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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한 가지 만이라도(눅 10:38-42)_애드먼턴 한인장로교회 진성인 목사

한 가지 만이라도(눅 10:38-42)

애드먼턴 한인장로교회 진성인 목사

우리는 참 바쁜 세상에서 살고 있습니다. 하늘의 지혜가 담긴 솔로몬의 잠언은 반복적으로 게으름의 죄에 대해 많이 강조하고 있지만, 어쩌면 오늘날은 게으름 보다는 분주함이라는 우상이 더 위험하고 심각한 시대가 아닌가 싶습니다.

게으름은 나도 남도 죄악시 여기지만, 분주함은 나도 뿌듯하게 여기고, 남도 칭찬해주기 때문에 분주함으로 인해 하나님과 멀어지더라도 죄악시하지도 않고, 분주함을 우상으로 여기지 않기 때문입니다.

오늘 말씀은 분주함에 어쩔 줄 몰라 하던 마르다와 그와 상관없이 평온히 예수님 발앞에서 말씀을 듣던 마리아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긍정적으로 볼 때는 마르다는 일 잘하는 여제자, 마리아는 예수님을 사모하는 여제자의 대명사입니다. 그런데 좀 부정적으로는, 마르다는 일 좀 많이 한다고 거드름 피우는 교만덩어리요, 마리아는 남은 바쁜데 아랑곳없이 자기 하고 싶은 일만 하고 있는 진상덩어리로 보는 시선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예수님을 대접하기 위해 자기의 집과 은사를 아끼지 않는 마르다 같은 제자입니까? 아니면 예수님의 발치에서 그 주시는 말씀과 사랑을 놓치지 않기 위해 누구의 시선도 개의치 않는 마리아 같은 제자입니까?

그런데 오늘 말씀에서 우리가 오해하지 말아야 하는 부분이 있습니다. 마르다와 마리아가 성향이나 주력하는 부분이 아주 다른 것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둘 중 누구에게 틀리다고 말씀하시거나 책망하지 않으셨다는 점입니다.

지금까지 많은 이들이 마르다는 육적인 일을 잘 하는 사람, 마리아는 영적인 일에 관심이 많은 사람 이런 식으로 영과 육으로 구별하고 분리시켜 마르다와 마리아를 평가하곤 했습니다. 그런데요, 만약 마르다가 지금 롬 8장에 나오는 것 같이 사망에 이르고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하는 육신의 일에 몰두한 것이라면, 예수님은 마르다를 꾸짖고 책망하셨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자기 혼자 일하지 않도록 마리아 좀 어떻게 해보라’는 마르다의 부탁은 들어주지 않으셨어도, “마르다 너나 하던 일을 멈춰라, 너는 지금 헛된 일을 하고 있다. 니가 하는 일은 하나님이 미워하시는 것이다’ 라고 하지는 않으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은 말씀하셨습니다. “몇 가지만 하든지 혹은 한 가지만이라도 충분하다. 마리아는 이 좋은 편을 택했으니 지금 하던 일을 멈추고 너를 도우라고 하지 않겠다.” (42절)

예수님은 예수님을 대접하고 섬기려는 마르다의 중심을 아셨기에 그녀를 책망하지 않으셨습니다. 그녀가 단순히 자기 만족이나 과시로 지금 많은 일을 하는 게 아니라 예수님을 대접하고자 하였는데 생각보다 많아진 일에 분주하며 곤란을 겪고 있는 걸 아셨습니다. 그래서 책망하시는 대신, 그녀 스스로 현재 상태를 직시하게 하셨습니다.

마르다는 지금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했습니다. 여기서 ‘마음이 분주하다’는 표현은 ‘사방에서 끌어당긴다’는 뜻인데 이 표현이 수동태로 쓰였어요. 즉 마르다는 일이 많아서 그 일에 치여 끌려 다녔습니다. 자신이 능동적으로 일을 주도하며 기꺼이 섬기고 있는 게 아니었습니다.

우리도 그럴 때가 있죠. 좋은 의도로 잘 해보려던 일에 마침내 치여서 왜 하는지도 잊은 채 눈동자가 이리저리 굴러다니고 긴장상태에 빠져 남들까지 불안하게 만들면서 분주하게 일할 때 말입니다. 요즘 연말이다 보니 이런 경험 하는 분들 많으실 겁니다. 사실 지금 교회도 대림절 가긴이고 성탄과 연말이 다가오니 어느 때보다 바쁜 시간이죠.  

