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사도신경 시리즈 1.‘나는 믿습니다’ 히 10:38-39
나이아가라한인장로교회 이충민 목사
토마스 아퀴나스가 사도신경 강해 서문을 이런 말로 시작합니다. ‘그리스도인에게 가장 먼저 필요한 것은, 믿음입니다. 믿음이 없이는, 아무도 신실한 그리스도인이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토마스 아퀴나스가 이렇게 말한데에는, 사도신경은 ‘나는 믿습니다’ 라는 말로 시작되기 때문이기도 할 것입니다. 한글은 조금 다르지만, 사도신경의 원문인 라틴어도 그렇고, 영어로도 I believe~ 라고 시작하니까요.
기억하시겠지만, 작년 1월을 시작하며 10 번의 걸쳐 ‘주기도문 시리즈’를 나눴습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가르쳐 주신 기도의 의미를, 보다 깊이 살피고 마음에 새기고 싶었습니다. 그리고 오늘부터는 이 ‘사도신경’에 대해 함께 나누기를 원합니다. 사도신경 안에 담겨 있는 내용을 살펴보기 전에, 먼저 해야할 과정이 있습니다. 그것은 저희가 매주 읽거나 외우는 ‘사도신경’이 무엇인지에 대한 질문과 대답 입니다.
‘사도신경’ 은 영어로 ‘apostles’ creed’ 라고 합니다. Creed 라는 말은 ‘신경, 신조, 신념’ 이런 의미를 담기에, 자칫 ‘사도신경’을 ‘사도들의 신앙고백’ 이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의미는 그러하나 정확한 답은 아닙니다.
전설에 의하면, ‘12명의 사도가 한 문장씩 만들어서 모두 12구절이 되었다’ 라고 하는데, 이건 어디까지나 의미가 그렇다는 것이지, 실제로 베드로가 첫 문장을, 안드레가 두 번째 문장을… 이런 식으로 만들어진 신경은 아닙니다. 왜냐하면 저희가 예배 때 사용하는 사도신경은 4세기가 되어서 다듬어 지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그 전까지는 지금처럼 길지 않고, 아주 단순 했습니다.
그러면 사도들이 쓴 것도 아닌데, 왜 사도신경 이라고 부르는 걸까요? 왜냐하면 우리의 신앙고백은 사도들의 전통과 믿음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입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사도’는 예수님의 제자들 입니다.
이 때문에 일부 개신교에서는 사도신경이 가톨릭의 잔재 라고 생각하고, 사용하지 않는 경우도 있습니다. 만약 그렇게 따지면, 신약성경 27권 역시 가톨릭 교회의 주교였던 어거스틴이 중심이 되어 AD 397년에 카르타고 공회에서 확정한 것이니, 우리 개신교는 받아들일 수 없다 라고 해야 맞는 것이겠죠. 하지만 우리는 분명히 신구약 66권을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습니다.
당연히 여호와의 증인 이나 예수교 증거장막성전 이라고 되어 있는 신천지 에서는 사도신경을 가지고 신앙고백을 하지 않습니다. ‘나는 믿습니다’ 라는 이 고백에 동의하지 않기 때문이겠죠. 하지만 개혁주의 전통을 따르는 교회에서는 사도신경을 신앙고백문으로 채택합니다. 한가지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예배 순서에 사도신경이 없다고 해서 ‘모두 이단이다’ 라고 단정할 수는 없습니다.
그 다음은 ‘신경’이 뭔지 질문해야 할 것입니다. 영어로 ‘Creed’는 ‘신경’으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신념, 혹은 교리’로도 해석되는 단어입니다. 사도신경은 원래 라틴어로 쓰여 있었는데, 그 첫 문장이 ‘Credo in Deum’ 입니다. 전통적으로 ‘나는 하나님을 믿습니다’ (I believe in God) 으로 번역했습니다.
시작이 ‘나는 믿습니다’ 이기에, 그 안에 담긴 내용은 보지 않아도 ‘내가 무엇을 믿는지’가 담겨 있을 겁니다. 기독교 공동체가 처음부터 사도신경을 필요로 했던 것은 아닙니다. 아까 말씀드린 것처럼 초기 신앙고백문은 아주 단순 했습니다.
