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밖에 없습니다(사무엘상 2:1-8)
애드먼튼 명성교회 안치환 목사
오늘 읽은 본문의 말씀은 “한나의 기도”라고 하기도 하고, “한나의 찬송”이라고 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한나의 기도는 1장에서 이미 하나님께 드렸고 엘리 제사장의 선언으로 그 기도가 응답이 된 것입니다. 그 기도의 응답을 안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면서 찬양을 드리고 있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타난 이스라엘의 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인도하심이 있고 난 다음에 이와 같이 찬양을 드리는 일이 종종 있습니다. 출애굽 할 때에도 사방으로 우겨쌈을 당했습니다. 앞에는 넘실대는 홍해가 가로막히고, 좌우에는 낭떠러지로 도망갈 곳이 없고, 뒤에는 애굽 군대가 말을 타고 추격을 해 오고 있는 상황입니다.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모세에게 떨어졌습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잡고 홍해를 향해 팔을 뻗으면서 하나님께 간절히 기도했더니 동풍이 불어서 홍해 바다가 갈라져서 육지처럼 그 바다를 건넜습니다. 뒤 따라 오던 애굽군대는 그 바다 속으로 수장이 되고 말았습니다. 모든 백성들이 홍해를 건너고 난 후에 다시 합쳐진 바다를 바라보면서 모세가 하나님께 찬송을 올려드립니다. 그리고 모세의 누이인 미리암이 소고, 작은 북을 치면서 찬송을 드리니까 모든 여인들이 미리암을 따라 소고를 치면서 춤추고 찬양을 하나님께 드렸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감사를 하기 위해서 찬양을 드린 것입니다. 가장 위급한 상황에서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신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기 위해서 찬양을 올린 것입니다. 그러니까 이 찬양은 결코 가벼운 찬양이 아닙니다.
먼저 모세의 찬양을 살펴보면, [여호와는 나의 힘이요 노래시며 나의 구원이시로다 그는 나의 하나님이시니 내가 그를 찬송할 것이요]라고 노래했고, 미리암은 [너희는 여호와를 찬송하라 그는 높고 영화로우심이요]라고 찬양을 드렸습니다. 이것처럼 기도의 응답을 받고서 하나님께 드린 찬양 속에는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이 들어 있더라는 것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오늘 한나도 기도의 응답을 받고서 지금 하나님께 드리는 찬양을 보면, 한나의 신앙의 고백이 들어 있는 찬양을 하나님께 드리고 있습니다. 1절에는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내 마음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내 뿔이 여호와로 말미암아 높아졌으며, 내 입이 내 원수들을 향하여 크게 열렸으니 이는 내가 주의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니이다] 여기 뿔은 동물에게 있어서 뿔은 영광의 상징입니다. 기도의 여인인 한나가 기도함으로 하나님의 응답을 받아서 마음도 하나님으로 인해서 즐거워하고, 그가 받을 영광이 브닌나 때문에 짓밟혀져서 땅에 떨어졌는데 하나님 때문에 다시 높아졌고, 무엇보다 기쁨을 잃어버리고 있었는데 하나님이 기도를 응답해 주셔서 다시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런 표현이 히브리 문학에서 자주 다루고 있는 3중 대구법 표현 방법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좋은 일이 있으면 [이래서 좋다] 한번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고, 세 번 연속으로 [이래서 좋고, 저래서 좋고, 그래서 좋다] 세 번을 반복함으로 완전한 즐거움, 최고의 기쁨이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요즘 유튜브에 지역 사투리에 대한 내용이 나오는데 보니까 충청도 사투리에 대해서 나오는 것을 봤습니다. 충청도 분이 있으면 이해를 하십시오. 충청도 청주에 가면 어떤 것을 물어 볼 때는 세 번은 물어봐야 한다는 것입니다. [이거 좀 먹을래?] – [됐어. 안 먹어도 돼] 그러면 [그래? 