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원의 길 (열왕기하5장1절-14절)-이기석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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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의 길 (열왕기하5장1절-14절)

지금으로부터 약 2800년전 아람이라는 나라의 나아만 장군에 관한 이야기입니다. 그가 어떤 인물이었는지는 1절에 짧게 나와있습니다. “아람 왕의 군대장관 나아만은 그의 주인 앞에서 크고 존귀한 자니 이는 여호와께서 전에 그에게 아람을 구원하게 하셨음이라.”

  1. 성공하였지만 죄로 물들어있는 인물의 표상: 나아만

나아만을 표현하는 두 단어는 1.크다  2. 존귀한 자다 입니다.

 그는 아람 왕 앞에서 큰 자, Great man 이었습니다.  한 나라를 구원한 장군이었기에  아람 왕은 나아만 장군을 크게 의지할 수 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나라를 구한 자들은 주로 이런 말들을 듣습니다.  “내가 너보다 높은 것은 이 왕의 자리뿐이다.” 애굽 왕인 바로가 애굽을 구한 요셉에게 이와 같은 칭송을 했듯, 나아만장군도 아람왕에게는 요셉과 같은 칭송을 받을 만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또 나아만은 아람 왕앞에서 존귀한 자였습니다.  그는 위대할 뿐만 아니라 존귀한 자라고 일컬음을 받았습니다.  마치  다윗이 아비새를 향해서  “가장 존귀한 자다”라고 칭했던 것처럼 말입니다. 다윗은 아비새를 비롯한 부하들이 떠온 물을 차마 마시지 못했습니다. 왜냐하면 그 물은 아비새를 비롯한 부하들의 피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서 차마 마시지 못하고 하나님의 제단에 붓습니다. 그들이 가져온 것은 물이 아니라 자신들의 목숨과 바꾼 존귀한 것이기에 그 물을 피로 제사를 드리는 것처럼 부어드린 것입니다. 나아만 장군을 존귀한 자라고 말한 것은 그가 얼마나 왕에게 사랑을 받는 존재인가를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습니다.  

이처럼 나아만은 위대한 인물일 뿐만 아니라 존귀한 자입니다. 아무것도 부러울 것이 없는 사람,모든 것을 성취한 나아만에게도 한가지 치명적인 부분이 있었습니다. 바로 나병환자라는 사실입니다. 

나병은 문둥병 혹은 한센병으로도 불리는 병으로 살이 썩어도 아프지 않는 무서운 질병입니다. 손톱이 빠져도,손가락이 썩어 떨어져도, 코끝이 썩어도 아파야 정상인데 아프지 않습니다. 주로 말초신경부터 썩어져서 점점 온몸이 망가지는 참으로 지독한 병입니다. 나병이 우리의 죄와 비슷하지 않습니까? 죄로 인해 우리의 영혼이 썩어가고 있는데 당장 벌 받지 않으니, 아무도 모르니 그 죄를 즐기며 가만히 두다가 결국 영원한 형벌에 이르는, 그때야 깨닫는..  그래서 나병은 ‘죄’를 상징하는 병이기도 합니다.  

팀 켈러 목사님의 책 ‘내가 만든 신’ 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개인적 성공과 성취는 어느 우상보다 더 우리에게 자신이 신이라는 느낌을 준다” 

성공해서 정상에 오르면 그 사람은 최고가 되고, 그 때부터는 성공과 성취를 반복해야 자기 자신의 존재감이 드러나기에 겸손과는 거리가 멀어집니다. 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허리를 굽힐 줄 모르고 굴욕당하는 상황은 죽을 만큼 싫어하게 됩니다. 성공의 굴레에 갇혀서 서서히 망가지고 맙니다. 

나라를 구한 인물 나아만은 권력과 부, 명예를 다 가진 자였으나, 죄를 상징하는 나병환자였다는 사실에서 우리의 모습을 볼 수 있어야합니다. 이것을 볼 수 있다면 하나님의 큰 은혜일 것입니다.  우리 중에 누구도 나라를 구한 만큼 위대한 일을 한 적도 없고, 우리 중에 누구도 그렇게 세상사람들이 박수를 치며 환호를 하는 성공을 거둔 사람은 없지만, 우리 모두는 어떤 부분에서 작은 성공과 성취에 목말라 있습니다. 가정에서부터 어린아이들에게 성공을 주입시키는 일을 시작합니다. 아이들이 자라면서 성공하지 않은 인생은 쓸모없는 인생처럼 느끼게 합니다. 공부잘하면 성격이 조금 괴팍해도 용서가 됩니다. 끊임없이  성공을 향한 무한 경쟁체제에 들어가게 하고, 똑똑한 악마들을 무한 생산해내고 있음을 절망해야 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오히려 그 경쟁에서 이기지 못하는 아이를 탓하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최고의 성적으로 법관이 되고, 정치가, 의사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재능을 이용해서 오히려 사회를 혼란스럽게 만드는 괴물이 되어 있음에 우리는 절망해야합니다.  돈을 잘 버는 회사 사장의 불륜은 눈감아 주어야하는 것처럼 받아들이는 이상한 사회가 되어가고 있음을  절망해야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는 그 속에 휘말리고 있는 것 같습니다. 

