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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천사의 노래(누가복음 2:10-11절)_코막스밸리한인교회 박재신 목사

천사의 노래(누가복음 2:10-11절)

코막스밸리한인교회 박재신 목사

10.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11.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 

어린 시절, 아침에 까치가 “깍깍” 거리면, 오늘 귀한 손님이 오려나보다!, 좋은 소식이 있으려나보다! 라고 어른들이 말씀하셨던 생각이 납니다. 그러면 어린 저는 앞 마당의 조그마한 언덕위에 올라가서, 누가? 언제? 오시려나! 설렘 반, 기대 반으로 귀한 손님, 좋은 소식을 기대하며 서성 거렸던 기억이 있습니다. 

요즘은 “까치”가 전해주는 좋은 소식이 더더욱 그립고 기달려집니다.

매스컴을 접해보면, 몇 해전부터 연거푸 장식하는 기사가 “코로나(오미크론)” 소식입니다. 게다가 지금은 러시아와 우크라이나간의 전쟁 소식입니다. 러시아의 무차별 공격으로 산부인과 병원이 파괴되었다.  우크라이나 민간인이 몇명 사망했다. 사망한 러시아 군인도 영문도 모른채 전쟁에 끌려왔다는 등 가슴아픈 이야기들이 귓가에 들려옵니다. 

요즘처럼, 어린 동심의 시절로 다시 돌아가, 앞 마당 앞 미류나무 위에서 “깍깍”거리며 기쁜 소식을 안겨다 줄 까치가 더더욱 그립고 기다려진적도 없는 듯 합니다.

하지만 이러한 가슴아픈 이야기들은 2000년전에도 있었습니다. 그 당시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 그들에게 늘 들리는 소식은 불행하고 불안한 이야기들 뿐 이었습니다.

힘 없는 백성들, 주권없는 백성들이 로마사람들로부터 받은 비 인격적인 대우로 상처받았다는 이야기만이 들려옵니다. 잘못됨을 잘못됐다고 말도 못하고, 사람답게 살아보지도 못하는 자신들이 처한 환경에 아무런 소망도 갖지 못한채 살아갈 뿐 이입니다. 그러던 가운데 기쁜 소식을 안겨다 줄 까치의 소리보다 더 큰 기쁜 소식을 안겨다 준 천사의 소리를 듣게 됩니다.

“천사가 이르되 무서워하지 말라 보라 내가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 오늘 다윗의 동네에 너희를 위하여 구주가 나셨으니 곧 그리스도 주시니라”(10,11) 

좌절에 놓인 이들에게, 어떤 희망(소망)도 갖지 못하고 있던 이들에게 천사가 놀라운 소식을 전해 줍니다.

“너희를 위하여 구주(그리스도)가 나셨다.” 그는 “너희들을 구원할 것이다””절망을 소망으로 바꿔 줄 것이고 좌절을 희망으로 바꿔 줄 것이다”

그렇습니다. 로마의 지배하에 있던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이것만큼 크고 놀라운 좋은 소식은 없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땅에 오셨다는 사실은 우리에게 있어서 너무나 큰 소식이요 기쁨입니다. 예수님이 오셨기에 우리들은 부유함을 누리며, 자유를 누릴 수 있게 되었고, 소망 가운데 행복함을 누릴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오는 것이 감사입니다. 뜻하지 않은 행복을 누리며 큰 기쁨을 맛보게 되니 자연스럽게 감사가 나옵니다.

첫째, 믿음을 주신 것을 감사하게 됩니다. 

히 12 : 2을 보면, “믿음의 주요 또 온전케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라고 말씀하비다. 

‘예수님은 믿음의 주시라’는 말은, 예수님은 믿음의 주인공, 우리 믿음의 대상이 되신다는 의미입니다. 

그렇기에 믿는다는 것, 자체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믿음의 대상이 올바라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믿음은 믿음의 대상과 나를 연결시켜 줍니다. 따라서 믿음의 대상이 누구인가에 따라 우리 삶의 방향도 결정 됩니다.  

