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절뚝거림의 이야기_창세기 32:21~32
밴쿠버온누리교회 이재정 목사
[이해할 수 없는 일들]
제가 아는 분 중에 이전에 소아마비로 다리를 심하게 절뚝거리셨는데 지금은 온전히 걷게 되신 분이 있습니다. 모교회에서 교사로 함께 섬겼던 분인데 10여년 만에 우연히 신학교 앞에서 마주쳤습니다. 분명 다리를 절었었는데 편하게 걸어오셔서 어찌된 일인지 물었습니다. 그 분이 선교사가 되어 중국에서 탈북민을 위한 사역을 할 때, 몇시간씩 서서 말씀을 전하는데 어느 날 말씀을 선포하는 중에 하나님이 다리를 늘어나게 하셔서 걷게 되었다고 간증하셨습니다. 이해할 수 없는 기적이었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은 다리를 고치실 수 있는 분이십니다. 앉은뱅이를 일으키시고 저는 자를 걷게 하시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는 멀쩡한 사람 다리를 절뚝거리게 만드신 하나님의 이야기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익히 아는 이야기라 불편함이 없이 받아들여 지십니까? 만약 오늘 내 삶에 하나님이 야곱의 다리가 아니라 나의 다리를 쳐서 절뚝거리게 만드신다면 어떻게 반응 하겠습니까? 원하지도 않고, 이해하고 싶지도 않은 이야기일 것입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일들을 종종 마주합니다. 또 이해하기 싫은 일들도 많습니다. 우리의 이해의 여부는 내가 원하는 일인가 아닌가에 연결된 경우들이 많습니다. 내게 좋은 일이면 이해되고, 해가 되는 일이면 이해가 안되고 하는 것이지요.
오늘 말씀에서 마주하는 야곱이라는 사람의 인생이 그렇습니다. 야곱의 인생은 특별히 거룩해 보지이도 않으며, 딱히 자랑할 만한 업적도 없습니다. 특별한 점은 다른 믿음의 조상들에 비해 부인도 많고 자식도 많기는 합니다. 그러나 아내와 자식의 이야기들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오히려 그의 치부를 드러내고 있음을 보게 됩니다.
그는 절뚝거리는 인생을 살고 있습니다. 처음부터 그의 다리가 절뚝거리지는 않았지만 육신이 바로 걸을 수 있을 때는 그의 삶의 궤적이 절뚝거렸고, 이제 고향으로 돌아와 살만한 시간에는 그의 육체가 절뚝거리게 됩니다. 오늘 읽은 창세기32장의 얍복강에서의 사건이 야곱의 인생에 분기점이 됩니다. 그의 이름이 바뀌었고 그의 삶이 ‘변화된 것처럼’ 보입니다.
우리는 야곱이 참 친숙합니다. 인생의 우여곡절을 겪으며 또 반응하며 사는 모습이 우리와 별반 다르지 않게 보이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처럼 아들을 드리는 믿음이 있지도 않고, 이삭처럼 호인으로 보이지도 않으며, 또 요셉처럼 총리가 되는 유능한 사람이 아니기 때문일 것입니다. 또 어쩌면 우리도 야곱처럼 참 많이 절뚝거리며 걷고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절뚝거리며 걷고 있는 야곱의 인생을 통해 우리 삶과 신앙의 절뚝거림에 대한 해답도 찾아가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기울어진 인생]
야곱의 삶을 생각해 봅시다. 그는 어머니 배속에서부터 형과 싸웠습니다. 그의 이름의 뜻은 ‘형의 발꿈치를 붙잡았다.’고 해서 ‘야곱’입니다. ‘움켜 쥐는 자’가 그의 이름이 되었습니다. 또, 형을 속여 팥죽으로 장자의 권리를 사고, 어머니와 협조하여 아버지를 속이고 장자의 축복을 훔쳤습니다. 물론 부모인 이삭과 리브가의 자식들을 향한 편애가 한 몫을 했지만 그의 인생은 속고 속이는 시간의 연속이었습니다.