‘꿩잡는 것이 매’라는 말처럼 어떤 방법을 쓰든지 간에 목적을 이루는 것이 최고의 가치인냥 교회도 성공적인 마켓팅에 목말라하는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소위 성공한 목사들이 그 뒤에 얼마나 추악한 죄를 감추고 살아왔는지, 그런 죄가 드러남에도 불구하고 성공했다는 이유로 용서가 되는 것에 우리는 얼마나 절망하고 있습니까?

다시한번  나아만 장군에게서 우리의 모습을 발견할 수만 있다면 우리는 참으로 큰 복을 받은 자입니다.  성공하였지만 죄로 물들어 죽어가고 있는 자, 나아만에게 이제 한 줄기 빛이 비취기 시작합니다. 마치 썩어있는 거대한 호수에 한줄기의 샘물처럼 희망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1. 누구에게나 절실히 필요한 복음

나아만 장군의 집에는 이스라엘로부터 잡혀온 어린 여종이 있었습니다. 이 여종이 나아만의 아내에게 기쁜 소식을 전합니다. 그야말로 복음입니다. ‘나아만 장군님이 사마리아에 계신 선지자를 만나면 좋겠습니다. 그분은 나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라고 말을 하는 겁니다. 아람과 북이스라엘은 전쟁중에 있는 나라였고, 이 여종은 적국인 이스라엘에서 붙잡아온 자입니다. 작은 자 중에 작은 자인 이 하녀가 하는 말에 그 나라에서 큰 자 중에 큰 자인 나아만이 귀를 기울이게 되는 놀라운 일이 벌어집니다. 극적인 반전의 신호탄이요,기적과도 같은 일입니다. 

이제 나아만은 몇 번의 굴욕적인 일을 당하며 구원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데, 그 첫번째 굴욕은 바로 어린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나아만의 성공과 대비되는 나병환자의 상황은 그 누구도 해결해줄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나랏님도 도움을 줄 수 없었기에  점점 썩어가는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면서 절망할 수 밖에 없는 나아만은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으로 여종이 하는 조그마한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복음을 전하는 자의 자세와 복음을 받는 자의 상황에 대해서 들여다 볼 수 있습니다. 

복음을 전하는 여종은 자신이 경험하여 알고있는 사실에 대해서 간단하고 명료하게 전했을 뿐입니다. 물론 진심을 담아서 그 말을 했을 것입니다. 여종의  상황을 보면 그리 쉽게 호의를 베풀 수 있는 상황은 아닙니다. 고향을 떠나서 포로의 신분으로 지낸다는 것은 얼마나 고달픈 일입니까? 자신을 이렇게 만든 장본인에게 호의를 베푸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이 여종은 주인인 나아만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자기가 알고있는 사실은 전해주었습니다. 

이 여종의 진심의 말 한마디에 나아만이 움직이고, 나아가 아람나라의 왕도 움직이게 됩니다. 나중에 보게 되겠지만 이스라엘왕에게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참으로 파워풀합니다. 작은 나비 한마리의 날개짓이 다른 곳에서는 큰 태풍이 되는 나비효과처럼 작은 여종의 그 말은 능력있는 복음이 되어버립니다. 

이 과정에 복음을 전하는 사람, 여종이 있었다면, 복음을 간절하게 기다린 사람, 나아만이 있었습니다. 복음을 듣는 자인 나아만은 다른 해결책이 없음을 알아 절망하고 있었습니다. 그렇습니다. 복음이 복음되는 것은 마음의 상태가 절망을 느끼고 있을 때입니다. 나병과 함께 세상 성공을 누리며 나아만은 살 수는 없었을까요?  아니요, 절대 그럴 수 없습니다.  남부럽지 않는 삶을 살고 있는 자라도 복음이 아니고는 그 마음의 절망을 해소할 수 없다고 고백하는 자에게 복음은 들립니다.  복음은 모기만한 소리로 예수님이 우리의 구원자라고 소개해도 마음이 가난한 자, 죄로 절망한 자에겐 확성기를 통해 귀가 떨어져나갈 정도로 크게 들립니다. 