그럼 내가 먹지 뭐] 그러면 안된다는 겁니다. 세 번은 물어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약속을 해도 똑 같답니다. [저녁 5시에 좀 만날까?] – [그때 봐서] 아니면 [오늘은 많이 바쁜데] 그러면 [오늘은 시간이 없구나. 다음에 약속을 잡아야지 뭐] 그러면 안된다는 것입니다. 세 번은 물어봐야 된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히브리 문학의 표현이 그런 것과 흡사합니다. 하나님을 향해 찬양을 드릴 때에도 세 번이나 반복함으로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 완전해 진다는 것입니다. 3중 대구법의 표현 방식이라고 합니다. 우리는 한나라는 여인을 기도하는 사람이라고 알고 있지만 그 기도가 그냥 간절하다고 흘러나오는 것이 아닙니다. 문제가 많기 때문에 기도를 간절하게 한다는 것은 아닙니다. 적어도 기도를 하려면 그만한 믿음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구약성경에서 믿음이 있다는 것을 나타내는 기준이 무엇인가 하면 하나님을 향해 내 속에 있는 믿음을 어떻게 고백하느냐에 있습니다. 이것을 신앙고백이라고 하는데 하나님께 드리는 신앙의 고백이 결코 쉽지 않습니다. 사람들도 청춘남녀가 만날 때 사랑을 고백하지 않습니까? 그 사랑을 고백하는 것도 절대 가벼운 일이 아닙니다. 그러나 사랑을 잘 고백하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을 얻을 수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사랑을 잘 고백함으로 평생을 함께 하는 결혼을 하게 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또 어떤 사람은 결혼 프러포즈를 잘 함으로 평생 동안 그것을 기억하며 살아가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런데 하물며 하나님을 향한 신앙의 고백도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성경에 3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가운데 보면 믿음의 기라성 같은 인물들이 있습니다. 이 사람을 빼면 믿음에 대해서 이야기 할 수 없는 그런 인물들이 있습니다. 손에 꼽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 모세, 여호수아, 사무엘, 다윗, 솔로몬, 이사야, 예레미야, 엘리야, 엘리사 등등. 이런 많은 사람들 중에 성경의 중심인물을 꼽으라면 저는 다윗을 꼽을 수 있습니다. 다윗을 다른 여러 사람들과 비교해 보면 다윗이 중심인물이라고 말하기는 힘들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다윗은 허물이 있는 사람입니다. 부하 장수의 여인을 취했던 죄악도 있습니다. 그럼에도 다윗은 성경 가운데 가장 많은 분량을 다윗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앞에 언급했던 그 많은 기라성 같은 인물들에 비하면 가장 많은 분량으로 다윗에 대해서 기록을 하고 있습니다. 사무엘상하서, 열왕기상하서, 역대상하서, 그리고 시편, 이렇게 많은 책의 중심에 다윗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인가 하면 다윗만큼 다양한 신앙의 고백을 한 사람이 없다는 것입니다. 성경 곳곳에 다윗의 그 신앙고백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그 삶의 중심에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사모하고 있지 않으면, 하나님의 은혜를 매일 누리고 있지 않으면 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제대로 된 신앙고백은 한번 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그런데 다윗만큼 다양한 신앙의 고백을 한 사람이 없습니다. 