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단상] 일상을 예배로_시편 127편 1-5절_토론토한인장로교회 신한준 목사

일상을 예배로_ 시편 127편 1-5절

토론토한인장로교회 신한준 목사

1. 일상의 공간은 어떻게 예배의 자리가 되는가?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과 시간을 우리는 일상이라고 부릅니다. ‘매일 항상’을 줄여 놓은 말이죠? 늘 반복되는 것들을 부르는 표현입니다. 그런데 여러분들께서는 이런 이야기 종종 들어 보셨을 것입니다. ‘일상을 하나님을 만나는 자리, 예배의 자리가 되게 하라’라는 말씀이죠.

이 말은 일상에서 격식을 갖춘 예배를 드리라는 말이 아닙니다. 여러분 집에 매일 목사님을 불러서 예배 부름으로부터 시작해서 축도로 끝나는 예배를 드려야 한다는 말은 아니죠. 일상 그 자체, 우리의 삶 그 자체가 하나님과 함께 동행하는 자리가 되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하지만 어떻게 해야 일상이 예배의 자리가 될까요? 어떻게 해야 내가 일하는 회사의 공간이, 내가 차 타고 때론 지하철이나 버스나 트램을 타고 지나가는 공간이, 내가 이웃과 만나 커피 한 잔 마시며 수다 떠는 시간이, 스마트폰으로 유튜브를 들여다보는 시간이, 가족에게 인사하고 잠자리에 드는 순간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시간이 될 수 있을까요?

2. 우리의 일상, 우리의 하루

먼저 우리의 하루를 돌아봅시다. 우리의 하루는 어떻게 진행이 됩니까? 제가 인터넷에서 어느 한 직장인의 하루 시간표를 확인해 봤습니다. 

물론 우리들의 하루는 동일하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일어나서 일터로 향하고, 어떤 사람은 집에서 하루 종일 머무르죠. 그래도 어느 정도 유사한 흐름은 발견할 수 있습니다.

잠에서 깨어나고, 아침을 먹습니다. 낮 시간 동안에 그게 무엇이든 무언가 활동적인, 생산성 있는 일을 하고자 애씁니다. 회사에 출근하거나, 교회에서 봉사합니다. 아니면 집에서 가드닝을 합니다. 저희 교회의 원로장로님께서는, 이제 연세가 많으셔서 몸을 움직이시기 쉽지 않으심에도 낮 동안 여러 가지 활동을 꾸준히 하시면서 그림도 그리시고, 많은 것들을 하려고 하신다는 그런 말씀을 들은 적도 있습니다. 무언가 일을 하는 것이죠. 그게 무엇이 되었든. 또한 낮 시간 동안 그게 무엇이든 무언가 사람들과 연결 고리가 있는 일을 하게 됩니다. 전화 통화라든가, 식사, 커피 타임 등입니다. 그리고 대부분 어느 정도의 시간은 자신의 휴식과 재미를 위해 보낸다. 유튜브 시청, TV 시청, 게임, 웹툰 보기, 운동 등입니다. 그리고 저녁이 되면 하루를 돌아보고, 잠자리에 들게 됩니다.

이것이 우리의 하루입니다. 이 하루에 주님이 임하실 시간이 얼마나 될까요? 여러분은 아침을 먹으며 하나님을 만나십니까? 여러분은 이를 닦으며 주님의 임재를 경험하십니까? 여러분은 커피 타임에 친구와 이웃과 수다를 떨면서도 주님께서도 그 자리에 함께 하시게 하십니까? 여러분은 유튜브를 보며 주님의 사랑을 느끼십니까? 여러분 그렇게 하셔야 되요, 안 그러면 아까 보셨던 생활계획표처럼 걱정으로 가득한 하루를 보내실 수도 있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질문할 수도 있을 것 같습니다. ‘너무 과한 것 아닙니까? 주님이 우리의 그런 모든 일상을 통제하기를 바라시겠습니까? 가끔은 주님으로부터 벗어나 온전히 내 마음대로 쉴 틈도 주셔야죠.’ 여러분, 오해 없으시기를 바랍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통제하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과거에 우리는 주님에 대해 그런 오해들을 했었습니다. ‘주일은 안식일로서 우리의 일을 쉬어야 하는 날이다.’ 이런 거죠. 그래서 신약 시대의 바리새인들만큼이나 엄격하게 주일에는 일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곤 하였습니다. 왜 대부분의 한국 교회가 12시를 전후로 한 주일 예배를 메인 예배로 생각할까요? 선교사들이 한국에 와서 보니 대부분이 농부들이었는데, 이 농부들은 아침에 해가 뜨면 밭에 나가서 일하다가 해가 지면 돌아왔습니다. 주일을 안식일로 보내게 하려면, 그 정가운데 시간에 예배를 드리게 해서, 오전에 밭에 나가기도 어중띠고, 오후에 밭에 나가기도 어중띠게 만들 필요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12시에 주일 예배를 드리는 것이 한국 교회의 전통이 된 것입니다. 이후 교회가 성장하면서 예배를 여러 번 나눠드리게 된 후에도, 이 전통이 남아서 대부분의 한국 교회들은 12시 전후의 예배를 메인 예배라고 간주합니다.

