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문연재- 행복을 당신 손 위에_생명의 소중함
결혼 후, 홀로 외로워서 였는지 아니면 임신했다는 친구의 소식에 질투심이 생겼던 것인지, 결혼 전에는 원치도 않았던 아기 갖기를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매일 기도를 드렸는데, 그 열망이 어찌나 강했는지 매일 아침 눈을 뜨자마자 기초체온을 재고 언제 임신할 수 있는 몸 상태인지 자가 체크도 한 것이다.
참 신기한 일은 새벽기도 때 아기를 갖게 해 달라고 기도하면 나도 모르게 “아들”이란 말이 튀어나왔다. 그 당시 남편을 너무 사랑해서 그랬는지, 늘 남편 닮은 아들을 낳게 해달라는 기도가 나왔다. 예수님 다음으로 좋았던 남편이었기에 나는 정말 남편을 꼭 닮은 아들을 갖기 원했다. 기도에 응답해주신 주님의 은혜로 드디어 아기가 찾아왔다. 결혼한 지 6개월쯤 되었을 무렵인데, 나는 어찌나 기뻤던지 세상을 다 얻은 것과 같은 느낌이었다.
그런데 그리 좋아했던 것도 잠시, 임신 2개월 차 접어들며 시작된 입덧은 물 한 모금도 편히 마시지 못할 만큼 심했다. 남편이 음식을 먹는 것만, 봐도 구토가 나올 지경에 이르러 몸져눕게 되었고 남편 사역에도 지장이 되니 친정으로 피접 가는 신세가 돼 버렸다.
그러나 그토록 심했던 입덧은 다행히 5개월 차로 들어가며 나아지기 시작했다. 사역을 위해 남편 곁으로 다시 돌아오게 되니 얼마나 감사했는지 모른다. 아기가 내 몸 안에서 움직이고 함께 한다는 사실이 마냥 힘들지만은 않았다. 아니 무척 행복했다. 평소에는 잘 먹지 않았던 고기와 해산물도 당겼는데, 이것저것 잘 먹을 수 없는 환경에서도 주님의 은혜로 행복한 나날을 보내게 된 것이다.
아들을 임신하고 몇 개월 후, 기형아 검사 혈액 수치가 너무 높게 나와 재검사를 받아야 했다. 재검사 결과가 나올 때까지 기다림의 시간은 그야말로 고통이었다. 너무나 불안하고 걱정이 되어 가족들과 친척들에게 기도 부탁을 드렸던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우리의 첫 아들을 하나님께 드려야겠다는 생각을 했다. 굳이 목회자가 아니더라도 주님의 일을 하는 첫 열매로 드리고 싶었다. 서원까지는 아니지만 마음속 깊이 이 아들을 책임져 달라는 기도를 하며 주님께로 아들을 데리고 간 것이다. 하나님께서 내 마음을 아시고 은혜를 베푸셔서 다행히도 아들은 정상으로 태어났다. 신경계에 문제가 있을 수 있다고 했었는데 감사하게도 건강하게 태어난 것이다. 기적이나 다름없었다. 하나님께서 이 아들을 통해 원하시는 게 분명히 있으시리라는 생각이 들었다.
드디어 1998년 3월 3일 첫아들을 얻었다. 아침에 일어나 보니 밤새 양수가 흘러 병원으로 가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친정 집 근처에 있는 산부인과 전문병원에 도착해 보니 오늘 당장 아기를 낳아야 한다며 입원을 권했다. 입원은 했지만, 진통이 없어서 분만 유도제를 투여 받고 진통이 오기를 기다렸다. 오전 9시경에 입원한 나는 그날 오후 6시가 지나 아기를 낳게 된다. 정말 하늘이 노랗고 온몸이 깨어져 나갈 것 같은 말할 수 없는 고통을 겪고 난 후에야 사랑하는 첫아들을 얻을 수 있었다. 울음소리를 듣고서 남편도 감격의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더욱 감격스러운 일은 아들이 아빠를 똑 닮았다는 것이다. 크면 클수록 아빠를 더 닮아갔던 아들은 보는 사람마다 감탄사가 터지게 했다.
아들은 한 살 때부터 뜨거운 필리핀에서 살게 되었다. 우리 내외가 선교사로 가게 된 그곳은 너무나도 덥고 습도가 높아 아들의 머리를 늘 밀어주었다. 땀띠가 심해서 집에서는 옷을 다 벗겼고 알몸으로 더위와 싸워야만 했다. 하루는 땀띠가 너무 심해 병원에 갔는데 현지 의사가 우리에게, 외국인이 왜 이곳에서 에어컨도 없이 사느냐며 나무라는 것이었다. 우리는 재정적으로도 넉넉하지 않았지만, 현지인과 다름없이 살아야 한다는 생각에 에어컨은 꿈도 꾸지 않았다. 에어컨은 말할 것도, 없이 선글라스를 쓰는 것조차 미안했기 때문이다.
아들은 땀띠 말고도 여러 가지 풍토병에 시달렸다. 모든 예방주사를 다 맞혔는데도 불구하고 장티푸스, 풍진, 이질에 걸려 여러 번 아팠다. 하루는 너무나도 힘들어했는데, 설사와 구토가 너무 심해 손을 쓸 수가 없었다. 아기는 몸이 축 처지고 탈수증상을 보이기 시작했다. 나는 사실, 아들이 아픈 거에는 유난한 예민함이 있었다.
그 이유를 굳이 생각해 보자면, 첫째 아이가 돌이 될 무렵 둘째를 임신했었다. 두 번째 임신이기도 하고 남편이 교회 일에 바빠 3개월이 될 때까지, 병원 검진 대신 소변검사로만 임신을 확인했던 차였다. 어느 주일 전날 왼쪽 팔이 떨어져 나가는 통증에 밤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는 그 원인이 산부인과 쪽임을 상상도 못 한 것이다. 그렇게 밤을 지새우고 주일예배를 참석했다 갑작스러운 하혈로 급히 수원에 있는 종합병원 응급실로 실려 갔다. 산부인과 진료를 받은 나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리를 듣게 된다. 아기가 뱃속에서 죽은 지 보름이 넘은 것 같다고, 부패하여 산모도 위험하다는 것이다. 급한 응급으로 나는 전신마취를 하고 수술로 죽은 아기를 제거하게 되었는데 4개월 차였던 아기가 꽤 커 있었다고 했다. 죽은 아기를 힘줘서 낳지 않는 것만으로도 감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