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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뜨거운 믿음(요한계시록 3장 14~22절)_마니토바 엘림 한인 감리교회 김태우 목사

뜨거운 믿음(요한계시록 3장 14~22절)

마니토바 엘림 한인 감리교회 김태우 목사

할렐루야! 이 지면을 통해 여러분들에게 인사드릴 수 있어서 영광입니다. 캐나다 중앙의 도시라 불리는 위니펙에서 사역하는 마니토바 엘림 한인 감리교회 김태우 목사입니다. 

 오늘 말씀 가운데 저희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말씀은 요한계시록 3장 14절부터 21절까지 말씀입니다. 여러분은 교회에서 예배드리기 위해 만난 성도들에게 어떻게 인사합니까?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이렇게 주로 인사할 겁니다. 그러나 예배를 위해 모인 성도들에게 이렇게 매주 인사하면 어떨까요? 뜨거운 예배가 됩시다!

 이 안에서 성령의 열기로 또 하나님이 주시는 은혜로 뜨거워지는 귀한 시간 되길 바라는 마음으로 인사하는 여러분들이 되었으면 합니다. 

2024년이 시작된 지 벌써 절반이 지났습니다. 31일 저녁에 교회에 모여 말씀 카드 뽑던 시간이 엊그제 같은데 벌써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났습니다.

옛날 기독교가 우리 한국에 처음 들어왔을 때 미국에서 건너오신 선교사님이 유명한 송구영신 예배 설교를 했다고 합니다. ‘묵은 년은 가고 새 년이 옵니다. 좋은 년도 있고 나쁜 년도 있었습니다. 그러나 새 년에는 좋은 년이 되시기 바랍니다.’라고 하는 짧은 설교를 남기셨다고 합니다. 

아멘 이십니까? 6개월이라는 지났지만 좋은 년이 되고 있습니까?

 저는 신년을 인플루엔자 A형 독감으로 시작했습니다. 송구영신 예배가 끝나고 아프기 시작하더니 코로나 걸린 것처럼 매우 아팠습니다. 저는 이런 아픔을 겪으면서 이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육신의 병도 병이지만 영적인 병에 빠진 우리가 어떻게 하면 다시 일어날 수 있을까? 작년 한 해는 적당히 신앙생활 하면서 보냈다고 하면 새해에는 어떻게 하면 영적인 병에서 빠져나와 다시 건강한 신앙생활을 할 수 있을까 생각했습니다. 

 모든 사람은 육신이 아프기도 하지만 그 아픔으로 새롭게 변화되고 성장하기도 합니다. 남은 2024년에는 건강한 신앙 뜨거운 신앙을 갖는 귀한 성도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요한계시록 3장에 있는 말씀은 사도 요한을 통해서 소아시아에 있었던 일곱 교회 가운데 어느 교회 라오디케아 교회에 주셨던 그런 예수님의 편지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2000년 전에 하나님이 라오디케아 교회에 주신 편지이지만 오늘 2000년이 지난 지금 우리가 이 말씀을 읽어도 은혜가 되는 이유는 뭘까요? 그 말씀이 바로 우리에게도 해당하는 말씀이기 때문에, 오늘 우리가 이 말씀을 읽어도 여전히 은혜가 되고 도전받게 되더라는 말씀이죠. 

 즉 우리 마음속에 도전이 생기는 이유 중 하나는 나의 모습이 오늘 말씀에 대해서 표현되어 있기에 그런 것이 아닐까 생각해 봅니다.

 저도 오늘 이 말씀을 들으면서 저에 대한 반성을 많이 했습니다. 목사지만 목사라고 항상 뜨겁지는 못하잖아요? 뜨거울 때도 있고 차가울 때도 있고 미지근할 때도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저도 엘림교회에서 2014년 가정 예배로 시작으로 2015년 개척 예배를 드리고 9년을 목회하다 작년은 안식년으로 쭉 쉬었습니다. 개척하고 9년간 목회를 한다는 것 쉽지 않더라고요. 부모님 모시고 가족들끼리 시작한 목회는 어려움도 있었고 때론 감사한 점도 많았습니다. 이 모든 것이 저의 목회에 성장 기록이고 경험이고 그랬습니다. 그런데 9년쯤 하고 육신과 영이 지치니깐 목회를 쉴 수 봐께 없는 상황을 만들어 주시더라구요.