분노하는 에서를 피해 떠난 외삼촌 라반의 집에서의 생활도 만만치 않았습니다. 두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 재산을 모으기 위해 6년을 외삼촌 라반 밑에서 일하지만 이제 야곱은 속임을 당하는 사람으로 살았습니다. 속이는 사람이 속임 당하는 상황을 경험하게 됩니다.
육체는 건강하여 바로 걷는 것 같지만 그의 삶은 기울어져 위태로워 보입니다. 줄타는 듯 살고 있지만 언제 넘어질지 모르는 시간이며, 곁길로 가 나락으로 빠질지 모르는 삶입니다. 그런 그가 고향으로 돌아오기로 결심하고 가족들과 가축들 재산을 챙겨 길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그의 앞에는 20년 전 자신을 죽이겠다고 했던 형 에서가 기다리고 있다.
(21~23절) 21그 예물은 그에 앞서 보내고 그는 무리 가운데서 밤을 지내다가 22밤에 일어나 두 아내와 두 여종과 열한 아들을 인도하여 얍복 나루를 건널새 23그들을 인도하여 시내를 건너가게 하며 그의 소유도 건너가게 하고
형 에서가 400명을 이끌고 자신을 만나러 온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은 두려움에 휩싸이고 이제 스스로 살기위한 자구책을 마련했습니다. 하나님은 이미 32장 2절에서 하나님의 군대(마하나임)을 보내셔서 야곱을 만나게 하심으로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하나님이 함께 하심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럼에도 불안한 야곱의 행동은 불안하고 애처로워 보입니다. 에서에게 사자들을 먼저 보냅니다. 자신의 소유를 에서에게 주겠다고 자신을 종으로까지 표현하며 마음을 전합니다.(창32:3~5절) 자신의 재산과 가족들을 두 떼로 나누었습니다. 그리고 에서가 한 떼를 치면 남은 한 떼는 피하게 만들겠다는 계획을 세웁니다.(창32:7~8절)
또 에서에게 예물을 주고자 세 떼로 나누어 뇌물성 선물을 에서가 오는 길에 마주하게 배치합니다. 형의 마음을 풀어보려는 요량이었을 것입니다.
그리고 동시에 야곱은 아브라함과 이삭의 하나님께 이전의 약속을 기억하고 은혜를 베풀어 달라고 기도도 합니다. 마지막으로 모든 가족과 소유를 얍복을 건너게 하고 자신만 혼자 남게 됩니다.
기도도 하고 3~4중으로 자구책도 마련했으니 이정도면 지혜롭고 훌륭한 하나님의 사람이라 여겨져야 하는 것일까요? 아닙니다. 하나님께 기도하며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니라 불안해서 이것도 저것도 다해보는 모습입니다. 무엇이 효험이 있을지 모르니 인간적인 모든 수단을 동원하는 야곱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주고 있습니다.
양손에 들고 있는 자신의 능력치를 활용하는 카드와 나를 도우실 것 같은 하나님 카드를 다 쓰고 싶어 하는 중입니다. 양다리 걸치는 것일까요? 아니 엄밀히 말하면 야곱의 삶은 기울어져 있었습니다. 철저히 자신을 중심으로 기울어져 있었던 것입니다.
우리의 신앙이 육신은 건강하지만, 절뚝거리는 이유는 상황이 내 뜻대로 되지 않아서가 아닙니다. 내가 하나님 중심이 아닌 내 중심의 삶과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해서입니다.
“온전하지 못한 내가 내게 기울어져 나를 의지하려 하니 절뚝거릴 수 밖에 없습니다.” 신앙의 가장 큰 숙제 중에 하나는 나를 향해 기울어져 있는 저울을 버리는 일입니다. 지독한 자기중심성에서 벗어나는 것입니다.
