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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함께 하는 항해 (행27:1-12)_캐나다 동신교회 (박태겸 목사)

함께 하는 항해 (행27:1-12)

캐나다 동신교회 (박태겸 목사)

   중년의 신사가 공원을 산책하고 있었다. 초라한 할아버지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며 구걸하다가 지쳐 쉬고 있었다. 신사는 조용히 노인에게 다가갔다. “제가 한번 바이올린을 만져봐도 될까요?” 노인이 허락하자 중년의 신사는 몇 번 바이올린을 켜보며 음을 맞추었다. 그리고 바이올린을 정식으로 연주하기 시작했다. 바이올린협주곡 1번 D장조였다. 리드미칼하고 상쾌하면서도 장엄하고도 화려한 음악이 변화무상하게 흐르자 지나가는 사람들이 하나 둘씩 모이기 시작했다. 늘 듣던 초라한 노인의 음악과는 달리 서정적이면서 달콤한 아름다운 선율에 사람들은 매료되었다. 금방 공원은 이 바이올린 연주하는 사람에게로 가득 차게 되었다. 연주가 끝나자 많은 사람들이 큰 감동을 받아 모금함에 기부금을 던졌다. 한 사람이 다가와 말했다. “당신은 파가니니가 아닙니까? 이 공원에서 뵙게 되다니요.” 이태리 출신의 최고의 바이올린 연주자 파가니니가 영국 공연에 왔다가 공원을 산책하는 중에 일어난 일이다. 누가 바이올린을 연주하느냐가 중요하다. 오늘 로마로 향하는 배에는 율리오와 선원들과 다른 죄수들도 있었다. 그러나 그 배에 바울이라는 죄수가 함께 타고 갔다(1절). 그 배는 죄인들을 로마로 호송하는 범선이 아니라 하나님의 복음을 나르는 구원선이었다. 그 배는 하나님이 동행하는 배였다. 

   당신의 인생 항해에 누구와 동행하느냐가 중요하다(2절). 바울이 탄 배에는 데살로니가 사람 아리스다고와 함께 하게 되었음을 강조한다. 성경에 보면, 아리스다고는 바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바울을 수행하고 있다. 그래서 바울은 고백하기를 “나와 함께 하는 아리스다고”라고 한다. 그는 바울이 밀레도에서 에베소장로들과 고별 인사를 나눌 때 예루살렘으로 들어가는 것을 만류하거나 슬퍼하지도 않았다. 그는 바울의 사명이 막중함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다만 그는 아무 말없이 바울을 따라 예루살렘으로 들어간다(행20:4). 바울과 동행하였던 것이다. 바울이 에베소에서 복음을 전할 때 경제적 손실을 입게 된 은장색 데메드리오라는 많은 사람을 충동하여 바울과 동행하는 아리스다고를 잡아다가 원형극장으로 끌고 들어갔다(행19:29). 바울을 따라다니는 아리스다고는 이처럼 순교자 바울과 똑같은 운명으로 살았다. 더 나아가 바울은 “나와 함께 갇힌 자 된 아리스다고”라고 했다(골4:10). 그런데, 전승에 의하면 아리스다고는 로마감옥에서 바울을 대신해 먼저 순교당했다. 그래서 바울의 마음은 매어 지는 듯 슬픔에 빠졌다. 동행 중의 동행은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이다. 에녹은 65세에 므두셀라를 낳고 300년간 하나님과 동행했다. 그러다가 죽음을 맛보지 않고 하나님이 데려가셨다(창5:24). 동행하다는 ‘Walk with God’ (하나님과 함께 걷다) 라는 의미이다. 아무리 좋은 사람도 내 곁을 떠나간다. 친구도 자식도 배우자도 영원한 동반자는 아니다. 바울과 함께 했던 자들도 모두 그의 곁을 떠났다(딤후4:10). 우리는 죽음의 골짜기까지 따라오시는 그분과 동행해야 산다(시23:4). 