물론 제가 부족하지만, 사회에서 육체적 일을 마치고 목회까지 하려다 보니 한주 한주가 고난이었던 것 같아요. 열심히 해서 교회가 성장 되는 것 같으면 다시 빠지고, 우리 가족들만 남고 그렇더라고요. 개척 교회의 특징이 뭔 줄 알아요? 개척 교회는 믿는 사람들은 안 와요.

 신앙 있는 사람일수록 개척 교회는 힘들다는 것을 알고 있어서 오지 않습니다. 그럼 누가 오냐? 아무것도 모르고 교회 발 담근 청년들이 주로 많이 옵니다. 

그러다 보니 성도가 늘어났다 싶으면, 큰 도시로 떠나 버리는 청년들이 많이 있더라고요. 이것이 때론 상처였을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그들이 그리스도의 씨앗을 심어줄 수 있는 역할에 저희는 감사했습니다. 방황하던 친구들 워킹홀리데이로 와서 힘든 친구들 섬겨 주면서 예배드리게 하고 봉사하게 하고 어디를 가든지 계속 적으로 신앙생활 하게 만드는 것이 엘림교회의 역할 이었습니다. 

 그런데 어느 순간부터 이 의미를 잊게 되더라고요. 코로나 이후로 유입되는 성도는 없고 작은 교회가 할 수 있는 역할은 아주 작고 무의미하고 이렇게 목회를 하는 것이 맞는 목회인가? 하나님이 원하시는 목회인가? 라는 생각이 들기 시작하니깐 어려움에 닥치더라고요. 

그런데 문제는 저뿐 아니라 여러분들 또한 힘든 이러한 신앙생활이 지속이 되면 어떤 신앙을 갖게 되느냐?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갖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도 말하고 있지만 미지근한 신앙생활을 가진 신앙인들의 얼마나 무서운 줄 아십니까?

 제가 초등학교 때 미지근한 물이 갖는 착각에 대해 과학 실험을 한 적이 있습니다. 초등학교 선생님이 비커에 각각 차가운 물, 미지근한 물, 뜨거운 물 세 개를 받아 두고 실험했습니다. 한 학생을 불러 오른손에는 찬물, 왼손에는 뜨거운 물에 넣고 있으라고 했습니다. 이 친구가 앗 뜨거워 앗 차가워하면서 춤을 추더라고요. 그러더니 선생님이 두 손을 미지근한 물에 담그라고 하는 순간 학생에게 지금 왼손 오른손의 느낌을 말하라 했습니다. 오른손의 찬 손은 다 뜨겁게 느껴지고, 왼손의 뜨거운 손은 반대로 더 차갑게 느껴졌다는 겁니다. 

과학적으로 왜 그럴까요? 차가웠던 오른손이 갑자기 온도가 올라가면서 뜨겁게 느껴지고, 뜨거웠던 왼손은 갑자기 온도가 내려가면서 반대로 차갑게 느껴지는 겁니다. 같은 미지근한 비커 안에 있던 두 손은 착각하고 뜨거운 손은 차게, 차가운 손은 오히려 더 뜨겁게 느끼는 겁니다. 미지근한 믿음을 가진 사람들이 행할 수 있는 착각이 이렇다는 겁니다. 우리가 교회에서 열심히 일하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착각하고 믿음 없이 잘못된 방향으로 나아가기가 쉽다는 겁니다. 옳고 그름을 자신은 자기 생각대로 판단한다고 하지만 잘못하고 있을 수 있다는 겁니다. 성경은 뜨겁지 못하면 예수님은 차라리 차가워지라고 성경에서는 이야기합니다. 

왜? 차가우면 내가 차가운 줄 알고 실수하지 않는다는 거죠.

그럼 우리의 신앙 우리의 믿음은 그럼 어떻게 어떤 방법을 가지고 지켜 나아가 할까요.

오늘 본문의 배경을 살펴보면 예수님이 7개의 소아시아 교회를 평가 하는 이야기가 나오는데요. 나머지 6개 교회는 칭찬과 책망을 병행하면서 하시는데 마지막 라오디게아 교회는 책망만 나옵니다. 이렇게 책망만 하는 이유는 라오디게아 교회에 큰 문제가 있다는 거죠.