하지만 초대교회에서 당연하게 여겨지던 것들이 시간이 지나면서, 그 안에 많은 변화들이 생겨나기 시작하고, 이로 인해 명확하고 선명했던 것들이 흐릿해져 가기도 하고, 달리 보이기도 했습니다. 마치 페인트 칠한 곳이, 시간이 지나면서 색이 바래는 것 처럼 말입니다. 분명히 흰색이었는데, 때가 타고 하면서 회색이 되면 원래 무슨 색이었는지 잊어버리게 되는 것처럼 말입니다.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창조주 되심에 아무런 의심이 없었고, 예수님과 성령님에 대해서도 확실했습니다. 왜냐하면 증인과 증거들이 넘쳐났으니까요. 그런데 그 증인들이 하나씩 죽고, 증거도 서서히 소멸되면서, 다른 이야기가 생겨 나기 시작했던 겁니다.
지난 주까지 새벽기도회 때 생명의 말씀 묵상집을 따라 요한복음을 살펴보았습니다.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후, 막달라 마리아를 비롯한 제자들에게 나타나셨습니다. 제자들이 문을 걸어 잠그고, 혹시 자기도 예수님처럼 잡혀서 십자가에 달려 주게 되는 것은 아닌가 생각하며 무서워 했는데, 그런 제자들을 부활하신 주님께서 만나 주셨습니다.
쌍둥이 라는 별명을 가진 도마에게는 8일이 지나서야 만나주기도 하셨고, 이들이 디베랴 호수에서 물고기 잡고 있을 때에도 찾아가셔서 그들을 먹이시고 위로하셨습니다. 이들은 부활의 확실한 증인들 입니다. 그 때가 A.D 30년 경이라고 치면, 2세기에 들어서면 거의 남아있는 사람이 없었을 겁니다. 당시 평균 수명이 30-40세 였으니, 심지어는 그들의 손자도 남아있지 않을 수 있습니다.
그렇게 증인들이 없어지면, 확실했던 것이 흐릿해 집니다. 다른 이야기까지 섞여 원형이 훼손될 수도 있습니다. 이것은 초대 교회에 아주 큰 숙제였습니다. 그래서 초대교회 예배 의식, 특별히 세례식 때 이것을 확인할 필요가 있게 된 것입니다.
바로 보고, 바로 믿고 있는지, 혹 다른 신앙을 가지고 있지는 않은지, 점검해서 알려줄 이유가
생긴 것입니다. ‘알리스토 맥그래스의 사도신경’ 이라는 책을 보면 이런 설명이 있습니다. ‘시간이 지나면서, 그리스도인들이 믿는 신앙의 내용을, 더 구체적으로 설명할 필요가 생겨났다. 곧 “예수님은 주님이다” 라는 선포에 담긴, 온전한 함의가 제시되어야 했던 것이다.
과연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에 관해 무엇을 믿는가? 예수님에 관해서는? 그리고 성령님에 관해서는 어떠한가? 4세기가 되었을 때, 지금과 같은 형태의 사도신경이, 어느 정도 자리 잡게 되었다. 이 신조의 여러 판본 사이의 차이는, 사소한 것이었으며, 7세기에는 마침내, 이런 차이들까지도 제거되었다. 비록 사도들이 실제로 그 내용을 작성한 것은 아니지만, 이 사도신경은 복음에 관한 사도들의 가르침을, 탁월하게 요약한 것이다’.
김기석 목사님 쓴 ‘오래된 새 길’ 이라는 책에, 사도신경이 필요했던 이유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일종의 입문의례인 세례식 때, 참가자들은 과거와 결별하고, 새로운 세계를 향해 길 떠나기로 결단한 표로, 자기들의 믿음을 공적으로 고백해야 했고(“나는 ~을 믿습니다. 아멘.”), 그 고백의 내용을, 교회는 “나는 전능하사 천지를 만드신 하나님 아버지를 믿습니다”에서 “나는 영생을 믿습니다”에 이르기까지, 12항목(여기서도 역시 12라는 숫자에 대한 집착을 볼 수 있다)으로 정리했던 것이다’.
그런데 이 사도신경을 회중 앞에서 고백한다고 하는 것이,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저희가 한 2개월 넘게 새번역 사도신경으로 예배 때 함께 고백하는데, 이제는 어느 정도 눈 감고도 하실 수 있는 분이 계실 겁니다. 중간 중간 달라진 것 때문에 틀리는 경우가 있지만, 금방 다시 따라 오시기도 할 겁니다.