   우리가 하나님과 동행하면 인생 항로에는 위로자를 만난다(3절). 바울은 고난의 항해 중에도 ‘시돈’에서 친구들의 대접을 받았다. 어느 해 이민자의 땅에서 8.15 광복절을 보냈다. 저는 기념식수를 하기 위해 무궁화를 주신다는 한 어르신네 집을 찾아갔다. 그 집에는 남편이 심어놓고 간 무궁화가 아름다운 담장을 이루고 있었다. “하늘에서도 보고 계시겠지요?” 남편이 심은 무궁화가 이렇게 활짝 꽃이 핀 모습을 보면서 매우 기뻐하실 것이라며 그리워했다. “목사님, 오늘 우리 아들의 가정에 한국에서 2년전에 입양한 20개월된 손자가 들어옵니다”라며 너무나 기뻐하셨다. “저는 동신교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우리 가정과 늘 함께 하신다는 것을 믿게 되었지요. 저는 매일 매일 감사할 뿐이예요.” 하며 입양한 손자의 사진을 보여준다. 두 자녀를 둔 팔순이 다 된 이 어르신네는 이제 처음 손주를 보게 되었다. 강아지 한 마리를 입양해도 가족이 설레며 기다리는데, 한 아이가 식구로 들어오는 이날 할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감격스러울까! 저는 이분이 우리와 한 배를 탓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자식도 보여주고 무궁화도 보여주면서 함께 기쁨을 나누기를 원했던 것이다. 동행한다는 것은 바로 ‘마음을 나눈다’는 뜻이다. 이는 함께 즐거워하고 함께 우는 자들이다(롬12:15). 마음을 나눌 때 말씀과 기도를 함께 실어 나누면 가장 강력한 끄나풀이 생긴다. 식구란 ‘밥을 같이 먹는다’는 뜻이다. 한 집에 살면서도 잠만 자고 나가면 식구가 아니다. 한 집에 살지 않아도 주님의 말씀을 함께 듣고, 기쁨과 아픔을 함께 나누면 더 끈끈한 식구가 된다. 주님을 자기를 찾아 온 식구들을 향하여 ‘누가 내 어머니며 내 동생들이냐(마12:48)?’고 질문을 던졌다. “아침과 저녁에 수고하여 다 같이 일하는 온 식구가 한 상에 둘러서 먹고 마셔 여기가 우리의 낙원이라 고마워라 임마누엘 예수만 섬기는 나의 집 고마워라 임마누엘 복 되고 즐거운 하루하루”(찬559) 주님의 십자가를 보며 낙심한 엠마오로 가는 두 제가는 예루살렘의 꿈을 접고 낙향했다. 그러나 부활하신 주님은 그들을 내버려 두지 않고 동행하셨다. 그들은 주님께서 함께 하심을 깨닫지 못했다. 날이 저물자 그들이 함께 유하러 여관에 들어가 함께 음식을 나누자 그들의 눈이 밝아져 알아보게 되었다(눅24:30,31). 바울과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갇힌 죄수와 간수는 모두 바울과 운명을 같이했다. 바울을 지키시는 하나님은 배 안에 타고 있는 모든 죄수와 선원들을 지키셨다. 바울과 함께 빌립보 감옥에 갖혔던 사람들은 모두 함께 구원을 받았다. 같은 경험을 함께 하면 상대의 말을 믿게 된다. 그는 간수에게 외쳤다. “주 예수를 믿어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행16:31). 