[건넘 : 야곱에서 이스라엘로]
궁지에 몰린 야곱은 이제 홀로 남아 하나님을 독대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의 삶의 자리가 전환 되지요, 그 것을 확인해 주는 단어가 ‘건넘’입니다.
성경에는 많은 건넘의 이야기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집트의 노예의 신분에서 하나님의 백성으로 신분의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요단강을 건넌 여호수아와 광야를 통과한 백성들은 그들의 삶의 방식에 변화가 있었습니다. 광야에서 살던 삶의 방식에서 가나안의 방식으로 바뀌어야 했지요. 이제 얍복강 나루의 야곱 또한 건너려 하는 중입니다. 그러나 그 건넘이 순탄해 보이지 않습니다. 야곱은 자신의 가족들과 소유가 강을 건너는 어려운 일을 밤시간에 진행하고 있습니다. 상식적이지 않은 방법을 택한 것으로 보아 야곱의 심경이 몹시 복잡했던지, 여러 계산 중에도 혼란스러워 판단이 흐려진 것처럼 보입니다. 결국 그는 불안함에 홀로 남게 됩니다.
(24절) 야곱은 홀로 남았더니 어떤 사람이 날이 새도록 야곱과 씨름하다가
이 홀로 남았다는 문장은 히브리 문법을 고려해 해석하면 “스스로 홀로 남겨지게 했다.”라고 직역할 수 있습니다. 야곱의 의도적인 행동으로 보이는 대목입니다. 모든 것으로부터 분리되어 혼자 남았습니다. 사랑하는 아내 라헬도, 덜 사랑하는 아내 레아도 아끼는 자식들도 열심히 벌어 모은 재산도 모든 것을 건너 보내고 혼자 남았습니다.
야곱이 지팡이만 들고 홀로 집을 떠났던 광야 벧엘에서처럼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습니다. 그 때 하나님이 야곱에게 찾아오셨습니다.
하나님의 음성은 개별적일 때가 많습니다. 홀로 있을 때 들립니다. 하나님은 우리를 독대하기를 원하십니다. 나는 어떻게 하나님을 독대 합니까? 헨리 나우엔은 「영적 발돋움」이라는 책에서 외로움과 고독을 구분합니다. “외로움은 원하지 않게 남겨진 것이고, 고독은 마음의 고독한 상태로 의지적으로 그분 앞에 나아감을 이야기 합니다.” 우리의 외로움이 하나님 앞에 서는 고독의 시간이 되기를 바란다. 우리의 고독이 하나님 앞에 나아가는 영적 발돋움이 되기를 소망한다.
이제 고독한 야곱과 하나님의 사자와의 씨름이 시작 되었습니다. 히브리어로 씨름은 아바크(אָבַק) 입니다. 구약성경전체에서 이 곳에서만 사용된 단어 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은 언어적 유희를 즐겨 사용하는데 야곱이 얍복에서 씨름(아바크)하고 있습니다. 움켜쥐는 자인 야코프가 야보크에서 아바크 (하나님을 붙드는 씨름을) 하고 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 씨름은 날이 새도록 계속되었습니다. 밤새 싸울 수 있는 사람은 없다. 격투기 경기도 시간이 정해져 있다. 밤을 새도록 싸웠다는 말은 많은 의미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기도도 밤새워 하는 것이 쉽지 않습니다. 요즘 철야 기도는 밤을 새는 것이 아니라 늦은 시간까지 하는 기도를 부르는 말이 되었습니다.
야곱은 지금 신적인 존재를 붙잡고 씨름하고 있습니다. 밤이 새도록… 어쩌면 죽음을 각오한 싸움을 하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런데 그 신적인 존재가 야곱을 이기지 못합니다. 다시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과의 씨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 사람을 이기지 못하시는 하나님? 이 신을 믿어도 되는 것일까요?