이걸 고백하는게 왜 어려워? 이걸 못 외운다고? 라고 생각하실 수도 있지만, 단순히 암송하는
것이 문제는 아니었습니다. 2년 전 사도신경이 없던 주일예배 순서에, 사도신경이 들어갔다고 해서, 여러분의 삶에 어떤 변화가 있으셨나요?
직장을 잃었다거나, 감옥에 갔다거나,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가 끊어지는 경험 말입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는, 주일예배에 그냥 순서 하나 더 들어간 정도일 수도 있지만, 초대 교회 성도들에게는 그렇게 단순한 문제가 아니었습니다.
로마 황제가 세상의 주인이라고 생각하던 시대 흐름 속에서, 예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입니다 라는 고백은, 예수님께서 십자가형을 받으신 것과 동일한 죄가 됩니다. 그러니 예배 때 하는 신앙고백은, 결국 자기 생명을 걸어야 하는 일이었던 겁니다. 대단히 위험한 일이죠. 이러한 고백으로 목숨을 잃은 순교자들은 부지기 수 였습니다.
알리스터 맥그래스가 신앙고백 하는 것에 대해 이런 말을 합니다. ‘어떤 이가 자신의 신앙을 시인할 경우, 그는 감옥에 갇히고 고난과 괴롭힘을 당하거나,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기 때문입니다. (잠시 언급하자면, 영어의 ‘martyr’[순교자]라는 단어는‘증언’을 뜻하는 헬라어 [마르튀리온]에서 유래했다. 어떤 이의 순교는,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한 최상의 증언으로 여겨진 것이다.)’
그러니까 신앙고백은 단순히 어떤 내용을 암송할 줄 아는 것을 넘어, 목숨을 걸고 지키려 했던 믿음인 것입니다. 이러한 신앙 고백의 내용이, 조금씩 그 모양을 갖춰 가기 시작합니다. 지금이야 하나님의 말씀을 저희가 쉽게 접하고, 소유할 수 있습니다. 굳이 두꺼운 책이 아니어도, 셀폰을 통해서도 다양한 번역본을 접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인쇄술이 발달하기 전에는 꿈도 못 꿀 일이었습니다.
한 교회가 성경 한 권을 가진다는 것은, 그 가격 때문에 쉬운 일이 아니었고, 사본으로 묶어낸다고 하더라도, 그 무게가 수십 킬로그램에 달해, 활용도가 몹시 제한적이었다고 합니다. 한 책을 보니, 성경 한 권의 무게가 34kg 이었다는 설명도 있습니다. 성경 한 권이 거의 40파운드 쌀 2포대 정도 된다는 말입니다. 차가 있는 요즘에도 성경책이 이렇게 무겁고 비싸다면, 가지고 다니라고 말하기가 어려울 정도입니다. 그러니, 옛날에는 교회에 두고 보는 것도 쉽지 않았을 겁니다. 이러다 보니, 그 내용을 축약하고, 논쟁거리들을 정리해서 고백하는 것을 선택한 것입니다.
전통적으로 ‘사도신경’이 가지는 목적이 이러한데, 오늘날 우리는 사도신경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을까요? 단순히 예배 시간에 한 꼭지처럼, 혹은 무슨 주문처럼 외우고 있지는 않나요? 영국 작가 아이리스 머독이 쓴 ‘종(Bell)’이라는 소설 chapter one에 이런 이야기가 적혀 있습니다.
‘
도라는 어느 날 그리스도교를 떠났습니다. 불현듯 ‘자기가 주기도문을 빨리 외울 수는 있으나, 천천히 외울 수 없다는 것을 발견’했기 때문입니다’ 제직 세미나 때 말씀드렸지만, 예배를 인도하면서 ‘사도신경 하시겠습니다’ 라고 말하지 않고, ‘사도신경으로 우리의 신앙을 고백합니다’ 라고 말씀 드리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단순히 줄줄줄 암송해서, 누가 틀리지 않고 빨리 외우나 시합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신앙 고백을 문장 하나 하나에 담는 시간이기 때문입니다.
여러 사람이 같이 빨리 외울 수는 있는데, 한 문장씩 그 내용을 곱씹지 못한다면, 그것을 어떻게 우리의 올바른 신앙고백이다 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사도신경의 첫 문장은 바로 ‘나는 믿습니다’ 입니다.