   식구는 어디를 가든지 행선지를 밝히고, 그 동안 일어난 모든 일들을 나눈다(4-8). 바울은 자신의 여정이 구브로와 길리기아와 밤빌리아를 거쳐, 루기아와 무라 시에 이르고, 거기서 알렉산드리아 배로 갈아타고 니도 맞은 편을 거쳐 살모네 앞을 지나, 그레데 해인을 바라보며 ‘미항’에 도착했음을 밝힌다. 함께 한다는 것은 그 과정을 나누는 것이다. 직장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남편에게 아내가 묻는다. 오늘 어떻게 지냈어요? “별일 없이 잘 지냈어.” 그리고는 돌아서서 자기가 하고 싶은 일을 한다. 이것은 한 가족으로 살면서도 동행하는 것이 아니다. 동행한다는 것은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간다>는 뜻이다. 내가 먼저 달려가거나 건너뛰지 않아야 한다. 주님께서는 최후의 만찬석에서 제자들과 영원히 함께 하실 것을 약속하셨다. 그는 자신의 죽음의 과정과 의미를 상세히 나눈다. 그리고 영원히 기념하라고 말씀하신다. “이 떡은 내 몸이다. 이 피는 내 언약의 피다.” 죽음의 과정도 함께 나눌 때 주님과 제자 사이를 갈라놓지 못할 영원한 가족이 되었다. 신앙의 측도란 바로 주님과의 밀착 정도이다. 시험이 들 때는 멀찍이 주님을 따라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주님과 밀착되어 동행하면 기적을 동반한다. 주님의 기적이 일어나는 자리는 주님과 함께 식사하러 갈 때나, 식사 중이거나, 식사하고 나올 때 일어났다.  

   주님과 함께하는 항해는 사람의 생각보다 주님의 말씀을 먼저 기억한다(9,10절). 금식하는 절기란 대속죄일인 7월10일을 말한다. 우리 달력으로는 10월에 해당한다. 바울은 지금 머문 ‘미항’에서 겨울을 보낸 후에 로마로 가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많은 손해와 인명피해가 있을 것이라고 예언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선장과 선주의 말을 바울의 말보다 더 믿었다. 그래서 ‘미항’보다는 ‘뵈닉스’까지 가서 월동하기를 주장했다(11,12절). 로마법은 합리적이라 민주주의 기초가 되었다. 로마 선장의 말대로 ‘미항’은 작고 불편한데 반해, ‘뵈닉스’는 크고 아름다운 항구이므로 모두 거기서 겨울을 보내기를 선호하였다. 그러나 주님은 그들의 합리적인 생각과 판단을 따라 함께 항해하지 않았다. 여리고를 정탐하고 돌아온 12지파의 대표들은 서로 다른 보고를 한다. 다수인 10명은 가나안 점령은 불가능하다고 말하고, 여호수아와 갈렙만 하나님이 함께 하심으로 가능하다고 보고했다(민14:9). 사람들은 환경과 비교를 통해 결정한다. 그러나 믿음의 사람은 하나님의 뜻이 누구와 함께하고 있는 지를 우선하여 결정한다. 이처럼 바울은 하나님과 교제하기에 더 좋은 조용한 ‘미항’을 선택했지만, 사람들에겐 지루하고 긴긴 겨울을 보내기에는 뵈닉스가 더 화려하고 매혹적으로 여겨 그곳을 선택했다. 하나님과 동행한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미국에서 최초로 연방여성대법관이 된 ‘샌드라 오코너’는 가장 존경 받는 여성이다. 그녀는 24년간 미국의 법정을 지키는 ‘중도의 여성’으로 보수와 진보의 편파성을 극복했다. 종신직인 대법관 직을 그녀는 유방암에 시달릴 때도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기 남편 ‘존 오코너’가 치매에 걸리자 남편과 더 많은 시간을 보내기 위해 대법관직을 사직하고 남편만 돌보게 되었다. 그런데 요양원에서 만난 여인과 남편이 눈이 맞아 바람이 난 것이다. 남편은 아내는 전혀 몰라보고, 아내 앞에서 손도 잡고 정답게 얘기도 나누고 키스도 하는 것이었다. 기자가 질문했다. “남편을 요양원에 보낸 것을 후회하지 않습니까? 대법관직을 포기하고 남편을 간호한 결과에 낙심하지 않습니까?” 그녀의 대답은 우리를 놀라게 했다. “내 남편이 병들었잖아요. 저는 이렇게 남편이 즐거워하는 모습을 보면서 언제나 함께하고 있어요.” 한 배를 타고 간다는 것은 잘못되었다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고통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과 동행하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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