특별히 시편 18편을 보면 다윗의 신앙고백이 줄줄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시편 18편이 기록된 배경을 보면 이렇습니다. [하나님께서 다윗을 그 모든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신 날에 이 노래로 여호와께 부른 노래]라고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온전한 신앙고백은 평탄할 때보다는 어떤 삶의 위기 가운데서 하나님이 건져주신 것을 기억할 때 이러한 신앙고백이 나오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평탄할 때보다는 어떤 어려움이 있었는데 그 어려움을 하나님께서 해결해 주셨을 때에 하나님을 향한 신앙고백을 할 수 있고, 그 신앙고백이 있을 때에 진짜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는 삶을 살아갈 수 있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시편 18편의 내용은 이렇습니다. [나의 힘이신 여호와여 내가 주를 사랑하나이다. 여호와는 나의 반석이시요 나의 요새시요 나를 건지시는 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요 내가 그 안에 피할 나의 바위시요 나의 방패시요 나의 구원의 뿔이시요 나의 산성이시로다] 단 두 절만 읽었는데도 구구절절이 신앙의 고백으로만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냥 흘러가는 말로 하나님이 듣기 좋으시게 한번 고백해본 것입니까? 아닙니다. 이것은 다윗이 그 삶 속에서 깊이 체험하고 느끼고 하나님이 다윗의 기도를 응답해주셔서 지금 원수들의 손에서 건져주셨기 때문에 다윗은 중심을 가지고 하나님께 이런 고백을 올려드리는 것입니다. 다윗에게는 비단 신앙고백 하나만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구하는 간절한 기도만 보아도 그렇습니다. 시편 51편에는 다윗이 밧세바와 동침을 하고 나단 선지자가 그를 찾아와서 그의 죄악을 지적했을 때에 다윗이 기도하는 것을 보십시오. [하나님이여 내 속에 정한 마음을 창조하시고 내 안에 정직한 영을 새롭게 하소서. 나를 주의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고 주의 성령을 거두지 마소서] 이런 기도는 믿음 없이는 할 수 없는 기도입니다. 하나님을 향해 기도를 하든지, 찬양을 하든지, 신앙고백을 하든지 그 중심에 하나님을 향한 간절한 믿음이 없이는 할 수 없는 것들입니다. 오늘 한나에게는 어떤 믿음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바라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런 믿음이 있었기 때문에 한나가 이런 신앙고백을 하고, 이런 찬양을 드리고, 이런 기도를 올리는구나 하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2절의 한나의 고백은 이렇습니다. [여호와와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이는 주 밖에 다른 이가 없고 우리 하나님 같은 반석도 없으심이니이다] 먼저 [하나님 같이 거룩하신 이가 없으시니] 거룩이라는 말은 구별되었다는 말입니다. 세상에는 많은 신들이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그 많은 잡신들과 구별되었다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를 했던 부산이라는 곳이 얼마나 믿음이 뒤떨어진 동네인지 모릅니다. 바닷가가 되어서 그런지 모르지만 미신이 많고 온갖 우상들이 우글거리는 곳입니다. 그런 동네에 1997년에 담임목사로 부임을 해서 온 교인들을 한 바퀴 돌면서 심방을 다니는데, 다녀보니 믿음이 형편없다는 것이 눈에 들어올 정도였습니다. 그래서 믿음생활을 잘 해 나갈 것을 권면했더니 연세 드신 할머니들의 반응이 이러했습니다. [아이구, 절에 가든지, 천주교를 가든지, 교회를 다니든지 아무거나 하나만 잘 믿으면 돼요. 목사 양반이 와서 잘 믿으라고 하니까 열심히 믿어볼께요] 정말 아무거나 하나만 잘 믿으면 됩니까? 오늘 성경에 나오는 한나와는 너무 수준 차이가 나는 것입니다. 한나는 기도하는 여인이기 때문에 그 중심에 고백하는 것이 벌써 다르잖아요. [우리 하나님 같은 거룩하신 이가 없습니다. 세상에는 여러 신들이 있지만 그 중에서도 하나님은 구별된 분입니다] 그런 고백입니다. 그러니까 그 다음 고백이 [주 밖에 다른 이가 없습니다] 한나처럼 하나님 한분밖에 없습니다 하는 사람은 오직 하나님만 붙들게 될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 외에도 붙들 신들이 많다고 생각하면 여기도 붙들고 저기도 붙들고 효험이 있다고 하면 거기도 붙들고 다 붙들려고 할 것입니다. 그러나 한나는 처음부터 하나님께만 기도하고, 하나님 앞에만 나가서 통곡하면서 기도하는 일을 택했습니다. 이것을 하나님께서 아시거든요. 그래서 오늘 우리에게도 한나처럼 [주밖에 없습니다] 이런 고백이 필요한 것입니다.