죄를 미워하는 단계, 자신의 죄문제로 스스로 절망하는 이 때가 복음으로 눈을 뜨는 첫 걸음입니다. 

나아만이라는 위대한 장군은 이제 체면도 자존심도 없습니다. 여종의 말을 듣고는 바로 왕을 찾아갑니다. 왕을 대면하여 여종의 말이 이러이러합니다,보내주옵소서  말하는 자신이 부끄럽지 않았을까요?  포로로 잡혀온 여종의 말이 뭐가 그리 대단하다고 중대사를 논하는 왕 앞에서 그 이야기를 하고 있었을까요? 나아만장군의 두번째 굴욕이 바로 이 장면입니다. 미국의 넘버2인 부통령이 미국 대통령 앞에서 ‘제가 우리집 가정부로 일하는 여자아이가 하는 말을 들었는데… ‘하면서, 적국과 외교분쟁을 일으킬 만한 엄청난 것을 제안한다면 어떻게 될까요?  말을 하는 사람도, 그 말을 듣는 사람도 웃기는 상황입니다. 

그러나, 아람의 최고 권력자 두 사람은 이 일을 진지하게 받아들였습니다. 아람 왕이 은 십달란트, 금 육천개, 의복 열 벌,어마어마한 재물을 나아만에게 주어서 이스라엘로 가게 합니다. 수백억을 들여 나병이 낫기만 한다면 그 돈이 전혀 아깝지 않을 만큼 나아만은 위대한 사람이었고, 왕으로부터 사랑을 받는 사람이었습니다. 게다가 아람왕은 이스라엘왕에게 친서를 씁니다. ‘나아만 장군을 보내니 이 사람의 나병을 고쳐주소서’

이 편지를 받은 이스라엘왕은 얼마나 황당합니까? ‘아니 내가 하나님도 아닌데, 어떻게 그 사람의 병을 고친단 말인가, 이것을 구실 삼아 전쟁을 하려는가..’  이스라엘은 바로 비상경계령이 내려집니다. 

어린 여종이 전해준,작은 나비의 날개짓 같은 복음이 아람의 최고의 권력자 나아만과 왕을 움직였고, 그것은 이스라엘에 와서는 태풍이 되어버립니다. 이스라엘왕이 자신의 옷을 찢어버립니다. 옷을 찢는 행위는 슬픔과 두려움과 분노를 표현하는 것인데, 이스라엘왕은 큰 두려움에 어찌할 바를 몰라 옷을 찢었을 것입니다. 어찌 이 상황을 벗어날 수 있을까?  염려하는 마음으로 옷을 찢었을 것입니다. 왕이 옷을 찢었다는 소식을 듣게 된 엘리사가 나아만을 자기에게로 보내라고 하여 이제 그들이 엘리사의 집으로 가게 됩니다. 

엘리사는 직접 나아만을 만나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서 요단강에 일곱번 몸을 담그라고 명령을 합니다. 나아만 장군의 세번째 굴욕적인 장면입니다. 

나아만장군도 이때만큼은 참을 수가 없었습니다. 불같이 화를 냅니다. 아니 저사람이 무엇인데 나를 이렇게 무시하나?  지금 비록 나병에 걸렸지만 한나라의 최고의 권력자인 나에게 나와보지도 않고 사환을 시켜서 명령을 해? 적어도 내 몸에 손을 대어서 무슨 의식이라도 해야하지 않는가? 내가 지금 돈을 얼마나 싸들고 왔는데? 아람 땅에도 훨씬 더 좋은 강들이 많은데 하필 이 요단강에 들어가야하는가?  분노를 감추지 못합니다. 

복음에 눈을 뜨기는 했지만 아직도 자아가 살아남은 나아만의 모습입니다. 그는 아직도 돈으로 뭔가를 해결할 수 있다는 세계관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자기가 가지고 있는 권력과 힘으로 뭔가를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입니다. 아람 땅의 강들을 언급하는 것을 보면 아직도 그는 자신의 경험이 소중하고 그 경험한 것에 제한되어있는 사람처럼 보입니다. 복음 앞에 자신을 낮추어 이곳까지 왔지만 마지막 남아 있는 자존심을 꺾지못하는 모습입니다. 