마르다는 예수님이 별로 반갑지 않은데 대접해야 하니 억지로 하느라 마지 못 해 끌려가듯 일한 게 절대 아닙니다. 예수님이 마르다가 사는 마을에 들어갔을 때 예수님을 적극 자기 집으로 영접한 사람은 다름 아닌 마르다 자신이었어요.

하지만 현실은 잔혹한 것이죠. 미리 계획하지 않은 채 예수님과 예수님의 제자들을 초대한 그녀는 자발적 의지와 좋은 의도를 가졌었지만, 안타깝게도 많은 일에 치여 그 일 자체에 끌려다니는 상황이 된 겁니다. 그녀는 예수님을 환영하는 마음이었기에 이 초대 자체나 자기 자신에 대해 후회한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감당하기 힘들어 염려하고 근심하였습니다.

많은 일로 근심하고 염려하는 현실 앞에서 마르다의 피로감을 높인 인물이 있었는데요. 바로 예수님 발치에 앉아 말씀을 듣던 마르다의 동생 마리아 였습니다. 일이 많아 마음이 이리저리 끌려 다닌 마르다와는 달리, 마리아가 말씀을 듣는다는 표현에서 ‘듣다’라는 말은 능동태로 기록되었습니다. 즉, 마리아는 손님이 오셨는데 그분이 하시는 말씀을 그래도 누군가는 들어주는 게 예의라서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닙니다. 사실 그 당시 문화적으로 랍비같은 분이 와서 가르침을 주는 자리에 여인들은 함께 동석하지 않았습니다. 마리아가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는 것은 어쩌면 마르다가 분주하지 않은 상황이더라도 다소 의아한 장면입니다. 마리아는 절대 예의상 그 자리에 있었던 게 아닙니다. 통념을 깨면서까지 의지적으로 그 자리를 지켰습니다.

마리아는 체면치레나 부모의 요청으로 예수님 발치에 앉은 게 아니라 자기 의지로 적극 말씀을 듣고 싶어서 예수님 발치에 앉아 있었습니다. 언니 마르다가 지금 일에 치여 폭발하기 일보직전인줄도 모르고 말이죠.

결국 마르다는 폭발하고 맙니다. 그런데 어처구니 없게도 마르다는 예수님께 폭발하고 말아요. 40절 말씀입니다. 마르다는 준비하는 일이 많아 마음이 분주한지라 예수께 나아가 이르되 주여 동생이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생각하지 아니하시나이까 그를 명하사 나를 도와 주라 하소서.

지금 이 상황의 장면을 상상해 보세요. 분주하게 일하던 마르다가 저 멀리 예수님이 말씀 전하시는 모습을 힐끗거리며 급히 식사를 준비합니다. 마르다는 자기도 그 자리에서 말씀을 듣고 싶어 예수님을 초대했는데 주방에서 벗어나지 못 하는 신세라는 걸 더 깊이 실감하게 되고요. 몇번 마리아도 째려봤는데 얄밉게도 동생은 자기 처지와 달리 너무 평온한 거예요. 그러자 결국 참지 못 하고 예수님께 신경질적인 걸음으로 나아갑니다. 흥분된 감정을 드러내지 않으려고 목소리를 낮춰 말하지만 얼굴에 그녀의 감정이 그대로 나타납니다. “주여!” 이라고 부르긴 하는데 도저히 주님께 말하는 종의 톤도 눈빛도 자세도 아닙니다. “내동생이 나 혼자 일하게 두는 것을 모르시는 거예요? 지금 다른 말씀 하실 게 아니라 저를 도와주라고 말씀해 주세요. 그래야 다같이 먹든지 마시든지 할 것 같아요”

다소 과장된 상상일수도 있지만, 우리가 마르다 같은 처지에 있었다면 충분히 그렇게 말할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저도 아내가 바쁠때 먼저 자게 되면 째려보는 느낌이 왠지 나더라고요.

결국 마르다의 마음을 더 요동치게 한 것은 단순히 분주함만은 아니었던 거 같아요. 마리아에 대한 불만이 그녀를 가만 두지 않았습니다.

