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지금 올라가고 있는 중입니다.(요14:1-6)
런던은혜교회 정삼열 목사
구약학의 권위있는 학자 버나드 앤더슨은 그의 저서 [구약성서의 이해]에서 구약성서의 구성을 설명하면서 창세기 부터가 아니라 출애굽기로부터 그 단원을 시작합니다. 구약의 전체 도면을 그리면서 창조의 모티브가 아니라 탈출의 모티브를 가장 앞에 둔 것은 출애굽기가 가지고 있는 상징성 때문인데, 바로 출애굽의 모티브가 단순히 이스라엘 역사의 시작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인류를 향한 구원역사의 메타포를 담고있다고 주장하기 때문입니다.
애굽안에 살아가는 히브리 민족. 그들은 타국에서 자유를 잃어버리고, 속박되고, 학대받기 일쑤였으며, 울분을 삼키고 숨죽이며 사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들은 속박된 삶 안에서 자신의 목에 굴레가 씌어 있는 줄도 모르고 서로 경쟁하면서 그것이 더 나은 삶으로 나아가는 과정이라고 굳게 믿었습니다.
씐다는 것은 그런 것 입니다. 사람이 무엇에 씌이면 목숨을 걸고 몰두하는데도 자기가 왜 그것을 반복하는지를 모르지요. 사람이 무언가에 씌이면 객관성을 상실하기 쉽습니다. 씐다하면 가장 먼저 생각나는것이 남녀 사이에 ‘콩깍지가 씌었다’ 혹은 ‘귀신에 씌었다’와 같은 경우겠지요. 신약성서에서 보면 예수님은 귀신들린 사람(δαιμονίζομαι, 악한 영으로 인해 판단력을 상실한 사람)들을 자유케 하시는 장면이 여러 차례 나옵니다. 예수님의 이 축사 사역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메시아의 사역을 예언한 사61:1을 보면 조금더 명확해집니다.
사61:1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
예수님은 포로된 자를 자유케 하시며, 갇힌 자를 놓아주십니다. 단순히 악한 영을 내쫓는 것만을 의미 하는 것이 아니라 오늘 판단력을 상실한 눈뜬 장님들을 다시 보게하시고, 삶의 문제에 묶여있는 자들을 놓아주시고, 해방시켜 주시는 분이라는 것이지요.
하긴 사람에게 씌는 것이 귀신만 있던가요? 일확천금을 노려보겠다고 코인이니, 땅 투기니 온갖 사행성 돈놀이에 씌고, 소셜 미디어를 통해 사람들의 ‘좋아요’같은 인정받음에도 씌고, 온갖 허영과 자랑에도 씌고, 쇼핑 중독에도 씌입니다. 그뿐 아니라 어떻게든 한 자리 차지해보겠다는 마음에 사로 잡히게 되면 평소에는 하지 않던 이상한 짓들을 하면서 권모술수들을 벌이다가 자신 스스로 침몰하는 사람들도 있는것이지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마치 그것들이 자신을 위한 자유의 삶이라고 생각하겠지만 실상은 그 자체에 속박되어 살아가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전에 읽었던 법정 스님의 ‘무소유’라는 책에 나온 이야기가 생각납니다. 어떤 사람이 법정 스님께 귀한 난초를 선물해 줬는데 너무 기분이 좋더랍니다. 그런데 이 난초라는 것이 얼마나 예민한지 계속 닦아주고, 솎아주고, 관찰하지 않으면 금방 시들어진다고 하는 것이에요. 이 화분을 선물 받고 나니까 이후에는 걱정이 되어서 도무지 어디를 가지 못하는 지경이 되었답니다. 이때를 기억하며 법정 스님은 이렇게 말합니다. “나는 내가 난초 화분을 가졌는 줄 알았는데 사실은 난초가 내 주인이 되어 나를 소유한 것이더라.” 그래서 얼른 다른 사람에게 부탁해 그 화분을 넘겨주었다고 합니다.
