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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인생의 태클 속에서 (왜 슬퍼하느냐), 사도행전 25장 1-27절_밴쿠버예닮교회 이경태 목사

인생의 태클 속에서 (왜 슬퍼하느냐), 사도행전 25장 1-27절

밴쿠버 예닮교회 이경태 목사

베스도라는 사람이 벨릭스의 뒤를 이어 총독이 되었습니다. 종교심이 강한 유대지역을 잘 다스리려면 산헤드린 공의회와 협력을 잘 해야 합니다. 그래서 삼일 만에 예루살렘으로 올라갔어요. 로마는 황제에게 충성을 맹세하면 그 지역의 자치권을 보장했기 때문에 총독은 맡은 지역의 문화를 잘 알아야 했죠. 베스도가 예루살렘에 도착하자마자 대제사장 무리는 2년이 지나도록 해결되지 않은 바울 문제를 다시 꺼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바울을 다시 소환해서 재판을 하게 해 달라는 겁니다. 물론 목적은 재판이 아니라 소환되어 오는 길에 매복하였다가 바울을 죽이기 위해서였죠. 베스도는 처음부터 휩쓸리지 않고 주도권을 잡으려고 했던 것인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다시 데려 와 달라는 그들의 요청을 거절했습니다. 예루살렘으로 오는 길에 매복하여 공격할 만한 장소들이 많은 것을 지나오면서 보았을 거예요.

베스도는 8-10일 정도를 예루살렘에서 머문 후에 다시 가이사랴로 내려가 바울을 재판자리에 세웠습니다. 함께 따라 온 유대인들이 바울을 고소하지만 죽일만한 죄를 찾을 수가 없었죠. 바울도 자신이 율법이나 성전이나 가이사에게 죄를 지은 적이 없음을 변호해요. 그러자 베스도는 유대인들의 마음을 얻으려고 바울에게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이 사건에 대해 다시 심문을 받겠느냐고 물었습니다. 억울한 바울은 드디어 마지막 카드, 자신의 로마 시민권을 이용하여 가이사(Caesar)에게 상소합니다. 로마 시민들은 부당하거나 목숨이 걸린 재판의 경우 가이사에게 상소하여, 로마 황제 앞에서 재판을 받을 수 있었어요. 베스도는 배석자들과 상의하여 바울의 상소를 받아들였습니다. 

벨릭스보다 나을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베스도 역시 공정한 재판을 해 주지 않았어요. 바울을 죽이려는 함정인줄 눈치를 챘을 텐데도 유대인의 마음을 얻고자 예루살렘으로 올라가겠느냐고 물었습니다. 바보인가요? 2년 전 기록을 잘 읽어봤다면 예루살렘에서 자객들이 죽이려고 해서 천부장이 안전하게 보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잖아요. 예루살렘으로 가는 도중에 죽으라는 걸까요? 세상은 쉽게 다른 사람들의 억울함을 외면합니다. 개인적으로 당해보기 전 까지는 세상이 공정한 곳이라 착각하며 살죠. 하지만 세상은 약자에게 관심도 없고 책임도 회피합니다. 담당부서를 바꿔가며 여기저기 돌리기만 하죠. 억울한 사람을 지치게 하고 포기하게 만드는 거예요. 성도는 소망을 세상이 아닌 공의로우신 하나님께 두는 거에요. 

베스도가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낼 생각을 하자 바울은 이제 모든 가능성을 접고 가이사에게 상소했습니다.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여 고등법원(Supreme Court)에 상소한 거에요. 로마로 향하는 마지막 방법입니다. 죄수의 신분으로 가야 하기에 바울이 원한 그림은 아니었겠죠. 이 사건 이후 아그립바 왕과 버니게가 베스도의 부임을 축하하러 방문했습니다. 베스도는 그들과 대화하는 도중에 종교적인 문제 외에는 잘못이 없는 바울을 유대인들이 죽이려고 고발한다고 난색을 표했어요. 이야기를 듣던 아그립바와 버니게도 바울의 이야기에 관심이 생겼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그립바왕과 버니게 앞에서도 증언할 기회를 얻게 됩니다. 바울은 아마 왕족 앞에서 좋은 판결을 받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요. 물론 26장에 가면 그 기대는 여지없이 무너졌지만 말이죠.

아그립바와 버니게는 친 오빠와 동생 관계에요. 그들은 충이 먹어 죽었던 헤롯 아그립바 왕의 자손들이죠. 버니게는 2번의 결혼에서 실패를 했어요. 그래서 오빠 집에 와서 살다가 부부가 되었죠. 드라마 왕자의 게임에서나 나오는 ‘Cercie & Jaime’처럼 막장인 삶이 흔하진 않더라도 역사적인 사실이었습니다. 

재판자리에 화려한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왕복을 입은 아그립바와 버니게, 천부장들과 시중의 높은 사람들이 죄수 바울을 위해서 모두 축하하러(?) 모였죠. 베스도가 읽는 고소장을 자세히 살펴보면 바울의 무죄가 드러납니다. 바울은 결코 죽일 죄를 범한 일이 없지만 그가 황제에게 상소했기에 어쩔 수 없이 상소한 내용을 정리해서 보내려고 이렇게 재판자리를 열었다는 거예요.(25절) 죄목도 없이 죄수를 로마 황제 앞으로 보내는 것은 말이 안 된다는 겁니다. 분명히 바울에게 죄가 없다고 말하면서도 바울을 무죄 방면해주지 못한 이유는 무엇일까요? 죄가 없으면 죄수가 아니잖아요. 자유롭게 풀어줘야 하는데 이상한 상황입니다. 바울을 몰아붙여 상소를 하게 한 사람은 베스도잖아요? 그런데 바울이 상소한 것을 마치 바울 탓으로 돌리고 있습니다. 그렇게 바울 탓을 하며 자신의 실수를 숨기죠. 바울 때문에 일이 커졌다며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고 있어요. 당시에도 무죄 추정의 원칙이 있었어요. 또한 누군가에게 죄를 덮어 씌웠다가 무죄가 증명되면 덮어씌운 사람에게 죄 값을 치르게 했습니다. 그럼에도 베스도는 공정하게 판결할 생각이 없어요. 그저 귀찮은 남의 일이었던 거죠. 

