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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자기규정을 넘어서도록 도와주신다.”(수 2:15-24)_하늘향한교회 신윤희 목사

“자기규정을 넘어서도록 도와주신다.”(수 2:15-24)

하늘향한교회 신윤희 목사

1863년 1월 1일에 미국의 링컨 대통령은 노예해방 선언서에 서명을 했다. 이제는 노예는 더 이상 노예가 아니다. 얼마나 행복한 순간인가. 진정한 자유가 찾아온 것이다. 인간 이하로 취급받고 온갖 저급하고 하등한 존재로 대우받는 것으로 자기를 규정해 왔던 사람들에게 과거를 청산할 수 있을 최고의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노예로 있던 사람들은 자유를 찾아 떠나기보다 예전처럼 노예로 살아가는 길을 선택한 사람이 많았다.  

그토록 간구하던 자유가 주어졌는데도 그들은 왜 자유를 택하지 않았을까? 자신을 ‘무뚝뚝한 사람이다’라고 자기규정을 하면 정말 가족들에게 친절을 베풀기 보다는 무뚝뚝한 사람으로 대하게 된다. 가족에게 친절하게 대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자신을 ‘무뚝뚝한 사람’으로 자기규정을 했기 때문이란다.   

인간의 존엄성과 자유보다는 현재 삶 속에서의 편안이 더 중요했기 때문일 것이다. 출애굽하여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들이 다시금 애굽땅에 노예로 있었던 그 날들이 더 좋았다고 하는 것과 일맥상통한다. 여러분은 여러분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가? 사실 자기규정을 하는 것은 너무나도 중요하다. 바쁘고 정신없다는 핑계로 자기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을 거의 갖지 않고 있는 사람들이 많다. 아니 다른 것에 정신 팔리게 하여서 자신을 바라보지 못하게 하는 악한 사단의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리처드 버크민스터 풀러(Richard Buckminster Fuller)는 “애벌레 속에는 훗날 그것이 나비가 될 거라고 말해줄 수 있는 그 무엇도 들어 있지 않다.”고 했다. 우리가 시너지라는 말을 많이 쓰는데 그 말을 만든 사람이 바로 풀러이다. 건축가이기도 하고 발명가이기도 한 풀러는 25개의 미국특허, 28권의 저서, 47개의 명예박사학위, 수십개의 건축 및 디자인상 수상을 한 그의 시선으로 볼 때에도 애벌레의 흉측한 모양새에서 어찌 나비를 상상하는 것이 쉽겠느냐고 하는 말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나비를 상상헤야 한다는 뜻이기도 하다. 

오늘 그런 애벌레의 흉측할 수 있었던 현재를 살아가는 라합에게서 우리는 나비로 자기를 규정하고 있는 한 여인을 볼 수 있다. 그 여인이 바로 라합이다. 라합은 나중에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는 여인이 된다. 여리고 기생이었던 라합은 나비가 되리라고는 전혀 생각할 수 없었던 애벌레로 자신을 규정하였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라합이 나비를 꿈꿀 수 있었던 것은 하나님을 알게 되면서부터 였다. 여호수아 2장의 본문을 통해서 보면 라합은 하나님이 계신 자기규정과 하나님이 없을 때의 자기규정이 완전히 달라졌음을 보게 되었다. 여러분은 자신을 어떻게 보는가. 

지난 10월에 우리교회 Junior들과 Youth들과 함께 Pottery에 갔었다. 사실 그 pottery에 가서 내가 제일 신났다. 예약된 한 자리가 비어서 토기를 빚는 그 자리에 실제로 참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토기장이라고 하면서도 토기가 빚어지는 것은 영상으로만 본적만 었지 실제로 진흙을 만지면서 모양을 만든다는 것에 흥분과 긴장이 되었다. 특히 물레를 돌리면서 나의 손의 모양에 따라 토기의 모양도 달라지는 것을 보니 하나님은 토기장이요, 우리는 진흙이라는 말이 실감이 되었다.

