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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완악함 (2), “허망한 마음”

완악함 (2), “허망한 마음”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는 음악과 관련하여 널리 퍼져있는 법칙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음악을 모르는 사람에게는 음악에 정통한 사람과 동등하게 말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였습니다. 글을 쓰는 문법에 관해서도 “그 지식을 모르는 사람들에게 그 지식에 능숙한 사람들과 동등하게 그것에 대해 말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는다”가 사회 정서였습니다. 어느 예술 분야에서도 그것을 모르는 사람에게 그 분야에 정통한 사람이 갖는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마찬가지로 올바른 삶의 원칙을 확립하는 것과 관련하여, 그러한 참된 원칙을 모르는 사람들에게는 그 주제에 대해 실제로 연구하고 배운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말할 권리를 부여하지 않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음이 완악하고 우매한 자가 지혜자의 말을 무시하고 오히려 반박하며 행동할 때 나타나는 결과는 인간에게 “극한 고통이다”고 주장한 유대인 철학자 필론은 그 이유를 이렇게 설명합니다. “완악한 자들의 행동이나 그들의 행위의 결과로 나타나는 현상들에 비교하면,  재물의 손실과 불명예의 낙인과 추방과 구타를 당한 모욕과 같은 종류들의 불행은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이 전혀 없는 것과  같다. 일반 사람들은 외부의 재난에 대해서만 슬퍼하지,  (완악한 자들의 행동으로 인한) 영혼의 상처를 인식할 수 없어서 올바르게 판단하는 능력을 완전히 박탈당한다. 사람들이 능히 눈을 들어 완악한 데서 일어나는 궤휼과 그들의 탐심에서 나오는 모든 혼란과 부절제에서 일어나는 모든 어리석은 것과 그들의 불의가 탐닉하는 모든 죄의 법칙에 따라 자신들의 가장 소중한 부분이 입는 손상을 보게된다면, 그들은 악의 초과적 거대함으로 인해 끝없는 슬픔으로 가득 차서 위로를 받을 수 없을 것이다.”

   완악한 자로 번역된 희랍어 “포로시스”는 감정이 기능을 상실하여 마음이 둔하여 져 사리분별의 능력이 없는 사람을 뜻합니다. 인생의 헛됨을 전하는 70인역 (LXX) 전도서는 완악한 자인 포로시스를 지혜와 비교해서 설명합니다. “내가 보니 지혜가 우매보다 뛰어남이 빛이 어둠보다 뛰어남 같도다 지혜자는 그의 눈이 그의 머리 속에 있고 우매자 (완악한 자)는 어둠 속에 다닌다.” 전도서는 마음이 어둠으로 꽉 차 있는 포로시스의 그 행위와 결과에 관해서도 언급합니다. “지혜자의 입의 말들은 은혜로우나 우매자의 입술들은 자기를 삼키나니 그의 입의 말들의 시작은 우매요 그의 입의 결말들은 심히 미친 것이니라. 우매한 자는 말을 많이 하거니와 사람은 장래 일을 알지 못하나니.” 그래서 전도자는 지혜자의 책망을 듣는 것이 완악한 자의 칭찬을 듣는 것보다 비교할 수 없이 좋다고 말합니다.

     포로시스를 “허망한 마음”으로 표현한 사도 바울은 그 마음이 무엇인지를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을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하지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어리석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새와 짐승과 기어다니는 동물 모양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신약성경은 네 종류의 포로시스를 언급합니다. 

   첫째, 포로시스는 하나님의 말씀의 의미를 볼 수 없도록 자신을 그렇게 만든 사람의 정신 상태를 묘사합니다.  바울은 유대인들에 대해 하나님의 말씀을 읽을 때 그들의 마음의 눈이 어두워졌다고 표현합니다. 그 이유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그러나 그들의 마음이 완고하여 오늘까지도 구약을 읽을 때에 그 수건이 벗겨지지 아니하고 있으니 그 수건은 그리스도 안에서 없어질 것이라.” 책을 읽지만 수건으로 눈을 가렸기 때문에 내용을 알 수 없는 것처럼, 유대인들은 마음의 눈에 수건을 두르고 있기 때문에 성경의 내용을 깨닫지 못하는 것입니다. 만약 어떤 사람이 자신의 생각을 오랫동안 최고의 권위로 세우면 결국에는 하나님의 생각을 받아들일 수 없게 될 것입니다.
  둘째,  포로시스는 하나님에 대한 “유대인들의 마음의 태도”를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셨던 그 많은 기적을 보았지만, 그들의 마음은 완악해져 있기 때문에 예수님을 구세주로 믿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능히 믿지 못한 것은 이 때문이니 곧 이사야가 다시 일렀으되 그들의 눈을 멀게 하시고 그들의 마음을 완고하게 하셨으니 이는 그들로 하여금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깨닫고 돌이켜 내게 고침을 받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하였음이더라.” 자기 자신의 확신으로 꽉 차 있기 때문에 결코 하나님을 자신들 이상으로 생각하지 않는 사람들이 포로오입니다. 이 단어는 삶에 관해서 자신이 하나님보다 더 잘 안다고 생각하는 사람을 묘사합니다.  

   셋째, 포로시스는 삶을 방탕에 방임하는 마음을 묘사합니다. 이방인 세계의 부도덕은 그들의 마음이 완고해 져서 총명이 어두워졌기 때문입니다. “너희는 이방인이 그 마음의 허망한 것으로 행함 같이 행하지 말라 그들의 총명이 어두워지고 그들 가운데 있는 무지함과 그들의 마음이 굳어짐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생명에서 떠나 있도다 그들이 감각 없는 자가 되어 자신을 방탕에 방임하여 모든 더러운 것을 욕심으로 행하되 오직 너희는 그리스도를 그같이 배우지 아니하였느니라.” 밖에 나타나는 행실이 방탕한 원인은 그들의 마음이 오랫동안 허망한 것을 추구하여 총명을 잃었기 때문입니다. 거짓된 가르침을 교훈 삼아 지내는 동안 양심이 바른 기능을 잃어 석화되었습니다.
  넷째, 포로시스는 무자비한 마음의 태도를 묘사합니다.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회당에서 손 마른 사람을 고치시려 하실 때, 율법과 전통을 중요시하던 종교 지도자들이 예수님의 흠을 잡아 고발할 기회를 얻기 위해 주시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을 향하여 “안식일에 선을 행하는 것과 악을 행하는 것, 생명을 구하는 것과 죽이는 것, 어느 것이 옳으냐”라고 질문하신 예수님께서는 그들 마음의 완악함을 탄식하셨습니다. 이들의 마음이 완악하게 된 이유는 오랜 시간동안 종교 예식과 규율에 붙잡혀서 인간을 향한 자비의 마음이 사라졌기 때문입니다. 외형적 질서를 쫓으면서 인간 내면의 필요에 완전 무감각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계셔야 할 자리에  자신의 생각을 세워서 자기 길을 가게 되면 그의 마음이 굳어지면서 마음과 양심이 무감각해지고, 결국 그 사람의 눈은 어둠에 이르게 됩니다. 이런 상태를 이사야는 “우상을 만드는 자는 다 허망하도다 그들이 원하는 것들은 무익한 것이다”라고 표현합니다. 허망한 삶을 지혜와 빛으로 대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마음 속에 예수 그리스도로 가득 채우는 것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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