여러분은 무엇을 믿습니까? 

우리는 예수님을 믿습니다. 따라서 이 예수님은 우리의 삶의 방향이요 목적이 됩니다. 그렇기에 예수님을 알게 된 사실이 얼마나 감사한지 우리는 모릅니다.

요한복음 9장을 보면, 예수님께서 날 때부터 소경된 자의 눈을 뜨게 해 주신 이야기가 나옵니다. 예수님은 나면서부터 소경된 자를 고쳐 주셨습니다. 

소경은 무엇을 봐도 어둡습니다. 아름다운 꽃을 보아도 어둡습니다. 생글생글 웃음을 짓는 아기의 얼굴을 보아도 어둡습니다. 찬란한 햇빛을 보아도 어둡습니다. 내 심령이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때에는 내 심령이 매우 어두웠습니다. 맛있는 것을 먹으면서도 어두웠고, 좋은 것을 가지고 있어도 어두웠습니다.                                              

바로 나면서부터 소경이었습니다. 

사마리아 여인은 남편을 여러 번 바꿔보았어도 심령이 어두웠습니다. 바로 소경이었습니다. 

탕자는 그 좋은 아버지 밑에 살면서도 심령이 어두웠습니다. 소경이었습니다. 

그런데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께서 우리를 찾아 주셨습니다.예수님께서 말씀으로 나에게 임하셔서 내가 하나님의 사랑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심정을 알게 되고 하나님의 가치관을 깨닫게 되었을 때에 내 눈, 우리의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탕자의 눈이 뜬 것처럼, 사마리아의 여인의 눈이 뜬 것처럼, 내 눈, 우리의 눈이 떠지게 되었습니다. 

이제부터는 모든 것이 축복입니다. 

옛날에는 어두워서 싫었는데 이제는 눈을 뜨니까 하나님의 능력의 손이 보이고 하나님의 사랑의 손이 보이니까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하나님을 믿는 자에게는 모든 것이 협력해서 선을 이루게 됩니다. 어려움도, 슬픈 일도, 답답한 일도 그 배후에 있는 하나님의 손이 있기에 축복이 됩니다. 

눈을 뜨게 되니까, 어려움이 찾아와도 기뻐하게 됩니다. 바로 믿음입니다. 이 믿음이 생기니까 올바른 가치관을 갖게 되고, 더불어 우리에게는 힘이 생깁니다. 바로 믿음은 힘입니다.

둘째로, 주신 사랑으로 인한 감사입니다.

모든 사람들이 제일 원하는 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사랑입니다. 

우리는 다 사랑을 받고 싶어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모든 사람들이 사랑을 받으려고만 할 뿐 주려고 하는 사람은 별로 없다는 데에 있습니다. 이렇게 표현하면, “난 아닌데~” 하는 분이 있을지 모릅니다. 하지만 우리의 모습을 돌이키어 보면 답이 나옵니다. 남녀가 결혼할 때를 생각해 보면 금세 답이 나옵니다. 

‘저 사람과 결혼하면 언제나 사랑을 받으리라’ 하지만 잠깐입니다. 

어느 글에서 읽은 내용입니다. 

“남자가 여자에게 잘 해주겠다는 것은 입으로만 하는 것이지 사실은 사랑을 받으려고 한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인간은 다 불행합니다. 사랑 받기를 원하는데, 받지를 못하니까 실망이 오고,  섭섭하고,  마음이 어두워지고 불행하게 됩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은 분이 있습니다. 