야곱의 입장에서는 간절한 씨름이었습니다. 여기서 살 방법을 찾지 못하면 에서에게 죽을 것이 분명했습니다. 야곱의 간절함이 들여다 보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대할 때 야곱과 같은 이런 간절함이 있습니까? 그냥 저냥 사는 것에 익숙해져서 하나님에 대한 필요를 느끼지 못한 채로 살고 있지는 않습니까? 야곱의 상황을 우리 삶에 그대로 투영시킬 수는 없지만 “하나님의 사람은 하나님을 붙드는 간절함으로 산다.”는 것을 기억합시다.
그런데, 관점을 야곱이 아닌 하나님으로 바꾸어 보면 하나님의 입장에서는 사랑의 붙드심 이었습니다. 하나님은 야곱과 싸워서 이기려고 그를 찾아오신 것이 아니었습니다. 야곱의 상황 속에 함께 하시며 그와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고, 씨름하며 땀 흘리시며 야곱의 허리띠를 붙들고 계시는 중입니다. 밤이 새도록 야곱과 함께… 하나님이 야곱과 함께 있는 그 밤을 상상해봅시다. 야곱이 하나님을 놓지 않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도 야곱을 붙들고 계셨습니다.
야곱이 하나님을 놓지 않자 허벅지 관절을 치셨습니다. 그럼에도 야곱이 축복을 요구하자 이제 하나님은 야곱에게 져주시는 방법을 선택하십니다. 그리고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야곱의 이름을 물어 보신다.
(27~28절) 27그 사람이 그에게 이르되 네 이름이 무엇이냐 그가 이르되 야곱이니이다 28그가 이르되 네 이름을 다시는 야곱이라 부를 것이 아니요 이스라엘이라 부를 것이니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니라
하나님이 야곱의 이름을 몰라서 물어 보셨을까요? 지금 이름도 모르는 사람과 밤새 씨름하고 계신 것입니까? 아닙니다. 하나님은 그의 이름처럼 삶을 움켜쥐고 살아왔던 그의 시간들에 대해 묻고 계신 것입니다. 가족과 소유만 ‘얍복’을 건널 것이 아니라 이제 야곱의 인생도 새로운 건넘을 통해 복의 자리로 나아가기를 요구하고 계십니다.
야곱의 이름을 묻는 것은 그의 존재에 대안 회고를 요구하는 것이며, ‘야곱 입니다.’ 라는 대답에는 하나님 앞에 전 존재를 거꾸러뜨리는 회개가 담겨있습다. 이제 하나님은 야곱의 이름을 ‘이스라엘’이라고 바꾸십니다. 성경은 이스라엘이라는 이름을 “이는 네가 하나님과 및 사람들과 겨루어 이겼음이라”고 풀어주지만 히브리 말을 쪼개 보면 ‘이쓰라(יִשְׂרָ=싸울 것이다)+엘(אֵל=하나님)’입니다. 이는 야곱이 하나님과 싸워서 이겼다는 의미보다 이제 하나님이 그를 축복하셔서 ‘하나님이 그를 위해 싸우실 것이다.’라는 의미로 해석되어 집니다.
이제 야곱이 해결하지 못한 인생의 문제들을 위해 하나님이 싸워 주실 것입니다. 속고 속아 깨어지고 갈라진 관계의 문제들에 하나님이 개입하셔서 하나님이 더불어 함께 싸워주시는 인생을 살아가게 될 것입니다.
우리는 이 건넘의 이야기를 어떻게 써가고 있습니까? 내가 하나님과 씨름하여 이겼다고 생각합니까? 아니면 하나님이 오늘도 내게 져 주시려고 나를 붙들고 계심을 인정하고 있습니까? 야곱과 같은 나의 존재를 하나님 앞에 쏟아 회개합시다. 그리고 내 안에 발버둥치는 고통과 외로움이 주님 앞에 고독이 되어 주께로 건너갑시다. 하나님을 독대하며 그분을 붙들고 날마다 내게 져 주시며 또 나를 위해 싸우시는 하나님께로 나를 내어드리는 은혜가 있기를 소망합니다.