한국 사람들처럼 유행에 목숨을 거는 사람들이 있나 싶습니다. 얼마 전 유명 햄버거 프랜차이즈인 “Five Guys”가 한국에 오픈했다고 합니다. 오픈 당일에 폭우가 심하게 내렸는데도 사람들은 이것을 먹겠다고 줄을 두 블럭을 넘게 섰다고 하지요. 심지어 매장에 들어간 첫 번째 손님은 그 전날 밤 11pm부터 다음날까지 12시간을 기다렸다고 합니다. 혹시 이곳 캐나다에서 Five Guys를 가보신 분들은 “저게 저렇게까지 할 일인가?”라고 신기할 정도입니다. 우리에게는 너무도 흔하디 흔한 Tim Hortons도 이와 비슷한 현상을 보였다고 하지요.
사회생활 하려면 명품 하나는 가져야 한다라는 말을 들어보셨습니까? 명품이라는 말이 유일하게 쓰이는 나라가 한국입니다. 영어로는 명품이 아니라 정확히 럭셔리(사치품)입니다. 그런데 왜 이 사회에서는 사치품이 아니라 남들에게 이정도는 되어야 보통사람임을 인증받는 필수품이 되었느냐는 말이지요.
기수문화, 서열문화, 야근이 일상인 삶 한걸음만 나오면, 한국에서 나와 6개월만 살아도 보이는 이상한 굴레인데 그 속에서는 잘못되었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어떻게든 그 안의 경쟁에서 더 올라가려고 하고, 한 자리라도 차지하려 하고 조금 더 나은 삶을 살겠다고 애씁니다. 어찌보면 오늘 우리의 모습도 애굽에서 종 노릇하며 그 속에서 속박되고, 조종받고, 휘둘리는 이스라엘 민족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아 보입니다.
그러나 기억해야 합니다. 하나님은 이러한 굴레에 묶여 신음하면서 살아가는 언약 백성들을 그냥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말입니다. 열가지 재앙을 일으키시더라도 반드시 떠나야 하는 이유를 만드셔서 애굽을 탈출하도록 만드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므로 출애굽기의 이야기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님의 백성으로 만들어가시는 이야기이자, 오늘 죄의 멍에의 씌인체 종으로 살아가는 우리들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어떻게 만들어져가는가에 대한 과정을 보여주는 이야기이기도 한 것입니다.
그런데 출애굽 사건을 읽다보면 몇가지 질문이 생깁니다. 그 정도의 기적과 능력을 베풀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라면 백성을 구하기 위해서 애굽을 떠날 필요 없이 애굽을 굴복시키고 정복하고 차지하게 할 수도 있었을텐데, 왜 그렇게 하지 않으시고 그들을 낮선 곳으로 내몰으셨냐는 것입니다.
이민의 삶을 시작하신 분들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예상치 않은 계기로 시작하신 분들이 많습니다. 그 모든 과정에서 기적이라고 밖에는 설명 할 수 없는 하나님의 섭리하심과 은혜를 경험하게 되지요. 그러나 시간이 지나서 돌아보면 이런 생각도 듭니다.
“아니 어차피 이렇게 복 주실꺼면 그때 주시지”, “만일 그때 그 집 안 팔았으면, 만일 그때 그 땅 안 팔았으면 여기까지 나와서 고생할 필요 없을텐데.”“그 사업, 그 가게 정리안하고 하나님이 복 주셨으면 지금은 더 잘살고 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그런데 정말 그랬을까요? 만일 그때 모든 것이 잘 풀렸다면, 건강에 이상을 느끼지 않았고, 일과 삶의 균형이 완벽했으며, 사업이 번창했고, 재산이 증식되었다면 그때처럼 간절하게 하나님을 찾을 수 있었을까요?
아니오. 그렇지 않았기에 우리는 목마름을 느꼈고, 무기력함을 느꼈고, 하늘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습니다. 처음 가보는 길 위에 섰기에 우리는 우리의 경험과 느낌이 아니라 매 순간 보호하시는 하나님을 의지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모든 과정은 징벌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는 내어 쫒겨 광야를 유리하는 사람들이 아니라 자유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는 법을 배우기 시작한 사람들인 것이었던 것이지요.
