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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 그런뜻이었구나] 다툼, “땅에서 오는 지혜”

다툼, “땅에서 오는 지혜”

유대인의 현자들은 진정한 지혜는 위로부터 온다는 데 항상 동의했습니다. 그것은 성취가 아니었습니다. 사람의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로 여겼습니다. 솔로몬의 지혜서에 “하나님의 권능의 호흡이요 전능자의 영광에서 흘러나오는 순결한 감화”라고 지혜를 규정합니다. 야고보는 위로부터 오는 지혜를 구별시키기 위해 땅에서 오는 지혜를 먼저 나열합니다. “너희 마음 속에 독한 시기와 다툼이 있으면 자랑하지 말라 진리를 거슬러 거짓말하지 말라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 시기와 다툼이 있는 곳에는 혼란과 모든 악한 일이 있음이라.” 

   땅의 지혜 목록에 포함된 “다툼”은 흥미로운 배경을 갖고 있습니다. 다툼만이 아니라 “이기심,” “야망,” “당 지음,” 그리고 “폭동”의 뜻으로 번역되기도 하는 희랍어 “에리떼이아”는 원래 “일용직 노동자” 그리고 “하루의 일을 하다”를 뜻했습니다. 언어 학자들은 이 낱말이 “양털”이나 목화 나무에 열리는 “솜털”을 뜻하는 희랍어 “에리온”에서 유래되었다고 봅니다. 이 단어는 특히 “방적사,” 즉 섬유에서 실을 뽑아내는 사람이나 베를 짜는 직조공과  관련이 있다고 봅니다. 따라서 에리떼이아는 개인이 노동을 해서 작은 양털이나 목화를 채취하여 천을 만드는 아름다움이 있는 단어입니다. 이 낱말은 천을 만들면서 임금을 얻기 위해 개인이 하는 노동을 의미하는 단어로 신성한 단어였습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낱말의 뜻은 퇴화됩니다. 노동의 신성함도 서서히 사라지고, 털이나 솜과 같이 작은 것들이 모아져서 아름다운 천으로 창조되는 신비한 정서도 없어졌습니다. 대신 돈을 얻기 위한 동기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의 태도를 의미하기 시작했습니다. 인간 영혼과 사회를 위해 도움이 되는 순수한 동기는 완전히 없어지고 오직 한 가지 질문에 대한 답만 요구되었습니다. “이 일을 통해서 내가 얻을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이와 같은 내면의 동기에서 밖으로 표현되는 개인의 행동 방식을 에리떼이아라 불렀습니다. 이 낱말의 의미는 점차적으로 공공기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술책이나 선거 운동을 하는 사람들의 음모로 발전됩니다. 그래서 공직을 구하는 사람의 특징은 자신이 국가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무엇을 추구하기보다는, 단순히 자신의 명예와 영광과 이익을 위한 것이 되었습니다. 

   결국 시간이 지남에 따라 이 단어는 두 가지 의미로 고정되어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세속 정치와 교회 정치 모두에서 추구하는 지위와 권력을 얻기 위한 음모와 높은 직책을 맡기 위한 책략으로 특정되었습니다. 이 낱말은 정치하는 사람이 자기 “당을 위한 말다툼”으로 사용되었습니다.  둘째, 이 낱말은 “이기적인 야망,”  즉 봉사의 개념이 없고 오로지 자기 이익과 권력만을 목적으로 하는 야망이라는 의미로 귀결되었습니다. 

   신약 성경이 기록되기 전에 쓰여진 아리스토텔레스의 『정치학』에는 이 단어가 “정치 음모”로 사용됩니다. 그는 정치음모가 끼치는 영향력을 이렇게 설명합니다. “이미 말했던 것처럼 당파 싸움에 관여하는 사람은 자기 이득과 영광을 얻을 동기로 사람들을 선동하여 상대방을 적으로 보게 한다. 그들은 오만하고 과도한 지배욕에 사로 잡혀 있을 뿐만 아니라, 쩨쩨하고, 부주의하며, 선거 음모를 꾸미는 자들이다. 공직자들이 오만과 탐욕을 보일 때 사람들은 서로에 대해 반목하고 헌법을 불신한다. 탐욕은 때로는 사유 재산을, 때로는 공동 자금을 약탈한다. 명예의 힘이 무엇이며 그것이 어떻게 당파를 일으킬 수 있는지도 분명하다. 사람은 스스로 불명예를 당할 때와 다른 사람들이 존경받는 것을 볼 때 파벌을 형성하기 때문이다.”