[다시 절뚝거리지만]
그런데, 오늘 말씀의 문제는 야곱이 이스라엘이라는 이름도 얻었지만 이제 다리를 절뚝거리는 장애인이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29~31절) 29야곱이 청하여 이르되 당신의 이름을 알려주소서 그 사람이 이르되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하고 거기서 야곱에게 축복한지라 30그러므로 야곱이 그 곳 이름을 브니엘이라 하였으니 그가 이르기를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으나 내 생명이 보전되었다 함이더라 31그가 브니엘을 지날 때에 해가 돋았고 그의 허벅다리로 말미암아 절었더라
하나님을 그냥 보내 드릴 야곱이 아닙니다. 자신의 이름을 바꾸어 주신 하나님의 사람에게 기어이 이름을 묻습니다. 하나님을 못 알아봐서 묻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요청이 응답 받기 위해 재차 물어야만 했던 그의 성격일 수도 있겠다 생각 됩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가르쳐주는 대신 그 자리에서 야곱을 축복하십니다.
이 축복은 이름을 바꾸는 사건이었지만 결국 야곱의 전존재를 새롭게 하시는 은혜로 야곱에게 부어졌습니다. 남의 발꿈치를 잡는 자가 하나님과 겨루고 사람들과 겨루어 이긴 자로 바뀌었습니다. 속이고 속는 비참한 인생을 살아왔던 사람이 하나님을 바라보고 예배하는 삶으로 새롭게 되었습니다. 두려워하며 살길을 궁리하던 인생이 하나님의 인도함을 따라 당당하게 살아갈 수 있는 인생으로 변화되었습니다.
우리는 축복을 요구하지만 하나님은 우리를 사랑으로 붙드셔서 우리의 존재를 만지시며, 우리를 다르게 부르심을 통해 내 삶의 존재가 변하고 인식이 바뀌는 복을 허락해 주십니다. 그 존재의 변화 위에 더해지는 복이 하나님과 동행하며 하나님을 누리는 축복입니다.
그런데, 동이 트고 하나님을 대면했던 브니엘을 지나가는 야곱의 걸음이 편하지 만은 않아 보입니다. 왜냐하면 부러진 허벅지 뼈로 인해 다리를 절고 있기 때문입니다. 뼈가 부러졌으니 통증도 심할 것이고, 밤새 씨름 했으니 힘도 빠졌습니다. 온전하게 걷는 것 자체가 이상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육체는 절뚝거리지만 그의 삶은 이제 바로 걷기 시작합니다. 옳은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습니다. 더 이상 기울어진 채로 곁길로 흘러가지 않을 것입니다. 다리를 절뚝거리며 삶의 문제들을 만날 때마다 이제 자신의 힘으로 버티고 싸우지 않고 내 삶을 변화시키신 하나님 앞에 언제든지 무릎 꿇고 엎드릴 준비가 되었습니다.
하지만 창세기에 기록된 야곱의 이후의 인생을 읽다 보면 의구심이 생깁니다. 야곱! 이 사람이 이스라엘로 잘 살고 있는 것이 맞는가? 사실 야곱의 33장 이후의 인생을 보아도 그의 약함과 절뚝거림의 시간이 끝난 것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형 ‘에서’와는 화해를 이루었고 가족과 재산들은 보존되었지만 그는 인생은 여전히 절뚝거립니다.