문제는 이 길을 언제까지 걸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가나안을 소망하는 이스라엘 백성은 바로 가나안에 도착하게 하면 되는데 왜 이렇게 오랫동안 방랑하게 하실까요? 사실 애굽에서 가나안까지는 640km-차로는 8시간, 도보로는 길어도 2-3개월이면 가는 거리인데 도대체 왜 40년 동안이나 돌아다니게 하셨을까요? 이민의 삶을 산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광야의 삶과 비슷한 것 같습니다. 광야는 황량하기에 방향과 시간을 가늠하기 힘든 곳입니다. 하루 하루가 느리게 지나가고, 어제와 비슷해 보이는 곳이지요. 내가 통제할 수 없고, 어디론가 향하고 있지만 이 방향이 맞는것인지, 이 길이 언제 끝날지 알지 못하는 겁니다.
40년 후 이스라엘 백성은 결국 그토록 기다리던 가나안에 도착했지만 그렇게 도착한 가나안은 부족함이 없는 이상향이 아니라 여전히 문제를 가진 불완전한 곳이었습니다. 사람들은 도리어 주변국들에 비해 약소국인 자신들의 모습에 불안해하기 시작했고, 더 자신들에게 이익이 되는 신을 찾아 우상숭배를 시작했고, 온갖 고리대금업과 사회적 블평등을 경험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면 우리의 가나안은 어디일까요? 영주권을 받고 시민권을 받는 것? 이곳 현지 회사에 들어가 높은 연봉을 받고 생활하는 것? 우리 자녀들이 좋은대학에 들어가고 좋은 회사에 취직하는 것? 우리 자녀들이 가능한 2세라도 한국사람을 만나 가정을 꾸리는 것? 그러면 우리는 정말 행복할까요? 그때 우리는 삶의 굴레를 벗어던지고 진정한 자유자가 될수 있을까요?
성경을 주의 깊게 읽어본다면 이스라엘 민족이 길에서 보낸 40년의 여정은 불순종에 대한 하나님의 징벌이나 혹은 이후에 주실 가나안땅의 축복을 극적으로 느끼게 해주기 위한 장치가 아니라 아주 의도적으로 계획하신 시간이었고 길 위에 선 그들의 여정 자체가 목적이었다는 것을 알게됩니다.
예레미야 24:7은 다음과 같이 말합니다. 7.내가 여호와인 줄 아는 마음을 그들에게 주어서 그들이 전심으로 내게 돌아오게 하리니 그들은 내 백성이 되겠고 나는 그들의 하나님이 되리라
하나님이 그들에게 주시고자 했던 진정한 복은 가나안 땅 그 자체를 차지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아는 마음을 주셔서 우리는 하나님의 백성이 되고 그분은 우리의 하나님이 되는 관계를 형성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러므로 40년의 시간은 축복을 얻기 전까지의 시험의 시간이 아니라 그 길 위의 모든 순간들이 하나님의 은총속에 그분의 백성이 되어져 가는 시간이었듯이, 오늘 우리가 걸어가고 있는 이 길고 긴 모든 시간들도 하나님의 은총을 경험하고 그분의 백성이 되어져 가는 시간이라는 말입니다.
오늘의 본문은 거룩한 하나님의 도성에 거처를 예비하러 가시겠다는 예수님의 말씀으로 시작됩니다.
4.내가 어디로 가는지 그 길을 너희가 아느니라 5.도마가 이르되 주여 주께서 어디로 가시는지 우리가 알지 못하거늘 그 길을 어찌 알겠사옵나이까
도마는 예수님이 가시는 길을 어떤 장소, 공간인 줄로 이해하고 말씀도 안 해주셨는데 우리가 어떻게 그 길을 알겠냐고 물어봅니다. 그러자 예수님은 그 곳이 어떤 공간, 장소, 시간이 아니고 다음과 같다고 답하십니다.