17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는 도다”

‘라오디게아 백성들은 부족한 것 없다’라고 이야기하지만, 하나님 입장에서는 부족한 그것을 보지 못하는 봉사와 다를 바 없다고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도 자신들은 잘 살고, 잘 믿고, 충고받을 만한 것 없다고 생각하며 살았습니다. 

 여러분, 세상에서 가장 불행한 사람은 자신이 잘못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올바르다고 생각하는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들은 자신의 잘못을 고칠 방법이 없습니다. 자신이 잘못되었음을 인정해야 고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라오디게아 교회가 그렇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의 뜻과 멀어진 삶을 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미 구원받았다는 생각에 도취하여 있는 것입니다. 그럴만한 이유도 있습니다. 라오디게아 지역은 무역의 중심지이기도 하면서 의료 사업에 아주 유명한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라오디게아 지역 사람들 모두 부유한 삶을 살던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의 많은 성도도 이런 태도를 보이고 있습니다. 내 삶이 평안하면 주님 감사합니다. 하며 더 뜨거운 믿음이 생기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 가까이 다가가면 자신이 손해 볼까 염려하고 너무 멀어지면 구원받지 못할까 염려하고, 그래서 적당히 거리를 두고 신앙생활을 하는 현대 성도들과도 너무나도 많이 닮았다는 겁니다. 

 그렇다면 왜 예수님은 미지근한 신앙이 차가운 신앙보다 못한 것이라고 이야기하는 것일까요? 그 이유는 믿지 않으면 나중에 믿을 소망이라도 있지만 미지근한 신앙은 그만큼 돌이키기 어렵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뜨겁다’라는 말은 무슨 뜻입니까? 우리는 이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여러분, ‘광신’과 ‘뜨거운 믿음’의 차이가 무어인지 아십니까?

그 기준이 무엇일까요? 뜨겁다는 것은 열심과 헌신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뜨겁게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우리의 머리와 가슴 모두가 하나님을 향하는 것을 뜻합니다. 그래서‘뜨겁게 하나님을 섬긴다’라는 것은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하나님의 눈과 하나님의 심장을 가지고 사람을 대하기 때문에 함께하는 사람들에게 믿음을 주고, 사랑을 주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광신은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은 종교 활동에만 열심이다 보니 오히려 그 열심히 다른 사람에게 피해를 주게 됩니다. 참믿음은 믿음이 자라면 자랄수록 자신의 연약함이 더 깊이 느껴지고, 성경 말씀을 많이 알면 알수록 그 말씀대로 살지 못하는 자신의 부족한 모습을 더욱 실감하게 되어 더 겸손하게 되는데, 광신에 빠지게 되면 그 반대로 다른 사람이 다 부족하게 보이고 자신들만 바로 보이게 됩니다. 

 선배 목사님 중에 하시는 말씀이, 목회하면서 느끼는 것 중 하나가 “열심이 있는 사람, 기도를 많이 하는 사람이 참 힘들다”라고 합니다. 기도를 많이 해서가 아니라, 기도가 말씀을 앞서기 때문입니다. ‘뜨겁다’라는 말을 잘 이해해야 합니다. 기도를 아무리 많이 해도 그 삶에 성령의 열매를 맺지 못하면 그것은 참 신앙이 아닙니다. 예수께서 우리에게 원하시는 것은 말씀의 감동에서 우러나오는 신앙적인 헌신과 동시에 그 헌신으로 삶 가운데 성령의 열매를 맺는 것입니다. 사랑, 희락, 화평, 오래 참음, 자비, 양선, 충성, 온유, 절제. 삶 속에서 이 성령의 아홉 가지 열매를 맺지 못하는 헌신은 자기 성취일 뿐 믿음은 아닙니다. 따라서 우리는 진정한 믿을 찾고 따르기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믿음을 찾기 위해 어떤 노력을 해야 하는지 18~19절 말씀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너를 권하노니 내게서 불로 연단한 금을 사서 부요하게 하고 흰 옷을 사서 입어 벌거벗은 수치를 보이지 않게 하고 안약을 사서 눈에 발라 보게 하라. 무릇 내가 사랑하는 자를 책망하여 징계하노니 그러므로 네가 열심을 내라 회개하라”

불로 연단한 금을 사고, 흰옷을 사고, 안약을 사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불로 연단 한 금’에서 불은 시련을, 금은 믿음을 뜻합니다.