오늘 저희가 함께 읽은 히브리서 10장의 말씀은, 초대 교회 성도들의 흔들리는 믿음을, 다시 한번 붙잡아 멜 수 있도록 도와주십니다. 예수님께서 곧 오신다는 이야기를 직접 들은 성도들이 하나 둘씩 주님의 부르심을 받고, 그 증언을 들었던 사람들마저 사라져 가는 것을 보면서, 초대교회 성도들 안에 믿음이 흔들리기 시작합니다.
당연한 상황이죠. 예수님이 주후 30년 경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시고, 부활하셔서 승천하셨는데, 곧 오실 줄 알았는데, 30년이 더 지난 그 때까지도 예수님은 오지 않으시고, 박해는 점점 더 심해져 갔습니다. 특별히 히브리서가 쓰여졌던 시대는 로마의 5번째 황제인 ‘네로’가 다스리던 시대였습니다. 네로 황제 당시에, 사도 바울도,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도, 순교하였다고 합니다. 그만큼 기독교인들에게 힘든 시기였습니다. 예수님과 함께 했던 사람들이 하나 둘씩 사라져 가면서, 이제는 점점 눈에 보이지 않는
믿음이 필요한 시기가 오게 되었던 것입니다. 눈으로 직접 본 증인들이 점차로 없어지게 되었으니까요. 예수님의 말씀대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어려움이 닥치게 되면서, 자신들이 믿고 있는 예수님에 대한 믿음이 사그라져 갈 때, 히브리서 기자는 기독교인들에게 편지를 씁니다. 특별히 핍박으로 인해서, 다시 구약의 율법으로, 다시 유대교로 돌아가려는 기독교인들에게, 오히려 그리스도로 율법을 재해석 줌으로써, 그들의 믿음을 굳건히 지킬 것을 당부하고 있습니다. 세상을 살아가다 보면,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게 됩니다.
저 사람은 참 악한데 어떻게 저렇게 잘 살지?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면 벼락을 맞아야할텐데… 저 사람은 참 의로운 사람인데, 정말 예수 잘 믿는 사람인데, 어떻게 저렇게 힘들게 살아가지? 하나님은 왜 안 도와주시지? 이러한 질문은 인류의 기원과 함께 계속되어온 질문이라고 단언합니다. 마치 ‘요즘 젊은 것들은 버릇이 없어’라는 말이, 고대 이집트 벽화에 쓰여 있었다고 하는 것처럼, 세월이 변해도 우리에게 변하지 않는 질문으로 이어집니다.
오늘 본문 바로 앞 절인 37절 말씀은, 하박국 선지자가 하나님으로부터 들었던 대답의 인용이기도 합니다. “잠시 잠깐 후면 오실 이가 오시리니, 지체하지 아니하시리라” (히 10:37) “이 묵시는 정한 때가 있나니, 그 종말이 속히 이르겠고, 결코 거짓되지 아니하리라. 비록 더딜지라도 기다리라. 지체되지 않고 반드시 응하리라” (합 2:3)
히브리서 기자가 주후 60년 경에 살았던 사람인데, 하박국 선지자는 주전 600년 경에 살았던 사람입니다. 주전 600년, 주후 60년 그리고 2025년 동일하게 계속되는 질문이, 공의의 하나님이 살아계신다면서, 왜 의인이 힘들게 살아가고 악인은 왜 그렇지 않을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산다고 합니다. 믿음! 참 답답하죠? 보이지도 않고, 잡히지도 않는 것 그게 믿음이잖습니까! 그런데 답답해하며 하나님께 질문했던 하박국 선지자도, 마지막에 가서는 이렇게 믿음으로 고백합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밭에 먹을 것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 (합 3:17~18)
믿음은 허망한 것을 좇는 삶이 아니라, 보다 더 확실한 것을 붙잡는 것입니다. 수 많은 믿음의 선배들의 삶을 보면, 그것이 얼마나 확실한지를 증명해 줍니다. 혹시 이런 이야기를 들어보신 적이 있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대학원 다닐 때, church history text book에 적혀 있는 내용입니다.
