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아버지에 대한 기억
자식이 20대 후반이니 좀 늦은 감이 있지만 어머니를 위한 어느 모임에 참석 중이다. 이 나이에 참석하는 사람이 있을까 살짝 눈치도 보이지만 이젠 남의 말엔 신경 좀 덜 쓰고 살자 스스로 다독거리며 ‘근 30년을 어미로 살아온 나에게 뭔가 주시는 말씀이 있겠지. 그도 아니면 잘 배워서 태국에서 어미로 살아가는 이들에게 작은 보탬이라도 줄 수 있겠지….’ 내심 기대하면서 어미됨에 대해 듣는다. 명색이 학교이니 숙제도 있다. 아버지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오란다. 어린 날, 어버이날 쓰던 편지 말고는 아버지께 편지를 써본 기억이 없다. 우리는 각자의 기억속의 아버지를 불러내어, 이미 고인이거나 노년의 길을 걷는 그 남자들에게 대답없는 말을 건넸다.
아버지! 사람을 부르는 일은 그가 남긴 삶의 흔적들을 같이 불러온다. 딸바보 아버지를 그리움으로 불러내는 중년의 여인이 있는가하면, 술만 드시면 폭군으로 변했던 아버지를 원망과 분노로 불러내는 딸이 있었다. 어리광이 잔뜩 묻은 애어른(어른애?) 딸은 딸바보 아버지에 대한 살뜰한 추억에 연신 화장지를 뽑아 힝힝 코를 풀어댄다. 그래도 입에는 함박 웃음이 걸려있다. ” 아빠 사랑해요 .”로 마무리 되는 다른 이의 스토리를 들으며 자신도 모르게 가슴 한켠에 슬픔이 고이는 쓰라린 가슴도 있다. 무섭기만 했던 아버지가 남긴 기억에 억억 울음을 삼키며 후우 후우! 숨을 몰아쉰다. 그 차가운 얼굴의 아버지에게 한마디 한마디 어렵사리 말을 붙인다. 오랫동안 쳇기를 일으키던 슬픔은 어른이 된 딸의 흐느낌이 되고 마침내는 “아버지, 당신을 용서합니다.”로 마침표를 찍는다.
나의 아버지…. 아버지는 말씀이 거의 없었지만 아버지가 남긴 기억은 내가 살아오는 내내 큰 재산이었다. 장마철마다 동네앞을 흐르던 강을 업어건네 주신 아버지… 발아래 흐르는 무서운 황토물을 보며 아버지의 등의 납작 들러붙어서 느낀 아버지의 체온과 땀냄새… 예비군 훈련을 갔다 오시면 점심으로 나온 단팥빵과 우유를 드시지 않고 주머니에 넣어와서는 “먹어라!” 퉁명스럽게 방바닥에 내놓으시던 아버지…그 아버지의 거칠고 검은 손… 야간 자율 학습을 마치고 밤 버스를 타고 동네에 내리면 시골 버스 정류장, 그 어둠속에 서서 기다리시던 아버지… 말만한 덩치의 딸이 버스에서 내리기가 무섭게 왔나? 하며 돌아서 성큼성큼 1미터 앞서 걸으시던 아버지… 그 보일락 말락, 잡힐 듯 말듯한 사랑을 먹고 나는 예까지 왔다. 남들 보기엔 그냥 중년의 아줌마인 별 볼일 없는 내가 이래 뵈도 어느 딸바보의 보석이었단 말이다. 아버지가 남긴 유산은 얼마나 어마어마한가! 평생을 뼈빠지게 일하시다 팔십 노인이 되신 우리 아버지는 아직도 전화하면 “우애든동 열심히 살아라.” 말씀하신다. 성실함은 아버지가 내게 남기신 또다른 소중한 유산이다.
수요 예배 후 어두운 예배당에 홀로 앉아서 또 한 분 아버지를 불러본다. “아버지!!!” 나는 아버지이~~~ 하며 길게 부르는 걸 좋아한다. 내 목소리가 아주 멀리까지 가닿을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금방이라도 “오냐, 오냐… 그래 그래.” 하실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살아오면서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나의 기억은 또 얼마나 따뜻하고 시원하고 애틋한지…. 참 다사다난하기도 하다. 그 아버지가 없었더라면 나는 지금 살아있을까… 걸음걸음 소중한 우리들의 추억을 잊어버릴까 무서워 주섬주섬 일기로 적는다. 이 귀한 우리들의 추억들을 잊어버리면 안되지….
“미영아 너무 열심히 살지마라. 그렇게 과부하걸리게 살지 않아도 나는 니 모습 그대로 사랑한단다. 너는 언제나 내 소중한 딸이란다.” 눈물이 핑돈다. 우리 하늘 아부지도 딸바보다. 이런 아부지가 계시는데 … 뭘 더 바래겠나 싶다.
아버지란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 아버지란 얼마나 막중한 자리인지…
그들이 남긴 기억이 이제 어미가 되어 자식을 잘 키워보겠다고 모인, 이름모를 여인들을 웃게한다. 울게 한다. 나는 어떤 기억들을 남기고 사는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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