물론 귀한 마음이죠. 하지만, 여기에는 약간의 오해도 수반되어 있습니다. 우리 주님은 우리를 안식하게 하고 싶어하시는 분이시거든요. 그것을 위해 좋은 작전을 쓴 것까지는 좋았습니다. 12시에 일을 멈추게 하자. 그런데 그 안식, 쉼을, 쉴 틈 없이 지키도록 만들어 놓은 것은 본래의 의도를 벗어난 것이죠. 쉼을 쉴 틈 없이 쉬게 하는 게 어디 있습니까? 쉬는 건 느슨하게 쉬어야죠.

물론 오늘의 주제가 안식이 아니기 때문에 이 주제는 이 정도만 이야기하고 넘어가도록 합시다. 아무튼 우리 주님은 우리를 통제하기를 원하지 않으신다는 것입니다. 어떤 어린 아이에게 하나님이 어떤 분이시냐고 물었더니, 그 아이는 이렇게 대답했다고 해요. C. S. 루이스의 어느 책엔가에 나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언제 재미있게 노나 지켜 보시다가, 재미있게 논다 싶으면 끼어들어서 못 놀게 막으시는 분.” 아이다운 표현이지만, 이것이 우리 안에 있는 하나님에 대한 오해의 이미지입니다. 우리 주님은 노는 것을 지극히 좋아하는 분이셨습니다. 오죽하면 술을 즐기며 놀기 좋아하는 양반이라는 비아냥을 들으셨을까요? 우리 주님은 쉬는 것을 참 좋아하는 분이셨습니다. 쉬지 못하는 사람은 주님께로 나오라고까지 간곡하게 쉬라고 권하셨던 분이십니다. 주님은 우리 삶을 방해하려고 하시는 분이 아니세요. 주님은 우리 삶을 지금보다 더 즐길 수 있게 만들어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여전히, 이를 닦으면서 주님을 만나라는 것은 과한 충고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이 계실 수 있습니다. 제가 여기 한 분을 소개해드리고 싶습니다. 이를 닦으면서 주님을 만난 사람입니다. “오늘이라는 예배”라는 책을 쓴 티시 해리슨 워런이라는 한 여성 목사님이 계십니다. 정확하게는 성공회의 사제인데, 성공회는 개신교의 한 분파이므로 편의상 목사님이라고 호칭하도록 하겠습니다. 이 목사님이 쓴 “오늘이라는 예배”라는 책은 잠에서 깨어난 순간부터, 침구를 정리하는 시간, 이를 닦는 시간, 열쇠를 잃어버린 순간, 남은 음식을 처리하는 시간, 남편과 싸운 순간, 이메일을 확인하는 시간, 교통 체증을 버티는 시간, 친구와 통화하는 시간, 차를 마시는 시간, 다시 잠자리에 드는 시간, 이 모든 일상의 순간들마다 이 분이 어떻게 하나님을 묵상할 수 있었는지를 소개합니다. 목사라서 가능한 부분도 없지는 않겠지만 불가능한 일은 아닙니다. 예를 들어 볼까요? 이 분이 소개해 준 이 분의 친구 얘기를 먼저 들어보지요.

“인도 캘커타의 지극히 가난한 사람들 곁으로 간 선교사 친구가 있다. 그는 그런 낯설고 도전적인 장소에서조차 삶이 얼마나 일상적인지를 보고 놀랐다고 말했다. 해외 선교를 가겠다는 그의 결정은 용감하고 대담하게 느껴졌지만, 정작 그 자신은 세계 어디서든 하루의 많은 시간을 그저 사람들과 함께 앉아 있고, 업무를 보고, 집안일을 하며, 자신의 몸을 돌보고, 이웃을 알아 가고, 사람들을 사랑하려고 애쓰면서 때로는 성공하고 때로는 실패하면서 살아간다는 깨달음에 충격을 받았다. 마더 테레사에게나 가정주부에게나 하루는 24시간이다. 우리에게는 몸이 있다. 우리의 체력은 고갈된다. 우리는 천천히 배운다. 우리는 매일 잠에서 깨며, 앞에 무엇이 놓여 있는지 알지 못한다.(오늘이라는 예배, 32쪽)”

