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도피성, 기댈 곳이 필요한 시대를 위하여_민수기35장9~15절
밴쿠버드웰교회 (노경익 목사)
인생은 컴퓨터 게임이 아닙니다. 실패했다고 해서 전원을 껐다 켜며 다시 부팅(Booting)을 할 수 없습니다. 지나간 시간과 엎질러진 물은 주워 담을 수 없기에, 때론 산다는 것이 참 잔인하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최근 지하철에서 한 취객이 행패를 부리는 영상을 본 적이 있습니다. 경찰의 통제조차 통하지 않을 만큼 크게 화가 나 있던 그를 멈춰 세운 것은, 지나가던 한 청년의 ‘포옹’이었습니다. 청년이 다가가 그 아저씨를 꽉 끌어안자, 놀랍게도 그가 진정하기 시작했습니다. 술을 마시고 행패를 부린 행동을 정당화할 수는 없습니다. 안아주는 것만이 모든 문제의 해결책이라는 뜻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람은 누구나 방식은 다를지언정, 자기 내면의 응어리진 것들을 안전하게 끄집어낼 수 있도록 도와줄 ‘누군가’를 절실히 필요로 한다는 사실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오늘 민수기 35장은 이스라엘 백성이 가나안 땅에 들어갔을 때 만들어야 할 ‘도피성(City of Refuge)’에 관한 법을 다룹니다. 도피성은 부지중에, 즉 의도치 않게 실수로 살인을 저지른 사람들이 피할 수 있는 장소였습니다. 성경은 산에서 도끼질을 하다가 도끼날이 빠져 옆에 있던 동료를 죽게 만든 경우를 예로 듭니다. 그러나 고의로 연장을 들고 사람을 해친 자는 이 성의 보호를 받을 수 없었습니다. 도피성은 끔찍한 실수로 누군가를 죽게 만든 이들을 위해 마련된 하나님의 은혜로운 제도였습니다. 하나님께서 이러한 법을 세우셨다는 사실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다행스럽고 큰 위로가 됩니다. 우리는 이 도피성을 통해 삶의 중요한 원리들을 발견하게 됩니다.
단 한 번의 실수로 인생 전체가 평가될 수는 없습니다
이스라엘에는 요단강을 중심으로 동편과 서편에 각각 3곳씩, 총 6개의 도피성이 있었습니다. 이 성들은 전국 어디에서든지 30km 이내에 위치해 있어 누구나 쉽게 도달할 수 있었습니다. 세상 어느 곳에서든, 누구에게든 뜻하지 않은 실수와 비극이 일어날 수 있음을 하나님께서 아셨기 때문입니다.
처음부터 실패를 기대하며 어떤 일을 시작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살다 보면 예상치 못한 한계를 만나고 관계의 갈등과 실수가 찾아옵니다. 무심코 내뱉은 한 마디에 사춘기 자녀가 마음의 문을 닫아버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한 번의 실수로 가족을 어려움에 빠뜨릴 줄 누가 알았겠습니까. 과실치사는 그런 실수의 가장 극단적 상황입니다. 도피성은 바로 이런 연약한 우리를 위해 존재합니다. 실수하지 않는 인생은 없기 때문입니다.
최근 서점가에서 『다크 심리학』이 인기를 끄는 현상은 꽤 씁쓸한 시사점을 던져줍니다. 이는 세상의 위협으로부터 나를 지키기 위해, 타인의 속내를 미리 간파하고 겹겹이 방어막을 치려는 현대인들의 애처로운 생존 전략입니다. 『퓨처 셀프』와 같은 자기계발서의 유행이나 소셜 미디어에 넘쳐나는 과시적 소비 트렌드 역시 그 본질은 같습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상은 끊임없이 ‘쓸모 있는 나’, ‘미래 가치가 높은 나’, ‘성공한 나’를 스스로 증명(Branding)해내야만 비로소 환대받는 ‘조건적 생존 사회’가 되어버렸습니다. 존재 자체로 용납받지 못하고 자신의 가치를 끝없이 입증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이 시대의 비극을 고스란히 보여줍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상처받지 않으려 방어막을 치고 결국 자신을 지켜내기 위한 무기를 장착해야 합니다.
가끔 이런 세상을 살아가다보면 덩그러니 버려진 것 같은 비참함을 느낄 때가 있지 않습니까? 사실 우리는, 있는 그대로의 나를 받아줄 누군가를 간절히 찾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피치못할 실수나 연약함으로 우리의 삶 전체가 평가되고 결정되기를 원치 않으십니다.
절망의 끝에서 우리를 기다리시는 영원한 피난처
하나님은 우리를 위해 피할 곳을 준비하고 계십니다. 성경에 나오는 ‘삭개오’를 보십시오. 로마에 세금 징수업자로 고용되어 동족의 고혈을 짜내던 세리 삭개오는 죄인이라는 낙인이 찍힌 사람이었습니다. 돈만 많으면 다 될 줄 알았겠지만, 세상의 차가운 비난에 익숙해지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는 자신의 삶을 후회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그가 예수님을 보기 위해 돌무화과나무 위로 올라갔을 때, 주님은 그 나무 아래 서서 삭개오의 이름을 부르셨고 그의 집에 들어가 함께하셨습니다. 세상의 비난을 온몸으로 막아서시며, 예수님이 친히 삭개오의 도피성이 되어주신 것입니다. 도피성은 다시 살아갈 용기와 힘을 주는 곳입니다. 완벽하게 준비되었을 때 찾아가는 곳이 아니라, 망가진 모습 그대로 달려가 배우자에게도, 가장 친한 친구에게조차 말할 수 없는 아픔을 쏟아낼 수 있는 곳입니다.