10월초에 다녀왔는데 거의 한달간 기다렸다가 2번 구워 낸 그릇을 받을 수 있었다. 그냥 흙이었던 그릇이 완전히 다른 모습으로 내 손에 들어오게 되니 감격스럽기까지 했다. 밥그릇 하나와 접시 하나씩 만들었다. 그 중에 이 접시는 나중에 교회에서 다시 모이게 될 때, 성찬용 빵을 올려놓으려고 계획하고 있다. 사실 납작하고 별 볼품 없을 수도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가장 안성맞춤으로 되어 있다. 빵의 크기에도 맞고 너무 높지 않아서 빵을 떼어놓기에도 좋다. 특히 현재 성찬 포도주 컵의 색이 약간 푸른 바탕인데, 이 번에 만들어진 접시의 색도 푸른 바탕이라서 잘 어울린다.

내가 보기에는 가장 적합하고 유용하게 사용할 접시가 되었다. 그런데 그 접시가 “자기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라고 하면서 버티면 어떻게 되겠는가. 자기 신세 한탄만 한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자신을 보면서 “나는 왜 이렇게 납작한가. 왜 이렇게 볼품없는 꼴로 만들어 졌는가. 자기를 좋아할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 내가 뭐란 말인가.”라고 하면서 쓸모 없다고만 생각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라합도 사실 자신을 하찮게만 생각했다면 어쩔 뻔 했는가. 하나님을 만나지 못했다면 어떤 삶을 살았겠는가. 마태복음 1장 5절에 “살몬은 라합에게서 보아스를 낳고 보아스는 룻에게서 오벳을 낳고 오벳은 이새를 낳고 이새는 다윗왕을 낳으니라” 룻의 남편이 된 보아스를 낳은 여인이 바로 라합이다. 소름 돋는 장면이지 않은가. 라합이 하나님을 만나 자기규정이 바뀌지 않았다면 어떻게 그 족보가 바뀌었을까. 

사람들은 판단한다. 사람들은 상대방을 잠깐 보면서 머리부터 발끝까지 스캔한다. 그리고 대부분은 제대로 식별해 낸다. 머리모양, 얼굴 형태, 몸짓, 옷매무새, 벨트, 걸음걸이 등을 통해 단시간내에 상대에 대해 평가하고 판단하기 시작한다. 이런 말이 조심스럽지만, 가격이 매겨지는 것이다. 딱 보면 안다. 상대할 만한 사람인가. 상대해서 나에게 도움이 될 사람인가 아닌가를 단박에 파악한다. 그리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다면 장벽을 세우고 차단을 하기 시작한다. 나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것 같은 사람은 아예 존재자체를 잊는다. 아니 기억하지 않는다. 

우리집 차고문(가라지) 리모콘을 분실해서 그것을 사러 홈디포에 갔었다. 굉장히 넓어서 어디에 있는 지 몰라 staff에게 물어봤더니 30번 열에 가면 찾을 수 있을 것이라고 했다. 그런데 30번 열에 가서 둘러보아도 안보이는 것이었다. 그래서 못 찾고 돌아다니다 보니 건축일을 하시는 것으로 보이는 2분을 보았다. 한마디로 단 1초만에 스캔을 한 것이다. 스틸토우 부츠를 신으셨고 대화를 나누시는데 한국말로 건축자재를 사려고 의논을 하시는 것이다. 업자와 일반인하고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홈디포에 자주 오시는 분이니 나보다는 당연히 많이 아실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반갑게 한국말로 내가 가라지 오프너를 찾고 있는데 잘 못 찾겠다고 말씀드렸다. 그랬더니 순간 그 두 분도 나를 단 몇 초에 파악하시려 하는 것을 느꼈다. 말하지 않아도 안다. 그런데 그 이후에 두 분의 태도가 분명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그 중에 한 분은 나보다 먼저 그것을 찾아 주시려고 직원에게 직접 가서 물어보시고 직접 30번 열로 가서 막 찾아 주시는 것이었다. 결국에는 가라지 오프너를 찾을 수 있었다. 그런데 다른 한 분은 자신의 시간도 바쁜데 괜히 골치 아프고 귀찮게 질문하는 내가 못마땅하신 것 같았다. 

자신의 일처럼 열심으로 찾아 주신 분이 너무 감사했다. 내가 앞으로 건축할 일이 있을 지 모르겠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이 분에게 일을 맡기고 싶었다. 그래서  “어느 건축회사인가요?”했더니 역시나 지갑에서 명암을 꺼내 주시면서 ‘OO건축’이라고 하시는 것이었다. 사람 보는 눈이 있다. 그렇게 도움주시고는 총총히 사라지셨다. 

