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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죽음, “예수님의 케이스”

죽음, “예수님의 케이스”

폴릭세네는 트로이아의 마지막 왕 프리아모스의 막내딸입니다. 트로이아가 그리스와 전쟁에서 패하자 그 나라 여성들은 그리스  군인들의 전리품이 됩니다. 폴릭세네 공주는 전리품이 되어 비참한 죽음을 맞이하게 됩니다. 죽음 앞에 선 그녀는 의연한 태도로 “나는 노예가 아니고 프리아모스 왕의 딸 폭릭세네다.”고 외치며  공주의 품위를 잃지 않았습니다. 그녀의 가슴에 칼이 들어올 때도 흐트러짐 없이 평온한 표정을 잃지 않는 그녀의 모습에 감동을 받은 그리스인들은 폴릭세네를 나라의 명예로운 사람으로 드높였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영웅들의 죽음은 위엄이 있으며 용기와 힘을 보여 주는 죽음입니다. 그리스의 작가 호메로스의 작품 『일리아스』나 『오디세이』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언제나 용맹스럽고 강인함으로 선한 일을 하는 중에 죽어갑니다. 트로이아 전쟁의 영웅인 아킬레스, 그리스 신화의 대 영웅인 헤라클레스, 트로이아 전쟁의 총사령관인 핵토르 등과 같은 영웅들은 냉정함과 용기를 잃지 않고 초연하게 죽음을 맞이합니다. 서양 철학의 창시자로 불리우는 소크라테스는 사형집행 당일 친구들과 제자들에 둘려 쌓여 독배를 마시고 죽음을 맞이합니다. 죽음 앞에 어떤 동요도 없이 자신의 사상을 밝히고 독주를 마신 그는 “철학계의 순교자” 그리고 성인으로 불렸습니다.

   초대 교회 역사를 기록한 유세비우스의 『교회사』에는 신앙의 위대한 인물들은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당당하고 용기 있고 존엄하게 순교했다고 기록합니다. 그 중 한 인물은 요한계시록 2:8-11에 언급된 서머나 교회의 감독이었던 폴리갑입니다. 사형 집행관이  폴리갑에게 그리스도를 믿는 죄를 고백하지 않으면 맹수들에게 던진다고 말하자, 그는 “맹수를 부르라. 나는 악한 것을 받아들이기 위해 선한 것을 버리는 일에 익숙하지 않다”라고 답합니다. 집행관은 “그대가 맹수를 무시하니, 끝까지 뉘우치지 않으면 불에 타 죽게 하리라”고  겁을 줍니다. 폴리갑은 “당신은 한 시간 동안 타다가 곧 꺼지는 불로 나를 위협하지만, 경건치 못한 자들에게 예비된 영원한 불 심판을 모르는구나. 당신의 원대로 어서 시행하라! ”고 다그칩니다. 폴리갑은 흐트러짐 없이 담대했고 그 얼굴에 기쁨과 은혜가 가득했습니다. 그의 태도에 놀란 집행관은 준비된 장작 더미 가운데 세워진 기둥에 그를 묶고 못 박으려고 할 때, 폴리갑은 “나를 이대로 내버려 두라. 나에게 불을 견딜 수 있는 힘을 주신이가 당신에게 못 박히지 않고도 흔들리지 않고 불 속에서 견딜 힘을 줄 것이다”고 그를 거절합니다. 폴리갑이 기도를 마치고 “아멘” 할 때, 집행관은 장작에 불을 지핍니다. 큰 불꽃이 일어나고 그는 화염에 휩싸일 때까지 서 있었습니다. 순교자의 길에서 우리 주님을 따랐던 사람들조차도 힘과 활력으로 죽었습니다. 