로마 황제 네로 시대에, 가장 용감하고 신체가 튼튼한 전사 40명이 있었다고 합니다. 이들은 황제의 투사(Emperor’s Wrestlers)라고 불렀습니다. 로마의 원형 극장에서 경기하는 것을 보고, 가장 건강하고 가장 용감한 투사들을 뽑아서 구성한 팀이었습니다. 그들이 원형 극장에서 결투할 때에는 황제를 향해 손을 들고 외치기를, “우리 투사들은 황제를 위해 싸우겠습니다.” 라고 선서했답니다. 로마 역사상 가장 탁월한 투사들이었다고 합니다.
로마의 가장 위대한 이 정예부대를 필요로 한다는 소식을 황제가 들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을
아주 멀리 떨어져 있는 갈리아(Gaul)라고 하는 곳으로 파견을 보냅니다. 그런데 얼마 후, 그 군인들이 예수그리스도를 주님으로 영접했다는 소문이 나돌기 시작합니다. 마침내 황제의 귀에 그 이야기가 들어가서, 친위대 백부장인 Vespasian (베스파샨)에게 그들을 색출하는 명령이 내려집니다. 갈리아로 간 베스파샨은, 황실의 모든 군대를 동원시켜 놓고 “너희들 중에서 예수를 믿는 사람이 있으면 앞으로 나와라.” 하고 말하자, 놀랍게도 그 황제의 투사 40명이 다 나왔습니다.
전혀 예상 밖이어서 백부장이 깜짝 놀랐습니다. 그래서 그는 40명의 투사들을 설득하고 회유하며, 신앙을 포기하도록 협박까지 하였습니다. 해가 질 때까지 기다릴 터이니, 다시 생각해 보라고 타일렀으나, 그들은 초지일관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백부장은, 그들을 추운 겨울날 호숫가로 데리고 가서, 옷을 다 벗기고 얼음 판 위에 구멍을 판 후, 그 속에 들어가 서도록 했습니다.
물 속에서 몸이 얼어 옵니다. 그래도 그들은 노래를 불렀습니다. “오 그리스도시여, 우리 40명의 용사들은 당신을 위해 싸웁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받기 위하여, 용감히 싸웁니다.” 베스파샨이 옆에 모닥불을 피워놓고, 밤 세도록 그들을 지켜보며, “지금이라도 예수를 포기하고 나오면, 이 따뜻한 곳에서 대접을 받을 수 있다.” 라고 외쳤습니다. 투사들이 노래를 부르는데, 시간이 흐르며 소리가 점점 작아져 갑니다. 그 순간에 한 명의 투사가 뛰어나옵니다. 그리고 모닥불 곁으로 갑니다. 그후 아주 가느다란 목소리로 노래 소리가 들립니다.
“오 그리스도시여, 우리 39명의 용사들은, 당신을 위해 싸웁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받기 위해, 용감히 싸웁니다.” 그런데 로마 군대의 베스파샨이, 그 배반자가 불가로 기어오는 것을 보고 있을 때, 하늘로부터 환한 빛이 호숫가로 비쳐오는데, 면류관을 가진 천사가 면류관 하나를 챙겨 하늘로 올라가려는 것을 보게 됩니다.
그 순간에 백부장 베스파샨은, 로마 장교의 헬멧과 군복을 벗어 던지고, 얼음 속으로 달려가
찬양합니다. “오 그리스도시여, 우리 40명의 용사들은 당신을 위해 싸웁니다. 주님이 주시는 승리의 면류관을 받기 위하여…” 라고 노래하면서, 세상을 떠났다고 합니다. 믿음이 뭐라고 생각하세요? 눈에 보이는 것을 쫓아가는 것이, 믿음이 아닙니다. 세상 사는 것이 호락호락하지 않듯이, 그리스도인으로 살아간다는 것 역,시 그렇게 만만한 것이 아닙니다. 지금까지 쉽게 생각하셨다면, 마음을 다시 한번 다잡아야 합니다. ‘나는 믿습니다’ 라는 고백은, 우리 삶에 분명한 영향이 있습니다. 신앙고백은, 내 삶을 다시금 돌아보고, 내가 서 있는 자리를 확인하고, 나를 구원해 주신
주님께 다시금 감사하는 시간입니다. 앞으로 주일에 듣게 되는 사도신경 시리즈를 통해, 우리의 신앙이 더욱 깊어지고, 든든히 서 가게 되기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간절히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