선언은 발견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회개와 회복에 대한 초청이 계속 이어집니다.
사도 바울 역시 같은 맥락에서 동족의 불신앙을 안타까워하면서도 “하나님이 자기 백성을 버리셨느냐? 그럴 수 없느니라”고 단언합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계획 속에서 이스라엘의 역할이 여전히 중요함을 주장합니다. 복음서는 물론이고 바울의 서신들 역시 하나님의 신실하심이 인간의 실패보다 크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이스라엘은 단순히 눈으로 식별되는 민족도 그리고 땅도 아닙니다. 하나님과 씨름하며 하나님의 은혜를 붙드는 믿음의 공동체입니다. 야곱은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그는 부서지고 상처 입은 상태에서 하나님의 축복을 붙들었고, 그때 비로소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받았습니다. 이후 이스라엘은 한 민족의 이름이 되었고, 더 나아가 하나님의 언약을 붙드는 신앙의 상징이 되었습니다.
“이스라엘”은 생물학적 혈통이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약속된 유업을 이을 자로, 하나님과 겨루어 이기리라는 고대의 명령을 적극적으로 성취해 나가는 사람들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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