연단 하지 않은 금이 거저 돌에 불과하듯이 연단 받지 않은 믿음 또한 아무것도 아닙니다. ‘흰옷’은 성도들의 의를 나타냅니다. 연단 받은 믿음은 반드시 의의 열매를 맺게 되는 것입니다. ‘안약’은 실상을 볼 수 있도록 치료하는 약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의 눈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육체적 치료 약으로만 사용하지 말고 그것을 돈벌이로만 사용하지 말고 영의 눈이 밝아져 예수님의 눈을 가지라는 겁니다. 

예수님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예수님의 권능으로 세상을 치유하는 자들이 되라는 것입니다.

 새벽마다 기도회에 빠지지 않는 할머니가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에 가려고 보니 연탄불이 꺼져 있더랍니다. 이른 새벽이라 다시 불을 지필 수 없어서 몰래 옆집 연탄과 바꾸어 놓고 아무런 양심의 가책이 없이 새벽기도에 다녀와서 시치미를 뚝 뗐다고 합니다.

또 어느 가게 주인이 목사님에게 외상 장부를 가지고 왔습니다. 외상값을 갚지 않은 사람 중에 교인들의 이름이 수두룩합니다. 그런데도 교인들은 부끄러움을 모르고 살아갑니다.

이런 말이 있습니다. “성경을 읽기 위해 촛불을 훔쳐 오지 말라”

 우리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지면 분별력이 사라집니다. 올바른 판단을 하지 못합니다. 열심히 신앙생활을 하는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올바른 신앙생활을 해야 합니다. 

우리의 영의 눈이 밝아져야 올바른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믿음의 자녀로 나아가는 올바른 모습입니다.

다음으로 20절 말씀을 읽어 보도록 하겠습니다. 

“볼찌어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두드리노니,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우리에게 눈 익은 성화 중에 문 앞에 서서 문을 두드리시는 예수님의 그림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에 그려져 있는 문을 자세히 살펴보면 문 바깥쪽에는 문을 열 수 있는 손잡이가 그려져 있지 않습니다. 화가가 왜 문손잡이를 그리지 않았을까요? 문손잡이를 그리는 것을 깜박 잊었을까요? 이 그림은 방금 읽은, 20절 말씀을 그린 것입니다. 이 구절을 잘 살펴보면 그가 왜 예수님이 있는 바깥에 문손잡이를 그리지 않았는지 알 수 있습니다.

‘내가 문 밖에서 서서’ 이 본문에서 가슴 아픈 사실은 라오디게아 교회가 잘못된 자기만족에 빠져 있는 동안에 예수님이 그들의 교회 문밖으로 밀려나 있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그들을 살리시기 위해 문밖에서 서서 두드리신다는 말씀입니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그런데 예수님 스스로 문을 열고 들어가시는 것이 아니라 문안에서 누군가 문을 열어주기를 기다리신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화가가 문 바깥쪽에 손잡이를 그리지 않았습니다. 우리의 마음의 문은 나 자신이 안에서 열어주어야 들어갈 수 있도록 설계되어 있습니다.

 문을 여는 것도, 닫는 것도 전적으로 문 안에 있는 사람, 곧 나에게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 나오고, 주님의 은혜를 바라고, 주님으로부터 지혜를 구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선포되는 말씀 앞에서 열린 마음을 가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똑똑 두드리면 여러분의 문을 여시기 바랍니다. 그것이 믿음을 받아 드리는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마태복음의 씨 뿌리는 자의 비유가 바로 이런 것 아니겠습니까?

내가 마음의 문을 활짝 열고, 나의 모든 편견을 다 내려놓고 순전한 마음으로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일 때 30배, 60배, 100배의 결실을 거두어 하나님께 참 잘하였다 네가 작은 일에 충성하였으니 큰 것으로 네게 주리라는 말씀을 듣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본문에서 한 가지 더 감동을 하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은혜받으려고 애쓰는 내 마음보다 내 안으로 들어오시려는 예수님의 마음이 더 간절하고, 더 뜨겁다는 사실입니다. 우리가 할 일은 거저 마음 문을 활짝 열고 내게 있는 것으로 주님을 섬기는 일입니다.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 이 말씀은 예수님을 믿는 것이 어떤 교리나 사상이나 신앙적인 열심히 아니라 예수님의 사랑으로 함께 사는 것임을 의미하는 강력한 메시지가 됩니다.