환경적으로도, 주변 사람들도 바울 편은 하나도 없어요. 어떻게 그 스트레스를 이겼을까요? 하나님께서 바울에게 로마까지 갈 것이니 담대하라고 말씀하셨지만, 상황은 별로 달라진 것이 없어요. 자칫 죽을지도 모를 급박한 상황입니다. 어쩔 수 없는 선택으로 가이사에게 상소했어요. 복음을 전하러 로마까지 가야 하는데 인생에 태클이 참 많아요. 하나님 나라를 위해 나아가는데 일사천리여야지 왜 이렇게 태클이 걸릴까요? 도대체 이게 몇 년째에요? 2년이 넘도록 재판에 진보가 없어요. 지지부진한 2년의 재판 기간 동안 몸과 마음이 힘겨웠을 거예요. 사명을 주셨으면 좋은 길로 인도하셔야지 도리어 환경으로 가로 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제가 바울이었다면 ‘내가 잘못된 길로 들어섰나?’ 고민했을 거예요. 오죽 답답했으면 로마 시민권을 사용하여 가이사에게 상소까지 했을까요?

바울이 가이사에게 상소한 사실을 베스도는 어떻게 해석하나요? 로마까지 가는 데 보호를 요청한 것으로 봐요. 바울은 로마까지 자신을 보호해 달라고 요청한 적이 없어요. 단지 가이사에게 호소한 것뿐이죠. 베스도와 유대인들이 바울을 예루살렘으로 보내면서 도중에 죽이려고 하는 작당을 보고 어쩔 수 없이 선택한 길이죠. 베스도의 유도 질문이 바울로 하여금 로마로 갈 수 있는 다양한 선택방법 중에 단 하나의 길을 선택하게 한 거죠. 물론 베스도가 마음만 먹었다면 바울에게 묻지 않고 그냥 예루살렘으로 돌려보낼 수도 있었습니다. 그런 권력가가 권유를 해 주었다는 것은 어쩌면 배려였겠죠. 그래서 신학자들은 이를 베스도의 지혜로운 힌트주기로 해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결론적으로 베스도의 어이없는 권유에 바울은 상소를 선택했어요. 바울에게는 마음에 들지 않는 마지못한 방법이었습니다. 

바울이 원하지 않는 방법이 실은 바울을 가장 안전하게 로마로 데려다 주는 길이 되었습니다. 자유인으로 배를 타면 언제든지 자객으로부터 죽음의 위협이 있죠. 하지만 상소를 하면 비록 죄인의 신분이더라도 로마 군대의 호송을 받으며 황제 앞으로 갈 수 있습니다. 황제 앞에서 심판을 받기 전에 죄인이 탈출을 하거나 죽거나 하면 호위하던 군사들이 그 죄인이 받아야 할 처벌을 대신 받아요. 바울이 로마에서 어떤 판결을 받을지 모르기에 군사들은 무조건 자기 생명을 걸고 바울을 살려서 로마로 이송해야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군대의 호위를 받으며 로마로 갈 방법을 마련해 주신 거예요. 뿐만 아니라 로마에 도착해서 황제로부터 유리한 판결을 받도록 준비하셨어요. 베스도의 평결문은 공식적으로 모든 사람들 앞에서 1차 무죄선고와 다름없습니다. 또한 26장에서는 아그립바를 통해 2차 무죄선고를 받게 됩니다. 로마로 가기 전 바울은 미리 1-2차 재판에서 무죄 판결을 받죠. 바울이 군대의 철저한 보호 속에 황제 앞에 서게 될 때 당연히 무죄 판결이 기다리는 셈입니다. 

사명을 따라 사는 성도의 삶에도 기대하는 방법으로 환경과 상황이 열리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살아계신 하나님께서 섭리하심을 믿지만 여전히 상황은 답답합니다. 환경이 태클을 걸고 사람들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듯 보여도, 하나님께서는 내 삶 속에서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비록 우리 기대와 소망과는 다른 방식으로 일이 진행될지라도, 우리는 하나님의 섭리를 믿을 수 있습니다. 환경에 휩쓸려 낙망하며 현실을 부정적으로 해석하기 전에 눈을 들어 하나님을 바라봅시다. 성도인 우리가 다 이해할 수 없을 때라도 감사하며 순종하며 살 수 있는 이유는 하나님께서 이 길을 결코 실수로 인도하신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주님과 함께 걷는 길에 험한 고난들을 넉넉히 이겨낸 바울처럼 우리도 환경을 새롭게 해석해야 합니다. 모든 것이 주님의 섭리 안에 있다고 믿은 바울처럼 우리도 주님 안에 있음을 인정할 때 평강을 누릴 수 있습니다. 어제나 오늘이나 동일한 주님께서 우리의 삶 속에서도 여전히 일하고 계십니다. 주님이 인도하신다는 확신으로 전 세계적으로 어려운 환경을 믿음으로 해석하며 승리하시는 성도가 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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