‘더 많이 수고한 내가 예수님께 더 가까이 있지 못 하다’는 ‘불안감’과 ‘불만’이 그녀를 더 괴롭혔습니다. 주방에 있기 때문에 예수님 발치보다 멀리 있던 마르다의 거리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로만 예수님에게서 멀게 느껴진게 아니었습니다. 그렇게 바쁘고도 예수님과는 가까와질 기회는 없는 거 같아 견디기 힘들었을 겁니다.  

교회 공동체 안팎에서 주의 일을 하다 보면 이런 불안과 불만이 생길 때가 있습니다. 내가 분명 예수님을 사랑하고 예수님을 위해 최선을 다하면서 바쁘고 지치는데, 정작 그다지 수고도 애씀도 없었던 누군가가 하나님과 더 가까운 거 같고, 분주함에 지친 나와는 달리 평온해 보여 불만스럽고 불안할 때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교회 다니며 “내가 이만큼 했는데”라는 말 만큼 위험한 건 없습니다. 주의 일에 힘쓰면 힘쓸수록 이런 시험에 들 때가 있습니다. 내가 노력하고 애썼는데 그런 나를 뒤로하고 다른 이가 더 잘 되면, 공로없이 주님의 사랑을 많이 받는 거 같고 평온해 보이니 야속하기도 합니다.

교회학교 교사들의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1부 예배를 드리고 봉사해야 하니, 이른 아침에 집안의 자녀들을 깨우는 것부터 쉽지 않습니다. 처음엔 달래보고요, 안되면 화내고 그래도 안 되면 업어서 데리고 나와야 할 수도 있거든요. 거친 호흡이 가다듬어지기 전에 벌써 예배가 끝나고 부서 예배 드리는데 내 이름도 모르는 우리 반 아이들은 자기들끼리 신나서 떠들고요. 끝나고 갈 때 인사도 안 하고 가요. 그렇게 정신없이 두 번의 예배를 드리고 2부 예배 후 나오는 성도님들을 보았는데 편안하게 예배드리고 감동받아 눈물을 닦으며 얼굴이 천사처럼 환해져서 나온다면 교사분들 마음이 어떨까요? ‘이제 한 달 남았다. 내년엔 교사 그만해야지’ 라며 절대 해서는 안 될 생각과 마음을 먹지 않을까요?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님을 내 인생의 주인 삼고 거듭나 사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좀 더 예수님의 사랑받고 주님께 가까이 하고 싶을 것입니다. 하지만 내 수고와 헌신과 비례할만큼의 가까운 자리, 핵심적인 위치에서 누리지 못 하고, 별로 집중도 받지 못 하는 채로 몸과 마음이 지치고 영적 탈진 상태에 빠지는 경우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오늘 이렇게 지치고 근심하며 불평하는 마르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들에게 하나님은 무엇이라 말씀하십니까? 42절을 다시 한번 함께 읽겠습니다.

가지만 하든지 혹은 가지만이라도 족하니라 마리아는 좋은 편을 해였으니 빼앗기지 아니하리라 하시니라

이 말을 좀 길게 풀면 이런 의미예요. “마르다야, 너는 나를 기쁘게 영접하려고 하다가 너무 바빠졌구나. 너무 많은 일이 너와 나의 관계를 오히려 무너뜨리고 있는 거 같다. 너가 더 많이 일하고 나에게 뭔가를 해주어야 나와의 관계가 깊어지는 게 아니니까 너무 애쓰지 말았으면 좋겠다. 네가 나와의 관계를 위해 더 좋은 선택을 하면 좋겠구나. 마리아는 나에게 뭔가를 대접할 수는 없어도 가까이에서 말씀을 들으며 나와의 관계를 지키고 있으니, 그런 마리아를 원망하거나 억지로 데려가려고 하지 말고, 너도 마리아처럼 너를 위해 더 좋은 결정을 했으면 해. 뭔가 나를 위해 끊임없이 바쁘고 애를 써야 내가 너를 사랑하는게 아니란다. 나는 이미 너를 충분히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 십자가를 지려고 이땅에 왔어. 그리고 너가 사는 마을에 간거고. 네가 나를 초대해서 너무 기쁘지만 너가 너무 애쓰느라 오히려 나와 멀어지고 나와 마리아에게까지 불만이 생기는 건 올바르지 않은 것 같다.”

열두 제자와 칠십 인의 제자를 능력과 권위로 보내셨다가 그들이 돌아온 후 겸손한 제자의 길, 십자가의 길을 걷길 바라셨던 우리 예수님은, 오늘 말씀에서 마르다와 마리아의 이야기를 통해 또다시 우리에게 알려주십니다. 우리가 뭔가 대단하고 많은 일과 결과로 예수님을 기쁘게 하고 예수님을 영화롭게 하는 게 아니라는 걸요.