 이렇게 복음의 일꾼으로서의 삶을 살면 이 땅의 삶을 다 달려간 후에 우리는 예수님과 함께 영원한 생명 나무 과실을 먹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 성경에 나오는 모든 인물의 공통점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하나님의 축복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은 힘들고 어려운 상황에서도 그저 날마다 하나님의 손을 붙잡고 내가 정말 죽으면 죽으리라고 하는 그런 일사 각오의 믿음을 가지고 하나님만 붙잡고 나아갈 때, 마치 야곱이 얍복강가에서 하나님이 나를 축복하지 않으면 내가 절대 주님을 그냥 놔 드리지 않겠습니다. 하는 그런 믿음이 있을 때 하나님의 축복을 받았다는 겁니다. 가만히 있는다고 하나님의 복이 떨어지는 것 절대 아닙니다. 뜨겁든지, 차갑든지 뭔가 확실한 믿을 가지고 주님만을 붙잡고 나아갈 때 하나님은 그런 사람에게 복을 주시고, 교회에도 복을 주시고 가정에도 복을 주신다는 겁니다. 

 우리 성도들 또한 확실한 믿음을 갖고 하나님 앞에 응답받는 여러분이 되시길 바랍니다. 

요즘 아이들 말 중에 ‘썸탄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이 말은 남녀가 사귀기 전 호감 상태를 가리키는 말입니다. 남녀가 뜨거운 만남을 하기 전 단계를 말하지만 우리는 혹시 예수님과 ‘썸’만 타는 관계가 아닌지 생각을 해보시기를 바랍니다. 

 저는 보통 운전할 때 노래를 듣거나 라디오를 듣곤 합니다. 저는 주로 기독교 방송을 듣는데 한국에서 어떤 목사님이 이런 말씀을 하더라구요. 돌 조심하세요. 이 말이 무슨 말인가? 했는데 뒤이어 이렇게 이야기 하더라구요. 사람이 넘어진 것은 큰 돌 때문이 아니라 작은 돌부리에 넘어집니다. 여러분 특별히 작은 돌의 돌부리 조심하세요.

 저는 특별히 작은 돌부리 조심하라는 말을 듣고 이전에 묵상했던 글이 떠올랐습니다.

 여러분 예수님과 마귀의 차이를 아십니까? 예수님은 문이고 마귀는 틈입니다. 무슨 말이에요? 라고 할 수 있겠지만 성경에서 우리 주인 되신 예수님은 이렇게 오신다는 겁니다. 요한계시록 3장 20절 이 말씀처럼 예수님은 문으로 우리에게 당당하게 들어오십니다. 

그런데 마귀는 어떨까요? 이런 말이 있습니다. 마귀는 틈만 보이면 그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는 겁니다. 마귀는 틈으로 몰래 들어옵니다.

 우리의 삶에서 많은 어려움이 닥치고 힘든 일이 생길 테지만 그 원인은 우리에게 생긴 작은 틈을 이용해 마귀가 들어오기 때문에 그렇기 때문에 작은 틈 돌부리를 조심해야 합니다. 

우리에게 생긴 작은 틈, 돌부리를 다 막고 오직 예수그리스도 문만 활짝 열어 주님을 맞이하는 우리를 오라 부르시는 예수그리스도의 음성을 듣고 문을 활짝 열고 주님과 함께 먹고 마시며 기쁨과 은혜 가운데 살아가시는 저와 여러분들이 되시길 바랍니다. 

 저는 오늘 말씀을 전할 때 무슨 주제를 가지고 하면 좋을지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 교회 안에서 꼭 필요한 뜨거운 믿음의 주제로 여러분께 말씀을 전하고 싶었습니다. 올 안에 우리 앞에 어떤 위험이 어떤 어려움들이 생겨날지 우리는 알 수 없지만, 하나님께서 구름 기둥 불기둥으로 이스라엘 민족을 이끌어 주실 때 그들은 광야 40년이라는 길을 걸을 수 있었습니다. 믿음의 모험이지만 하나님께서 함께하시기에 안전한 삶이 된 것입니다. 

 그러기 위해 여러분들이 다른 것이 목숨 거는 것이 아니라 예배에 목숨 거시기 바라고 주의 말씀에 귀 기울이셔서 믿음의 문을 활짝 열어 복된 길로 나아가는 귀한 성도가 되시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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