그 다음에는 6절 이하의 말씀입니다. 이 고백은 한나만이 가지고 있는 독특한 고백입니다. 이런 신앙을 가졌으면 절대 하나님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는 것입니다. 6,7,8절을 함께 읽겠습니다. [여호와는 죽이기도 하시고 살리기도 하시며 스올에 내리게도 하시고 거기에서 올리기도 하시는도다. 여호와는 가난하게도 하시고 부하게도 하시며 낮추기도 하시고 높이기도 하시는도다. 가난한 자를 진토에서 일으키시며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땅의 기둥들은 여호와의 것이라 여호와께서 세계를 그것들 위에 세우셨도다] 아멘. 이것은 한나가 가지고 있는 하나님을 향한 믿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이런 분이십니다 라는 믿음입니다. 우리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지만 살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음부에 내리기도 하지만 끌어올리기도 하시는 하나님, 가난하게도 하지만 부하게도 하시는 하나님, 그런 하나님이시니까 한 마디로 못하시는 것이 없는 하나님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녀가 없어서 몸부림을 치는데 그 문제를 하나님께로 가지고 나와서 기도를 하는 것 아니겠습니까? 한나에게는 그보다 더한 일이 있다고 할지라도 그 문제를 가지고 나와서 하나님 앞에 내어놓고 기도를 했을 것입니다.
제가 아주 예전에 들었던 간증이 하나 있습니다. 저도 산간벽지 시골에서 자랐지만, 저처럼 아주 시골에서 태어나서 아버지 농사짓는 것을 돕던 아주 가난한 농부의 아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농사를 지으면서 한평생을 살아야 하는 운명으로 태어났는데, 그 시골에서 믿음이 있어서 이 성경을 읽다가 사무엘상 2:8절을 발견을 했습니다. [빈궁한 자를 거름더미에서 올리사 귀족들과 함께 앉게 하시며 영광의 자리를 차지하게 하시는도다] 이 말씀이 눈에 쏙 들어오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말씀을 책상 앞에다 써서 붙여놓고 매일 같이 읽으면서 노력한 결과 그 말씀처럼 귀족들과 함께 앉게 되는 일을 이루었다고 간증을 들은 일이 있었습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신분까지도 바꾸시는 하나님이십니다. 이런 하나님을 믿고 있다면 절대적으로 의지하고 살지 않겠습니까?
제가 고등학교를 다닐 때에는 씨름을 좀 했습니다. 씨름에는 다양한 기술이 있는데, 그 많은 기술 중에 특이한 것이 뒤집기라는 기술이 있습니다. 밑에 눌려서 질 것 같은데 조금씩 파고 들어가서 순간적으로 확 뒤집어서 전세를 역전시키는 기술입니다. 한나의 믿음과 축복을 보면 마치 씨름의 뒤집기 기술 같은 묘미를 볼 수 있습니다. 아들이 없어서 당했던 설움과 고통을 한 순간에 뒤집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자리로 바꾸었습니다. 그래서 사사시대와 왕조시대를 연결하는 사무엘을 소개하는 것으로 바로 넘어가도 되는데, 그 앞에 한나를 소개함으로서 답답하고 힘들 때에 하나님 앞에 나아가서 간절히 기도함이 얼마나 소중한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또한 기도와 더불어서 믿음을 고백하는 일이 이토록 소중하다는 것을 또한 보여주고 있습니다. 믿음의 사람 한나를 생각하면서 오늘 우리들도 살면서 힘들고 답답한 일을 겪을 때에 세상의 그 어떤 방법을 붙들려고 하지 말고 하나님을 붙들고 [나에게는 오직 하나님 밖에 없습니다] 이 믿음으로 하나님께 구하고, 우리 하나님은 전능하신 하나님이십니다. 이 고백으로 하나님 앞에만 서는 복된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