   죽음에 직면하는 예수님의 태도는 이런 영웅들과 사뭇 다릅니다.자신의 죽음이 임박해 오자 두려운 가운데 기도합니다. 성경은 예수님께서 얼마나 간절하게 기도했는지 땀이 마치 핏방울처럼 땅에 떨어졌다고 기록합니다. 이 내용은 지식인이었으며 의사였던 누가가 적은 글입니다. 자주 발생되는 현상은 아니지만, 사람은 정신적 스트레스를 심하게 받을 때 땀샘에 있는 모세 혈관을 파괴하는 현상이 몸에서 발생합니다. 이것을 의학적으로 혈한증 (血汗症 hematidrosis)이라 부르는데, 땀샘으로 소량의 피가 들어와 땀을 흘릴 때 피가 섞여서 나오게 됩니다. 예수님은 죽음에 압도되어 번민과 고통으로 씨름했던 것입니다.  

   십자가 형을 당하기 위해 형장에 끌려 가셨던 예수님의 모습 속에 영웅적인 요소는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예루살렘 공회에서 사형이 확정된 예수님은 그 도시 외곽에 위치한 사형장인 골고다 언덕으로 이끌려갑니다. 예수님을 이끌던 군인들은 구경꾼들 속에 있던 구레네 출신 시몬에게 예수님의 십자가를 대신 지도록 강요합니다.  그리고 자신들이 예수님을 끌고 갑니다. 문자적으로는 군인들이 예수님을 들러 메고 갔다는 뜻입니다. 영어 성경 KJV는 그들이 물건을 들고 가져오듯 예수님을 가져왔다고 번역합니다. 예수님은 군인들에게 무자비하게 채찍질을 당해서 몸을 지탱할 수 있는 힘이 다 빠진 연약한 상태였습니다. 스스로 걸을 수도 없었고 십자가를 질 힘도 없었습니다. 그 어떤 저항도 할 수 없는 약한 상태에서 군인들의 손에 의해 십자가 각목 위에 눕혀져 손과 발에 7에서 5인치 되는 대못이 박혔습니다.    

   예수님께서 달린 십자가가 길 옆의 형장에 세워지자  지나 가던 사람들이 머리를 흔들며  “남은 구원하는 자여, 네가 너를 구원하기 위해 나무에서 내려와봐라!” 고 비웃으며 조롱합니다. 그곳에 있던 종교 지도자들도 예수님께 희롱의 말을 던집니다. “네가 남은 구원하면서 너 자신은 구원할 수 없더냐!” “이스라엘 왕 그리스도여 네가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러면 우리가 너를 믿겠노라”고 희롱합니다. 심지어 흉악한 죄를 범하고 십자가에 달려 예수님의 십자가 옆에 있던 강도들도 예수님을 조롱합니다. 한 인간이 당할 수 있는 최극한의 아픔과 고통 가운데 예수님의 죽음은 진행되었습니다.   

   영웅적 모습이 드러나지 않는 예수님의 죽음의 과정에 스쳐 지나치기 쉬운 다음 한 장면이 있습니다. “몰약을 탄 포도주를 주었으나 예수께서 받지 아니하시니라.” 유대인의 탈무드에 따르면 예루살렘에 사는  여성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죄수들이 극심한 고통을 겪기 때문에, 그 고통을 잊도록 십자가에 달린 그들에게 마약을 제공했습니다. 예수님은 그것을 거절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의 연약함과 고통 당하심은 자발적이었던 것입니다. 아무 힘이 없고, 능력이 없고, 그래서 군인들에게 붙잡혀 십자가에 달린 것이 아니었습니다. 주님은 의도적으로 십자가의 고난과 죽으심을 인내하셨습니다. 그 의도한 목적을 성경은 이렇게 밝힙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예수님의 죽으심은 우리의 죄를 용서하기 위한 하나님의 사랑이었습니다. 예수님은 그 사랑을 이루기 위해서 죽기까지 순종하며 인내하셨던 것입니다. 예수님의 죽음은 영웅들의 그것과 달랐습니다. 예수님의 죽으심이 우리의 생명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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