6.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
이 본문을 많은 사람들은 ‘예수님이 구원에 이르는 유일한 문이다.’라고 해석하지만 잘 살펴보면 예수님은 자신을 ‘답이다’라고 하지 않고 ‘길’이라고 표현하고 있습니다. 길은 도착지가 아니라 부지런히 나아가야 하는 과정을 의미하며 여정을 통해 경험을 얻는 곳입니다.
지난해 밴쿠버에서 열린 미주연회를 마치고 저희 가족은 밴쿠버섬 빅토리아에서 토피노까지 차로 총5시간 반의 로드트립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 여행의 목적은 토피노에 도착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아름답고 웅장한 길을 운전하는 것 자체가 여행의 목적이었지요. 로드 트립은 목적지로 가기 위한 이동시간이 아니라 그 자체가 여행이고, 그 길 자체가 추억을 선사해주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길입니다. 어딘가로 가기 위한 통과점이나 통로가 아니라 그 자체가 목적이고 그 자체가 의미입니다.
사람들은 오늘도 어떤 길로 걸어야 하는지 끊임없이 질문합니다. 우리가 걸어야 하는 길은 어떠한 직업이나 삶의 청사진을 말하는것이 아니라 예수님과 함께 걷는 길입니다.“무엇이 옳은것이고 무엇이 참이냐?”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자신의 삶을 통해 친히 보여주시고 선택했던 길이 진리다”라고 말씀하십니다. “무엇이 우리로 하여금 삶의 의미를 주고, 내가 살아있다고 느끼게 해주는가?”라고 물을 때 예수님은 내가 생명이다.라고 답변하십니다.
그렇다면 어떤 영광된 삶을 살아야 누가 하나님 아버지, 우리를 위해 예비하신 영원한 거처 앞으로 나갈수 있습니까? 벧후1:4은 우리에게 말합니다.
4.이로써 그 보배롭고 지극히 큰 약속을 우리에게 주사 이 약속으로 말미암아 너희가 정욕 때문에 세상에서 썩어질 것을 피하여 신성한 성품에 참여하는 자가 되게 하려 하셨느니라
우리가 걸어야 할 그 모든 길, 우리가 선택해야할 진리, 우리의 생명 근원이신 예수님을 따라가고 그분과 동행할 때 우리는 비로소 하나님 아버지를 알게되고 그 신성한 성품을 향해 나아가는 사람들이 되는 것입니다.
제가 목회자로서, 멋있는 인생 선배로 존경하는 춘천성암교회 허태수 목사님 교회 홈페이지 첫페이지에 올리신 멋진 글이 있어서 읽으며 설교를 마치려 합니다.
‘올라가는 만큼 사람이 된다’는 이야기를 어디선가 읽은 적이 있습니다.
사람은 자고로 위로 올라가는 존재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올라 갈 때 인간입니다.
가만히 생각해보면, 인간 내면에는 누구든지 위로 올라가고 싶은 충동이 있습니다.
그래서 남들이 하찮게 여기는 벼슬자리 하나라도 얻어 보려고 가진 애를 씁니다. 그게 ‘올라가는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정작 우리가 올라가야 하는 것은 그런 것들이 아닙니다. 올라 간 줄 알지만 사실은 아무것도 오른게 아닌,
오늘 아침 소복하게 내렸다가 아침 햇살에 녹아 없어지는 눈과 같은 그런것들입니다.
날마다 새로운 결의를 가지고 지성으로 욕망을 밀어 올리고,
영혼으로 정신을 밀어올리고,
소망으로 현재를 밀어 올리면서 하늘로 가는 사다리를 기어 올라가야 하는 겁니다.
인간이 올라 갈 곳은 저 높은 곳입니다. 그곳은 한번에 올라가지 못합니다. 한계단 한계단 착실하고 침착하게 올라가야 합니다. 남들이 보기에 더디지만 나는 지금 사람이 되기위해, 하나님의 사람이 되기위해 하늘로 올라가는 중입니다.
모든 억압과 굴레로부터 탈출케 하시는 주님과 기쁘게 동행합시다. 저 높은곳을 향해 날마다 올라가는 저와 여러분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할렐루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