이 분을 보면서 라합이 생각났다. 라합은 사람을 도와줄 때는 어디까지 도와주어야 하는 지를 알았다. 오늘 본문 16절을 보자. “라합이 그들에게 이르되 두렵건대 뒤쫓는 사람들이 너희와 마주칠까 하노니 너희는 산으로 가서 거기서 사흘 동안 숨어 있다가 뒤쫓는 자들이 돌아간 후에 너희의 길을 갈지니라”고 말한다. 

라합은 정탐꾼들이 어떻게 해야 탈출할 수 있을 지에 대한 주도면밀한 방법을 제시하고 있다. 대충 알아서 도망가라고 하지 않았다. 방향과 방법을 제시해 주었다. 라합은 그냥 사람들이 보면은 하챦은 인생을 살고 있는 천대받았던 한 여인이었지만 또한 비범한 지혜가 있었음을 보여준다. 신학자 랑게는 라합은 그들을 동굴이 많았던 북쪽 산악 지대로 피신시켰을 것으로 본다. 또한 다른 학자는 서쪽에 위치한 바위가 많고 450m 정도의 산 속에 숨겨 초저녁으로부터 그늘이 지므로 정탐꾼이 숨기에 좋은 곳을 안내했을 것이라고 한다.

왜 삼 일이었을까? 성경에서 삼일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끌어와서 설명할 수 있겠지만, 본문만으로 볼 때 뒤쫓는 자들이 포기하고 돌아갈 시간을 삼 일로 잡은 것이다. 오늘 본문 22절에서 “그들이 가서 산에 이르러 뒤쫓는 자들이 돌아가기까지 사흘을 거기 머물매 뒤쫓는 자들이 그들을 길에서 두루 찾다가 찾지 못하니라”고 말씀하신다. 3일이 어떻게 쓰일 수 있는 지를 제대로 본 사람이 바로 라합이었기에 가능한 판단이었던 것이다. 라합은 이스라엘 백성들에 대한 여리고 왕의 두려움이 어떠했는지 알고 있었다. 사실 여리고 성에서 요단 강까지는 불과 13Km이니 도보로 3시간 정도 소요된다. 그 길목을 무려 삼 일에 거쳐 샅샅이 뒤졌다는 사실은 어떻게 해서든지 정탐군들을 체포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는 뜻이다. 

라합이 13절에 요청한 것처럼 이제는 정탐꾼들이 약속을 할 차례이다. 그런데 사실 그 당시에 남성들은 여성들과 약속을 하지 않았다. 여성과는 약속도 하지 않을뿐더러 약속한 것에 대해서 그 약속을 지킨다는 것을 기대할 수 없었다. 그런데 정탐꾼이 한 이 약속을 어떻게 기대하며 믿을 수 있었을까. 정말 그리고 그 징표대로 약속을 지킬 것인가에 대해서도 확신을 어떻게 할 수 있었겠는가.

오늘 본문 18절에 “우리가 이 땅에 들어올 때에 우리를 달아 내린 창문에 이 붉은 줄을 매고 네 부모와 형제와 네 아버지의 가족을 다 네 집에 모으라”고 말한다. 그리고 21절에 “라합이 이르되 너희의 말대로 할 것이라 하고 그들을 보내어 가게 하고 붉은 줄을 창문에 매니라” 라합은 바로 실천하는 여인이었다. 뒤로 미루지 않고 바로 행동하였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처럼 라합도 붉은 줄에 대해서 이해하였는지는 모른다. 우리가 이해하는 것은 라합의 집과 권속을 구원하게 될 이 붉은 줄 표지는 출애굽 직전에 이스라엘 백성들이 문설주에다 뿌린 어린 양의 붉은 피와 맥락을 같이 한다. (출 12:7 “그 피를 양을 먹을 집 좌우 문설주와 인방에 바르고”) 그 이후로 라합의 집은 피난처였다. 라합과 그녀의 모든 가족이 반드시 그 집안에 있어야 한다. 여기서 피난처였던 라합의 집은 예수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에 비유될 수 있다. 즉 기생 라합의 집 외에는 구원이 없었듯이, 예수 그리스도 외에는 천하에 구원을 얻을 만한 다른 이름은 없는 것이다.