요한일서에서 ‘하나님은 사랑이라’(God is love)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다시 말해, 하나님은 사랑 그 자체, 본성이 사랑이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나의 형편에 따라 요리저리 변하는 죄인의 괴수인 우리를 끝까지 사랑하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그분은 “내가 온 것은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요, 죄인은 부르러 왔다. 건강한 사람을 위해서 온 것이 아니라 병든 자를 위해서 왔다.”고 말씀합니다. 그리고 일흔 번씩 일곱 번을 용서하는 것이 아니라 무한대로 용서함에 대해 표현하십니다. 바로 이 사랑에 흡수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이 사랑에 정복당하지 않을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기독교 역사는 믿음의 역사입니다.사랑의 역사입니다. 

리빙스턴은 아프리카 오지에 가서 사랑의 제물이 된 분입니다. 그는 죽으면서도  “내 심장은 내 사랑하는 아프리카에 묻어주시오!” 했던 분입니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 사원에 그의 무덤은 있지만 그것은 그의 육신이지, 그의 심장은 아프리카 오지에 묻혀 있습니다. 지금도 아프리카 사람들이 그들을 멸시하는 백인들은 미워하지만 리빙스턴의 무덤은 꽃동산을 이룹니다. 

알버트 슈바이처, 허드슨 테일러. 이분들도 사랑을 실천한 믿음의 사람들입니다. 이처럼 예수님의 사랑, 나를 사랑하시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게 되면 이들처럼 사랑을 실천하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게됩니다.

셋째, 예수님의 탄생으로 우리는 소망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주신 이 소망 때문에 감사하게 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든 병을 다 고칠 수 있지만 한 가지 고칠 수 없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일까요? 바로, 절망이라는 병입니다.’라는 말이 있습니다. 무엇이 절망입니까? 불신이 절망입니다. 

우리가 능력의 하나님, 전능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을 믿지 않으면 절망 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불신을 절망이라고 합니다. 그것을 죽음에 이르는 병이라고 합니다. 

우리가 살아갈 때에 인간의 힘으로는 감당할 수 없는 어려움이 닥쳐올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한 가지 소망이 있습니다. 말구유에 탄생하신 예수님이 주신 소망입니다. 이 세상에 사는 동안에는 음지가 있습니다. 하지만 음지는 변장된 축복입니다. 하나님 안에 있으면 음지가 얼마나 큰 축복이 되는지 깨닫게 됩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어려움을 해결 해 주시지만, 오히려 이것을 축복의 기회로 만들어 주시는 분입니다. 그렇기에 지금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낙담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포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그렇기에 지금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다 할지라도, 코로나와 우크라이나에 발생한 전쟁 때문에 염려와 걱정을 하고 있다 할지라도, 정치 경제를 보면 짜증이 나고, 소망이 없어보인다할지라도, 우리에게는 낙담이 있을 수 없습니다. 포기가 있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소망의 하나님이 계시기에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고전 13장을 보면

“그런즉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는 항상 있을 것인데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And now these three remain: faith, hope and love. But the greatest of these is love.) 

예수님을 우리가 모시면 우리 삶에는 믿음, 소망, 사랑, 이 세 가지가 항상 있어야 합니다. 바울은 이 중에서 제일은 사랑이라고 했습니다. 오늘 우리가 현실에서 가장 필요한 것이 사랑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우리는 사랑을 심어야 합니다. 온 세상을 사랑의 동산으로 만들어야 합니다. 우리 가정, 우리 교회, 우리 주변, 전 세계를 향하여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을 감사하고, 예수님께 재 헌신을 결정하는 모습이 바로 저희들의 모습이 되어야 합니다.

사랑은 언제나 오래 참고

사랑은  언제나 온유하며
사랑은 시기하지 않으며

자랑도 교만도 아니하며

사랑은 무례히 행치 않고

자기의 유익을 구치않고 
사랑은 성내지 아니하며

진리와 함께 기뻐하네

사랑은 모든 것 감싸주고

바라고 믿고 참아내며 
사랑은 영원토록 변함없네

믿음과 소망과 사랑은

이 세상 끝까지 영원하며
믿음과 소망과 사랑 중에

그 중에 제일은 사랑이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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