‘오 주님의 일을 하리라!’ 굳게 마음 먹고 본토 친척 아비 집을 떠나 멀리 인도까지 가서 발견한 선교사의 깨달음입니다. 이곳에도 결국은 일상이 있다는 거예요. 이것은 사실 우리가 이미 경험한 바죠. 한국에서 캐나다까지 먼 길을 떠나 왔으나, 한국에서와 마찬가지로 이곳 캐나다에도 일상이 있습니다. 우리의 삶의 태반은 일상입니다. 그러므로 이 일상 속에 주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도록 초청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우리의 삶의 대부분을 주님 없이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 분이 이를 닦으시며 어떻게 하나님을 묵상하시는지 조금 더 들어 볼까요?

“육체를 입으신 예수님의 사역 덕분에 나의 몸은 구속과 영원한 예배를 위해, 영원히 뛰놀고 점프하고 빙빙 돌고 손을 들고 무릎 꿇고 춤추고 노래하고 씹고 맛보는 것을 위해 예정되어 있다. 이를 닦을 때, 나는 언젠가 불가피하게 내 몸을 장악할 죽음과 혼란을 가장 작은 방식으로 밀어낸다. 나는 먼지를 털어내는 먼지다. 그러나 나는 먼지만은 아니다. 하나님은 흙으로 사람을 빚으실 때 우리 안에, 우리의 입술과 이 안으로 그분의 숨결을 불어넣으셨다. 그래서 나는 내 육체의 타락성에 맞서 싸울 것이다. 나는 내 몸이 거룩하며 그 몸을 또 내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의 몸을 돌보는 일은 거룩한 행위임을 알기에, 최선을 다할 것이다. 나는 내 몸이 모든 깨어짐 속에서 사랑받고 있으며, 언젠가 부활하신 그리스도의 몸처럼 영광스럽게 되리라는 진리를 붙들 것이다. 그렇기에 이 닦기는 비언어적 기도, 장차 올 소망을 붙드는 예배의 행위다. 영광의 작은 맛보기인 민트 향 나는 내 숨결. (오늘이라는 예배, 74쪽)”

제가 맥락을 자른 채로 바로 결론 부분을 말씀드려서, 정확하게 이해가 되셨는지 모르겠습니다. 제가 간단하게 요약을 해 드리면 이런 이야기입니다. 나는 육체 가운데 산다,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직 치석이 되지 않은 찌꺼기 정도를 제거하는 일이지만, 언젠가 그리스도의 부활체처럼 영광스러워질 것을 믿는 믿음 안에서 그 일을 한다. 양치를 마치고 치약 향나는 나의 숨결이 그것을 나에게 매일 아침마다 상기시켜 준다.

목회자다운 묵상으로 느껴지세요? 여전히 여러분과는 좀 거리가 있어 보이십니까? 그러면 우리 주위의 분들의 삶 속의 묵상을 들어 보죠.

며칠 전에 한 권사님과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아흔이 넘으신 권사님이신데, 새벽기도 이야기를 하셔요. 요즘 저희가 새벽기도 때 ‘예수는 믿는데 기쁨이 없어서’라는 책을 가지고 어떻게 우리가 이 기쁨의 50일 동안, 또 그 이후에도 주님의 기쁨을 가지고 살아갈 수 있는가, 이런 내용을 묵상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권사님이 뭐라고 말씀하시느냐 하면, 책이 잘 이해가 안 가신데요. 내용이 어려워서가 아니고요, 전제가 이해가 안 가신데요. “어떻게 예수는 믿는데 기쁨이 없을 수가 있죠?” 그러면서 당신의 일상을 전해 주십니다. 뭐 집밖으로 나오실 일도 거의 없으신데, 아침에 일어나시면 일어나면서 감사하시고, 밖에 가드닝하시면서 생명이 자라는 걸 보시면서 기뻐하시고, 늘 하루하루가 기쁨인데, “왜 그런 책을 썼을까요?” 이렇게 말씀하셔요. 그래서 제가 말씀드렸죠. “권사님은 이미 그 책을 넘어서셨으니까, 그대로 사시기만 하면 됩니다.” 맞는 말씀이죠. 예수를 믿는데 기쁨이 없을 수가 있어요? 신앙의 연륜이 느껴지는 말씀을 그렇게 해 주셨습니다. 일상에서 기뻐하는 것이죠.