우리 예수님은 이미 홀로 찬양받기에 합당한 하나님의 아들이십니다.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지 않아도 이미 영광받으시기에 부족함이 없으세요. 우리의 봉사나 격정적인 예배, 혹은, 바쳐드린 헌금으로 예수님의 위상이 높아지는 게 아닙니다.

또한 우리가 많은 일을 하며 수고해야 예수님의 사랑을 받아낼 수 있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은 이미 이땅에 오심으로 그리고 이후 십자가에 달려 죽으심으로 우리를 향한 그 사랑을 이미 다 확증하셨어요. 더 다른 것으로 사랑을 확인하지 않아도 됩니다. 5:8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확증하셨느니라

우리가 주님의 이 사랑에 감격하고 감사해 마음과 정성과 뜻과 힘을 다해 주님을 사랑해야 하지만 우리가 사랑의 수고를 더해야 주님께 더 가까워지고 주님이 내 편이 될 거라는 종교적 기대와 부담감을 가지는 것은 복음과 다릅니다.

그러기에 오늘 말씀 앞에서 우리는 우리 자신을 돌아보아야겠습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은혜에 감사하며 드리는 헌신과 봉사가 오히려 주님과 나의 관계를 가로막고 또 나와 다른 형제 자매들, 지체들과의 관계를 무너뜨리고 있지 않은가요?

마르다처럼 진심과 좋은 의도로 시작했지만 어느덧 많아진 일에 치여 끌려다니면서 주님의 사랑에 매여 우리의 영이 기뻐 그 일을 감당하는 게 아니라 일 자체에 지배당하고 있지 않나요?

우리는 이제,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놓치지 않을 수 있는 좋은 편을 택해야 하겠습니다. 그렇다고 갑자기 교회에서 맡은 직분과 봉사직을 다 내려놓으시라는 건 절대 아닙니다. 우리 예수님도 마르다가 지금 수고하는 이유를 돌아보기 원하셨던 것이지 그가 하는 일은 속되고 헛되니 멈춰야 한다고 하신 일이 없습니다.

다만 의미와 이유를 잃은 채 폭주하지 않기 바라셨습니다. 그런 방향과 기쁨을 잃은 폭주로 인해 하나님과 사람들과의 관계가 깨어지지 않길 원하셨습니다.

쉽게 말해 교회에서 식탁 교제는 필요하고 귀하나 그 식탁을 차리느라 예배도 제대로 못 드리고 봉사명단에 있는데도 순서와 자리를 지키지 않는 사람 때문에 열받아 하나님께 불평하고 따지는 일이 없길 바라신 것입니다.

그러기에 지금 내가 수고하고 애쓰며 분주한 중에 혹 주님의 은혜를 정작 누리지 못 하고, 주님을 향한 사모함보다 내 계획과 열심에 목적과 방향을 잃고 무조건 질주하고 있지 않은지 돌아보아야겠습니다.

내 애씀으로 주님의 사랑을 더 얻거나 주님을 기쁘게 할 수 있는게 아닙니다. 주님은 이미 우리를 충분히 사랑하시고 우리가 주신 은사와 힘과 시간을 소중히 여기며 한 가지라도 기쁨으로 주님과 교제하며 이 일들을 감당하는 것을 기뻐하십니다. 이를 위해서는 몇몇 사람만 일하느라 힘빼는 공동체가 아니라 모두가 작은 일 한 가지라도 주안에서 말씀에 순종하여 기쁘고 감사하게 진심을 다해 행하며 협력하는 것이 중요할 것입니다.

우리 모두가 한 가지라도 주님의 은혜에 감사하며 그 말씀에 순종하며 주님과 가까이 하는 삶을 살기 위해 주님과의 만남의 시간을 재정비하고요. 그 안에서 사랑의 수고를 하며 협력하고 섬긴다면 우리모두가 염려와 근심과 불만과 불평이 아닌 은혜와 기쁨을 넉넉히 함께 누리며 아버지의 뜻대로 동행하며 살고 사랑하며 섬기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입니다.

대림절을 보내며 우리와 함께 하시기 위해 오신 예수님과 동행하며 만족하는 기쁨이 충만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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