신대원에 다니면서 서울에 있는 금호교회에서 청년부를 맡아 사역할 때에 오늘 이 본문으로 설교한 적이 있었다. 그 때 청년들에게 이렇게 물었었다. “정탐꾼들이 돌아가고, 붉은 줄을 내린 집에서 라합이 무엇을 하였겠는가?” 오늘 여러 분들에게도 똑같이 묻고 싶다. 라합은 정탐꾼이 다녀간 후에 과연 여리고 성이 점령당할 때까지 과연 무엇을 하였을까?

선하신 하나님을 알아갔으며, 자신이 어떤 존재인지 생각했고, 이전까지의 자신을 규정했던 Identity를 넘어서서 하나님의 자녀라고 하는 Identity를 새롭게 부여받는 기회였다. 그리고 붉은 줄이 있는 곳에 생명이 있음을 알아 자기규정을 붉은 피로 말미암은 구원의 소망을 경험하였을 것이다. 정탐군들은 자신들의 생명을 구하고 또한 라합의 권속을 구하게 될 그 붉은 줄에 특별한 생명적 의미를 부여했다. 성경 전체를 통하여 붉은 색은 성결케 하는 그리스도의 피와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그렇기에 라합은 마음이 바빴을 것이다. 이 집에 들어온 자들은 구원을 받을 수 있으니 소위 전도하기 시작했을 것이다. 자신의 집으로 그들을 모아야 했다. 사랑하는 가족들에게 이야기를 전했을 것이다. 오늘 본문 19절과 20절에 “누구든지 네 집 문을 나가서 거리로 가면 그의 피가 그의 머리로 돌아갈 것이요 우리는 허물이 없으리라 그러나 누구든지 너와 함께 집에 있는 자에게 손을 대면 그의 피는 우리의 머리로 돌아오려니와 네가 우리의 이 일을 누설하면 네가 우리에게 서약하게 한 맹세에 대하여 우리에게 허물이 없으리라”는 말씀처럼 라합의 집으로 모아야 했고, 이 이야기가 잘못 새어 나가지 않도록 해야 한다. 

그런데 이 부분에서도 라합은 전도에 성공했다. 이렇게 말하는 근거 구절은 여호수아 6장 25절에 “여호수아가 기생 라합과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렸으므로 그가 오늘까지 이스라엘 중에 거주하였으니 이는 여호수아가 여리고를 정탐하려고 보낸 사람들을 숨겼음이었더라” 그렇다. 기생 라합은 그의 아버지의 가족과 그에게 속한 모든 것을 살리게 된다. 라합의 변화는 결국에는 예수님의 족보에 있는 살몬과 결혼이 가능한 여인이 된 것이다.

어제 아침부터 목이 따금거려서 인후염 약을 찾았다. 캡슐에 들어있어서 그냥 2알이 삼켰다. 그런데도 오후까지 별 차도가 없었다. 저녁에도 약을 먹어도 별 차도가 없어서 왜 그런가 했다. 그런데 다시 약봉투에 있는 설명서를 읽는데 깜짝 놀랐다. 캡슐을 열어서 가루를 미지근한 물에 타서 조금씩 목에 닿게 해서 넘겨야 했던 것이다. 캡슐은 그냥 삼켜야 한다는 것으로만 생각했는데, 그렇게 자기규정한 대로 자기 생각대로 살면 약효가 하나도 없는 것이다. 내가 다 해봤다고 하면 안된다. 그것은 제대로 안한 것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해봐도 안된다고 하면 안된다. 말씀을 제대로 읽어서 그대로 해야 약효가 있는 것이다.  라합으로 부터 특히 이 점을 배워야 한다. 

오늘 우리 자신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를 살펴보길 바란다. 하나님은 주변의 사람들이 자신을 규정한 것에 머무르지 않길 원하신다. 하나님을 계시하시면서 하나님을 보라고 하신다. 하나님을 본 자는 자기 규정이 달라진다. 제한된 자기 규정을 넘어설 수 있는 힘을 주신다. 인간들의 평가로만 자기를 규정하지 않게 하신다. 오늘이라고 하는 이 날에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자기규정을 통해 하나님께서 사용하시는 귀한 크리스챤으로 바뀌어 가는 저와 여러분 되기를 축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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