   정신이 타락한 의미로 바뀐 에리떼이아는 그 자체로 인간의 본성에 대한 암울한 논평입니다.  신약에서 이 낱말은 언제나 교회 사역을 무너지게 하는 근원으로 쓰입니다. 바울이 기록한 서신서들에 이 단어가 단연코 많이 사용된 이유는 바울보다 초대교회 내부를 잘 아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입니다. 교회가 그토록 쉽게 무너질 수 있었던 것은 바로 이 실패 때문이었습니다. 로마서 2:8에 이 단어는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따르지 아니하고 불의를 따르는 자”들을 언급할 때 사용됩니다. 『공동번역』성경은 이 낱말을  “자기 이익만을 생각하는”사람들이라고 번역합니다.  

   고린도에 있는 하나님의 교회가 거의 무너질 뻔했던 것은 그리스도의 최상권보다 자기 자신의 최상권에 더 관심을 두는 분파와 파벌 싸움이 교회를 분열시키는 그 잘못 때문이었습니다.  고린도후서 12:20에서 이 단어는 고린도에 있는 교회를 파멸시키는 과실들의 목록인 “다툼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비방과 수군거림과 거만함과 혼란” 중에 첫 번째로 기록합니다. 

   빌립보에서 그것은 실제로 어떤 설교자들의 선동적인 동기가 되었습니다.  “그들은 나의 매임에 괴로움을 더하게 할 줄로 생각하여 순수하지 못하게 다툼으로 그리스도를 전파하느니라.” 그들은 그리스도의 위대함 보다 자신들의 위대함을 보여주기를 열망했습니다. 제임스 데니 (James Denney)는 “어떤 설교자도 자신이 탁월하고 또한 예수 그리스도가 훌륭하다는 것을 동시에 보여줄 수는 없다”고 신랄하게 말했습니다. 야고보는 이 단어를 두 번 사용하는데, 하나님께서 주시는 지혜와 정반대 되는 지혜라고 말합니다.  “이러한 지혜는 위로부터 내려온 것이 아니요 땅 위의 것이요 정욕의 것이요 귀신의 것이니”라고 당을 짓는 출처를 밝힙니다. 『개역개정』성경은 두 번의 경우 모두 “다툼”으로, 『NRSV』성경은 “이기적인 욕망 selfish am ambition”으로 번역합니다.  

   바울에게 사람이 자신의 야망을 드러내는 것은 육신에 관한 일이었고, 야고보에게 그것은 세속적이고 관능적인 지혜였습니다. 야망은 모든 것에 세속적 표준과 인간적 기준을 적용하고, 개인의 명성과 개인적 성공의 척도로 사물을 평가하는 사람의 특성입니다.  사람이 정직한 하루의 보수를 위해 하는 노동을 묘사하는 말로 시작해서, 결국 급여와 보상만을 위해 하는 일을 묘사하게 된 것은 인간의 본성이 무엇인지를 잘 보여주는 실례입니다.  이것은 우리 세대에 대한 경고입니다.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대부분의 문제는 기본적으로 경제적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 삶의 심각한 문제는 언제나 “내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얻을 수 있을까?”이지, “내가 삶에 무엇을 줄까?”가 아닙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 중에는 그렇지 않아야 하나니 너희 중에 누구든지 크고자 하는 자는 너희를 섬기는 자가 되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으뜸이 되고자 하는 자는 너희의 종이 되어야 하리라.” 그리고 인류의 구세주가 되셨던 자기 삶의 자세가 무엇인지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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