딸 ‘디나’가 강간 당하는 사건으로 인해 분노하는 아들들 앞에서 여전히 자신의 안전과 실리를 찾는 성격 때문에 자식들과 불화가 드러납니다. (34장) 그의 편애로 인해 자식들과 또 자식들 사이의 갈들이 끊이지 않았습니다. 장자인 르우벤은 야곱의 첩과 통간하는 어처구니없는 일이 일어나고, 여전히 가족 중에 이방신을 섬기는 사람들을 제어하지 못했으며, 하나님과 처음 맺었던 벧엘에서의 약속도 온전히 지키지 못함을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의 절뚝거림에도 불구하고 얍복 나루에서 이스라엘을 붙드셨던 하나님은 여전히 신실하셔서 야곱 절뚝거리는 야곱과 동행하여 주시며 그의 삶을 통해 하나님의 뜻을 이루어 가십니다. 우리는 넘어지고 쓰러지지만 하나님은 신실하십니다. 우리의 실수에도 하나님은 약속을 지키시고 또 긍휼히 여기셔서 우리에게 다시 하나님을 예배할 수 있는 기회들을 허락하십니다.
예수 믿고 구원받아 이제 세상과 다르게 살겠다고 주를 향해 나아가고 있는 우리의 모습에도 여전히 절뚝거림이 있습니다. 이전처럼 완전히 다른 길로 가지는 않고, ‘나만, 나만’ 하던 자기중심성에서는 조금은 벗어나 보일지는 모르지만 여전히 내 걸음을 온전하다고 말하기에는 민망할 때가 많습니다.
그런데 이제 우리의 절뚝거림은 내가 하나님을 놓치지 않았음의 증거이고, 하나님이 나를 붙들고 계시다는 증거가 됩니다. 내 삶의 상처나 실수의 흔적이 아니고 주님이 나를 살리신 주님 손에 못자국으로 내 삶에 그리스도의 흔적 (스티그마)으로 남아 확인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이 된 야곱에게 뿐만 아니라 그의 후손들인 이스라엘 에게도 동일한 은혜로 함께 하십니다.
(사41:14) 버러지 같은 너 야곱아, 너희 이스라엘 사람들아 두려워하지 말라 나 여호와가 말하노니 내가 너를 도울 것이라 네 구속자는 이스라엘의 거룩한 이이니라
[아름다운 동행]
여전히 우리는 애쓰고 수고하며 때로는 절뚝거리며 어려운 시간들을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냥 살다 보면 살아지는 그런 삶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의미 없이 살아도 될 만큼 그렇게 무기력하게 우리의 삶을 만들지도 우리를 내버려 두지 않으시는 분입니다.
더 깊이 주님을 찾고 더 간절히 하나님 앞에 머무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하나님과 싸워 이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냥 하나님을 붙들고 놓지 않는 것 이것이 세상에서 승리하는 비결입니다. 하나님을 붙드는 믿음이 모든 것을 이깁니다. 그렇게 내가 하나님을 붙들어야 하나님이 여전히 나를 붙들고 계심을 확인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붙드는 것, 하나님께 붙들리는 것이 신앙입니다. 그렇게 우리는 하나님과 연결되어 승리합니다.
붙잡읍시다. 굳게 붙잡읍시다. 놓지 맙시다. 우리가 순종하는 방법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의 방법도 하나님을 놓지 않는 것입니다. 때론 절뚝거리고 위아래로 출렁일지 모르지만 하나님이 나를 꽉 붙들고 나를 주님께로 쭉 끌어 올려 주실 것입니다.
야곱에서 이스라엘이 된 그의 이름에는 자신의 수치와 상처 그리고 하나님의 영광이 공존합니다. 그의 상처는 절뚝거림 이었지만 그의 영광은 하나님과의 동행이 되었습니다.
이미 나는 절뚝거리고, 여전히 나는 절고 있어 절망하십니까? 이제 매일 절뚝거리는 자신을 확인하는 일은 내가 혼자서는 온전히 걸을 수 없어 하나님이 함께 걸어 주셔야 함을 고백하는 이유가 되기를 바랍니다. 그 절뚝거림 때문에 주님 앞에 날마다 더 편하게 엎드리는 은혜를 마주하는 삶이 되기를 소망합니다. 때로 그리고 비록 절뚝거릴지라도 주님과의 동행이 멈추지 않는 모든 믿음의 사람들이 되기를 축복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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