혹시 우리에게도 아직 하나님앞에, 복음앞에 일말이라도 남아있는 자존심이 있습니까? 그동안 살아왔던 경험이 소중해서 ‘내가 놀던 곳으로 돌아갈래, 내가 목욕하던 그 강으로 돌아갈래’ 하면서  말씀앞에 고집을 피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나아만 장군의 종들은 나아만 장군에게 강권합니다. “이곳까지 왔는데 더 큰 일을 시키더라도 행하지 않았겠습니까? 장군님,그냥 요단강에 들어가시지요”

종들의 간청에 자신의 분을 삭히면서, 의심하면서 요단강에 일곱번 들어가게 됩니다. 이것이 나아만장군의 네번째 굴욕입니다. 포로인 여종의 말에 귀를 기울이게 된 일,  왕에게 그 어린아이의 말을 진지하게 전한 일, 엘리사로부터 문전박대를 당한 일, 겨우 겨우 화를 진정하면서 요단강에 자신의 몸을, 그것도 일곱번이나 담근 4번의 굴욕후 얻은 결과는 무엇이었나요? 

“그의 살이 어린아이의 살같이 회복되어 깨끗하게 되었더라” (왕하5장14절)

  1. 은혜로 가게된 구원의 길

나아만을 절망하게 만들었던 치명적인 병이 사라졌습니다. 죄를 씻음 받은 것입니다. 구원의 길로 온전히 들어서게 된 것입니다.  교회에 다닌다고 해서 하루아침에 온전한 신자가 되는 것은 아닙니다. 나아만처럼 여러 단계의 굴욕적인 일을 당하게 됩니다. 굴욕을 다른 말로 하자면 험블(Humble)입니다. 험블(Humble)은 겸손해진다는 의미입니다. 계속해서 하나님은 택함받은 우리의 마음을 낮추는 작업을 하십니다. 우리 주님이 내미는 그 구원의 선물을 감사히 받을 때까지 계속 우리를 겸손하게 만들 것입니다. 지금은 고인이 되신 사랑의 교회 옥한흠목사님께서 집례하셨던 한 장로님의 장례식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그 장례식에서 옥목사님은 돌아가신 장로님과 있었던 일을 나누어주셨습니다. 목사님이 보시기에 장로님은 뭔가 열심을 가지고 교회 일을 하는 것에 만족하고, 그 열심으로 하나님앞에 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처럼 보였다고 합니다. 그래서 교회의 작은 방으로 가  장로님께 복음을 전했다고 합니다. “장로님, 진실로 하나님을 믿으십니까? 오늘 당장 죽어도 천국에 갈 것을 확신하십니까? 장로님의 모든 죄를 우리 주님께서 사해주셨다는 것을 믿으십니까?”  생각해보면, 그 장로님의 입장에서는 얼마나 굴욕적이었을까요? 그래도 명색이 장로인데.. 교회일을 얼마나 많이 하는데? 내가 아직 복음도 모르고 교회 일을 할까? 이런 마음이 조금이라도 있었다면 그 장로님은 구원과는 상관없는 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분은 그 자리에서 눈물로 회개하면서 복음을 받아들였다고 합니다.  장로가 되어서야 구원의 길로 가게 된 것입니다. 

저는 지금 마치 나아만 장군의 집에 있던 여종의 심정으로 여러분에게 말씀을 드립니다. ‘주님, 제가 죄인입니다’ 라고 고백하고 겸손하게 엎드리시기를 바랍니다. 또한  마치 요단강가의 나아만 장군의 종처럼 여러분에게 권면합니다. 우리의 죄를 말갛게 씻기실 요단강에 들어가시기를 주저하고 계시지는 않습니까? 우리 주님의 말씀에 순종하시기를 바랍니다. 요단강으로 들어가시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의 나이나 직분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목사,장로, 전도사이건 아무런 상관이 없습니다. 지금도 여러분이 하나님앞에 나아가서 그 분이 허락하시는 구원의 은총을 받으시기를 원하신다면 이렇게 고백하시기 바랍니다.

은혜와 긍휼이 풍성하신 하나님 아버지, 이 시간 나의 죄를 고백합니다. 나의 자존심을 내세우면서 하나님을 거부한 나를 용서해주옵소서. 이제 하나님의 품에 안기기를 소망합니다. 집 나간 아들처럼 아버지의 집으로 돌아가기를 소망합니다. 요단강에 들어간 나아만처럼 나의 죄를 용서받기를 소망합니다. 이제 죄의 짐을 벗고 주님이 원하시는 새로운 삶을 살기를 소망합니다. 이 모든 것은 나의 죄를 대신 지고  십자가에 돌아가신 구주 예수그리스도의 공로임을 고백합니다. 이제 나의 삶의 주인이 되어주옵소서. 나를 다스려 주옵소서. 주님의 은혜로 내가 당해야할 굴욕도 이길 수  있게 하옵소서. 이 모든 말씀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진심으로 기도하셨다면 여러분에게는 큰 은혜가 임한 것입니다. 구원의 은혜로 주와 함께 평생을 살아가는 복된 삶 사시길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