또 다른 우리 이웃의 묵상을 들어 보겠습니다. 우리 교회 청년부는 온라인으로 대화를 나누는 슬랙이라는 소통 창구가 있습니다. 거기에 감사 기도방이 따로 있습니다. 목사님과 부장 집사님 부부와 우리 청년들이, 매일 같이 거기 들어오셔서 오늘의 감사의 제목을 적습니다. 우리 아흔 넘기신 권사님의 삶 속 묵상을 들어 봤으니까, 이번엔 우리 교회의 젊은이의 묵상도 한 번 들어 보죠. “가족과 불닭을 나눠 먹었습니다. 어느새 매운 것을 못 먹는 찐 맵찔이가 되었습니다.. 아쉽지만 정신이 바짝 들어 해야 할 일을 잘 마무리할 수 있겠네요. 감사합니다!” 이전에 잘 먹던 불닭을 잘 못 먹게 된 것에서부터 이런 감사가 나올 수 있습니다. 이렇게 보니 이게 신앙의 연륜의 문제가 아닙니다. 그렇죠? 우리의 일상을 얼마나 주님과 자연스럽게 연결시키고 있느냐의 문제죠.

하나 더 우리 이웃의 묵상을 볼까요? 우리 교회의 나무 앱과 홈페이지를 만들어 준 집사님이 개발한 기도 앱이 있습니다. Dear God이라는 앱인데요, 여기에도 매일 매일 다양한 기도들이 올라옵니다. 그 중에는 감사의 기도도 있고, 때로는 힘겨움을 토로하는 기도도 있습니다. 처음에는 우리 교회 교인들이 많았던 것 같은데, 지금은 굉장히 활발해져서 토론토에 많은 분들이 같이 참여하고 있는 것 같고, 한글보다 영어 기도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그 중에 하나, 오늘 주제인 일상 속에서의 예배와 관련 있는 기도를 소개해 보겠습니다. 익명이라 누구신지 몰라요. 우리 교회 교인이실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습니다.

“Dear God, I want to say thank you my day at home was crazy and chaotic thank you so much for making my life at work simple and easy would love two more but I’ll take what I can get.

하나님, 집에서의 하루가 정신없고 혼란스러웠던 것에 대해 감사합니다. 그리고 직장에서의 삶은 단순하고 쉽게 만들어 주셔서 정말 정말 감사합니다 둘 다를 사랑하는 것을 더 좋아하지만, 얻을 수 있는 것을 택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여러분, 이 분들의 묵상은 어떻습니까? 우리도 수행해볼 만한 것들이 아닌가요?

3. 여호와께서 주시는 잠, 여호와께서 하시는 일

오늘 말씀의 시편 기자는 우리에게 유명한 말씀을 전해 줍니다.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하나님은 왜 우리에게 잠을 주실까요? 아니, 그보다도, 하나님이 인간에게 잠을 주신다는 내용이 왜 굳이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까? 이 말씀이 유명한 까닭은 그 말씀의 깊은 의미를 알아서라기보다는 늘 잠이 부족한 현대인들에게 위로가 되는 말씀이라서 그렇죠.

127:1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지 아니하시면 세우는 자의 수고가 헛되며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지 아니하시면 파수꾼의 깨어 있음이 헛되도다  

127:2 너희가 일찍이 일어나고 늦게 누우며 수고의 떡을 먹음이 헛되도다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그의 사랑하시는 자에게는 잠을 주시는도다

오늘 말씀을 들여다 보면, 잠과 대조되는 것이 수고함입니다. 그래서 언뜻 보면 수고한 자에게 하나님이 잠으로 쉼을 주신다는 의미로 들려집니다. 물론 그런 의미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금 더 자세하게 들여다보면, 또 다른 깊은 의미가 발견됩니다. 오늘 말씀에는 단순히 수고한 자를 쉬게 하신다는 의미 이상의 의미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것은, 여호와께서 우리를 위해 일하신다는 의미입니다. 여호와께서 집을 세우시고 여호와께서 성을 지키십니다. 그리고 우리를 쉬게 하십니다. 자게 하십니다. 왜냐하면 그 때에 주님께서 일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자도 주께서 일하고 계십니다. 그래서 우리가 안심하고 잘 수 있습니다. 단순히 하나님이 우리에게, 어이고 수고 많았다, 쉬어라, 이게 아니라, 그 수고 내가 해 주마, 이런 의미라는 말입니다. 뉘앙스가 다르죠. 얼마나 안심하고 쉴 수 있습니까? 하나님이 대신 해 주고 계신데.