여호수아 20장 4절을 보면, 숨이 턱 끝까지 차올라 성문 앞에 다다른 도망자를 향해 장로들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정죄하고 쫓아내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이야기를 가만히 들어주고, 받아들여 살 곳을 마련해 주는 것이었습니다. 도피성의 존재 자체만으로도 사람들은 “내게 피할 곳이 있다”는 안도감과 희망을 얻습니다. 분노에 가득 찬 유족들은 죽음이 실수였는지 고의였는지 따지지 않고 달려들었을 것입니다. 부부싸움만 해봐도 처음의 문제는 사라지고 서로의 태도와 말투로 불이 번지듯, 인간은 미움과 분노를 절제하기 힘든 존재입니다. 이 도피성이 없었다면 도망자들은 광야에서 비참하게 죽임을 당했을 것입니다.
이 대목에서 레위기 16장의 ‘아사셀의 염소(Scapegoat)’가 떠오릅니다. 속죄의 양만을 떠올리기 쉽지만 광야로 버려지는 염소가 있었습니다. 대제사장이 이스라엘의 모든 불의와 죄를 염소의 머리에 안수하여 광야로 내보내는 의식입니다. 사실 죽음의 광야로 버려져야 마땅한 것은 우리 자신입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친히 우리의 완전한 피난처가 되시기 위해 그 아사셀의 염소가 되셨습니다. 성문 밖 십자가에서 모든 수치와 죄를 짊어지시고 대신 버려지심으로, 우리를 은혜의 처소로 들어가게 하신 것입니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 날, 내 어깨 한쪽이 다 젖더라도 친구가 비를 피할 수 있게 기꺼이 우산을 기울여주는 분, 그분이 바로 우리 주님이십니다. 절망과 죄책감이 밀려올 때 지체하지 마십시오. 살기 위해 모든 것을 걸고 달렸던 도망자처럼 예수님께로 피하십시오. 바로 주님의 품에서 우리는 다시 일어날 위로와 힘을 얻게 될 것입니다.
환대의 길을 닦는 공동체
도피성은 오늘날 교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뚜렷하게 보여주는 그림입니다. 참된 교회는 화려한 건물이 아니라, 절망에 빠진 영혼들을 영원한 도피성이신 예수님께로 안전하게 인도하고 품어주는 공동체입니다.
신명기 19장 3절에 보면 하나님은 도피성으로 향하는 ‘길을 닦으라’고 명령하십니다. 유대 전승에 따르면 이 길은 폭이 무려 14미터나 될 정도로 넓고 평탄하게 보수되어야 했으며, 곳곳에 표지판을 세워 누구나 쉽게 찾을 수 있도록 했습니다. 길이 망가져 도망자가 도중에 죽는 일이 없도록 하기 위함입니다. 실수와 실패를 딛고 다시 일어설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것을 넉넉히 받아줄 사람들이 존재하느냐가 그 공동체의 건강성을 결정합니다.
물론 도피성은 자신의 책임을 회피하거나 죄를 무분별하게 용인하고 덮어주는 무법지대가 아닙니다. 도피성에 들어간 사람에게 요구되는 가장 바른 태도는 ‘자신의 문제를 정직하게 직면하고, 하나님의 거룩한 공의 안에서 자신의 삶이 새롭게 회복되기를 바라는 겸손한 순종’입니다. 교회의 거룩성을 지키되, 정의를 세워가는 과정 속에서 하나님의 자비를 잃지 않는 곳이 되어야 합니다.
살인을 저지른 사람이 가까스로 도피성에 도달했는데 성문이 굳게 닫혀 있다면 얼마나 절망적이겠습니까? 도피성의 문 앞에는 피난처를 찾는 이들의 이야기를 들어줄 사람들이 24시간 대기하고 있었을거라 생각됩니다. 언제라도 찾아올 사람이 있다고 생각하며 대기조가 있었을 것입니다.
도피성의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이제 다른 누군가에게 도피성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혹시 우리의 삶과 우리 교회에 다가오려는 누군가가 있는데, 우리가 세워둔 표지판이 망가져 있거나 환대의 문이 굳게 닫혀 있지는 않습니까? 스스로를 돌아보고 길을 정비합시다.
도피성은 기댈 곳이 필요한 이 시대에 위로와 소망을 주는 공간으로 하나님께서 직접 디장인 한 곳입니다. 바로 우리가 언제라도 찾아들어가 쉴 수 있는 곳이며 또 평가와 정죄가 무서운 이 세상 속에서 누군가의 기댈 곳이 되어주는 참된 도피성으로 살아가야 함을 명령하고 있습니다.
부디 우리가 선 곳이 회복의 땅이 되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롬 12: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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