그런데 더욱 놀라운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게 먼저라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가 발버둥친 다음에, 그걸 메이크업해 주시는 분이 아닙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서 먼저 일하십니다. 우리의 하루는 언제 시작하나요? 아침에 눈을 뜨며 시작합니다. 하지만 원론적으로는 밤 12시부터 하루가 시작되죠. 우리가 눈 감고 있는 동안에도 하루는 이미 시작되어 있습니다. 유대 사람들은 하루가 저녁에 시작된다고 믿었습니다. 하나님께서 창조하실 때, 저녁이 되고 아침이 되는 순서로 창조를 하셨기 때문에 저녁이 아침보다 먼저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유대적인 생각으로는, 성경적인 생각으로는, 우리의 하루는 우리가 자고 있을 때 이미 시작합니다. 그 때 하나님이 일하고 계신다는 겁니다. 하루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일하시는 것으로 시작합니다. 그리고 우리가 눈을 뜨면, 우리는 하나님께서 하고 계시던 그 일의 일부를 받아서 일하는 겁니다. 이와 관련해서, 유진 피터슨 목사님이 이렇게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히브리인의 저녁/아침 순서는 우리를 은혜의 리듬에 길들인다. 우리는 잠이 들고 하나님은 그 분의 일을 시작하신다.”

이러한 패턴을 우리가 인식하게 되면,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더욱 감사해집니다. 신앙이 없다면 잠은 죽음의 예행연습일 뿐입니다. 우리가 언젠가, 의식을 영원히 잃고 세상을 떠날 일을 미리 경험하는 것입니다. 어린 아이가 처음 죽음에 대해 인식하고 잠을 자는 것을 두려워하다가 더 버티지 못하고 까무룩 잠이 드는 것처럼, 신앙이 없다면 우리는 잠을 잘 때마다, ‘아 나는 죽었구나, 나는 곧 죽는구나’, 소망 없는 잠에 빠져들겠지만, 일상 속에 하나님이 계심을 경험한 우리는 부모의 품에서 잠드는 아기처럼 편안한 마음으로 잠에 빠져들고, 하나님이 일하심을 느끼고, 아침에 일어나며 오늘도 나를 위해 이미 일을 시작하신 하나님께 감사하는 것으로 하루를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4. 다시 한 번, 우리의 하루

나머지는 그 다음입니다. 이제 그렇게 하루를 시작하고 나면, 그 날 하루가 주님이 우리를 위해 준비하신 선물로 느껴지게 됩니다. 그러면 정말로, 이를 닦으면서도 내 육체를 돌보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게 되는 것이고, 불닭을 먹으면서도 내 정신을 바짝 차리게 하시는 하나님을 묵상하게 되고, 일터에서 정신 없을 때에도, 가드닝하며 평화로울 때에도, 이 일상이 나에게는 하나님을 만나는 예배의 자리라고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매일의 일상에서 하나님께 예배하는 방법입니다. 우리를 감시하며 통제하는 하나님의 눈을 피하는 일상의 삶이 아니라, 모든 순간을 감사하게 하시고 모든 순간을 기쁨으로 은혜로 받아들이게 하시는 그 하나님과의 즐거운 동행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우리들에게는 근본적인 죄성이 있어서, 우리의 삶이 하나님 보시기에 선하지 않고, 부족하고, 더 나아가 악해 보일 때에는 하나님으로부터 피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여러분 죄 짓지 않았는데도 길에서 경찰차 보시면 움찔하시잖아요. 내 마음에 직장 동료를 향한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있을 때, 내 마음에 친구를 향한 질투가 불타 오르고 있을 때, 마음으로 행동으로 죄를 짓거나 하나님의 뜻이 아닌 것 같은 것을 행하게 될 때에, 우울함에 사로잡힐 때, 아무 생각 없이 쉬고 싶을 때, 하나님 없이 하나님을 피해 배의 맨 아래 선창에 숨기를 바라는 마음이 우리에게 있습니다. 새벽 날개치며 바다 끝으로 도망하고 싶은 마음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의 선하심을 신뢰하게 될 때, 우리를 다그치시고 괴롭게 하시고 불편하게 하시고 심판하시는 하나님에서, 그런 우리의 연약한 모습조차도 구원하시기 위해 우리 옆에서 우리에게 말을 거시고 쉬게 하시고 위로하시는 그 하나님을 신뢰하게 될 때, 우리는 하나님과의 매일 매일의 즐거운 동행을 시작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들께서도 일상에서의 예배를 시작하실 수 있게 되기를 바라고요, 이미 하고 계신 분들은 더욱 깊은 예배의 자리로 나아가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께서 함께 하시며 여러분의 일상 속에 복을 주실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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