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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Be rich toward God), 눅12:13-21_위의 것을 사모하는 위로교회 박석호 목사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가 되라(Be rich toward God), 눅12:13-21

위의 것을 사모하는 위로교회 박석호 목사

우리가 예수 제자로 주님의 길을 따라가는 데에는 많은 장애물이 우리를 가로막고 있습니다. 그것들 중에 하나로 예수님은 위선을 경계하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지난 주에 주님은 위선을 조심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한다고 우리를 가르치셨습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서 주님은 제자들이 조심해야할 또다른 위험 요인을 가르치십니다. 그것은 바로 물질에 대한 욕심, 즉 탐심입니다. 예수님은 자기 자신만을 위해서 많은 재물을 소유하기 원하는 것은 제자도에 어긋나는 것임을 ‘어리석은 부자’ 비유를 통하여 가르치고 계십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 비유는 누가복음에만 나오고 있는데 주님은 이를 통해 진정한 부자는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부요한 사람임을 가르쳐주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주님은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대하여 진정한 부자가 되어 하나님 앞에 진정으로 부요한 삶을 누리기를 원하십니다.

주님께서 사람을 두려워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을 두려워하라는 가르침을 하시자 한 사람이 주님께 나와서 자신의 유산 상속 문제를 해결해 달라고 요청합니다. 그때 당시 유대인들은 랍비들에게 가서 이런 문제들을 해결해 달라고 종종 요청했습니다. 왜냐하면 구약 성경에 상속에 대한 규정(신21:15-17; 민27:1-11, 36:7-9)들이 들어 있고 또한 랍비가 그 말씀들을 해석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것을 거절하십니다. 14절, “이르시되 이 사람아 누가 나를 너희의 재판관이나 물건 나누는 자로 세웠느냐 하시고” 성경은 이 사람의 상속 문제에 대해 더 상세하게 설명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래서 어떤 문제가 있었는지 우리는 정확하게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이 사람이 더 많은 몫을 원했다는 것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것으로 우리는 주님이 왜 이 요청을 거절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가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주님을 사용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으십니다. 우리는 하나님 조차도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사용하려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 중에는 하나님을 알라딘 램프의 전능한 지니’로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우리의 원하는 소원과 소망을 들어주고 우리의 이익을 극대화 시켜주는 그런 종류의 신으로 믿으려 합니다. 우리의 믿음도 우리의 이익을 위한 도구와 수단으로 사용하려고 합니다. 사도 바울은 딤전 6:3, 5절에서 이에 대해 정확하게 경고하고 있습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말씀과 경건에 관한 교훈을 따르지 아니하면…마음이 부패하여 지고 진리를 잃어버려 경건을 이익의 방도로 생각하는 자들의 다툼이 일어나느니라” 믿음을 이익의 수단으로 생각하는 사람은 다툼을 일으킬 뿐입니다.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을 속일 수도 있고 때때로 자기 자신을 속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주님은 속지 않으시며 우리 모두의 마음을 환히 보시며 다 알고 계십니다. 갈6:7,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을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이런 이유로 예수님은 그 사람의 요청을 거절하십니다. 주님은 자신의 이익을 위하여 주님을 사용하시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주님은 사람들이 그렇게 주님을 무시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십니다. 그리고 또 한가지 주님이 이 사람의 요청을 거절한 이유가 있는데 이것은 더 근본적인 이유 때문입니다. 지금 이 사람은 그의 형제로부터 더 많은 재물은 원합니다. 이 사람의 마음속에는 탐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이 사람이 더 많은 재물을 가지게 되더라도 그의 마음속에 있는 탐심으로부터 자유 하지 못하면 그가 만족하지 못할 것을 아셨습니다. 그래서 주님은 그의 재산 분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이 아니라 더 중요한 그의 마음안에 있는 탐심의 문제를 다루시기 시작하십니다. 

주님은 그에게 그가 받은 유산의 몫보다 그의 마음안에 있는 탐심을 잘 다루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경고하십니다. 15절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우선 성경은 모든 종류의 탐심을 물리치라고 경고합니다. 사람들에게는 많은 종류의 탐심이 있습니다. 그것은 돈이 될 수도 있고 음식이 될 수도 있습니다. 또한 그것은 옷이 될 수도 차가 될 수도 있으며 집이 될 수도 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이런 유형의 것뿐만 아니라 무형의 것을 끊임없이 욕심 낼 수 도 있습니다. 그것이 무엇이 되었든지 일단 우리가 그것을 나를 위하여 끊임없이 더 가지기 원하게 되면 그것은 탐심이 되어 우리를 사로잡을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를 파괴하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여러가지 형태의 탐심 가운데 특별히 물질에 대한 욕심을 물리치라고 경고하십니다. 왜냐하면 진정한 삶은 물질에 달려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우리는 이 말이 우리에게 돈이 필요 없다는 뜻이 아니라는 것을 압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을 살아가는데 필요하고 우리에게 편안함과 편리함을 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잠시 동안이며 궁극적으로 우리에게 진정한 행복과 만족을 제공해 주지는 못합니다. 오히려 우리는 지금도 세상의 최고 부자들이 그들의 고민과 갈등으로 인해 겪고 있는 그들의 불행을 뉴스를 통해 듣고 있습니다. 그리고 생명과 관련해서는 더 말할 필요도 없습니다.    

어떤 사람이 소유에 대한 욕심으로 끊임없이 그것을 추구하게 되면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 무감각해 질 것입니다. 이렇게 탐심은 우리의 진정한 삶의 모습을 일그러뜨리고 파괴합니다. 왜냐하면 우리가 원하는 진정한 삶은 관계안에서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과 신뢰로 연합된 부부관계, 믿고 의지할 수  있는 친구관계, 즐거운 직장 동료관계, 존경과 사랑으로 존중하는 부모와 자녀관계. 그리고 무엇보다도 진정한 삶은 우리가 하나님과 그의 뜻과 올바른 관계를 맺고 있을 때에 누릴 수 있습니다. 

그리스 신화를 보면 마이더스 왕은 엄청난 재산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더 많은 부귀를 원했습니다. 그래서 그는 술의 신 디오니소스에게 그가 만지는 모든 것은 다 황금으로 변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게 되고 그 일은 실제로 이루어지게 됩니다. 이에 신이 난  왕은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황금으로 만드는 일에 열중했습니다. 그러다 왕이 목이 말라 물을 마시려고 하는데 물 마저도 황금으로 변했습니다. 그리고 그는 배가 고파도 음식을 먹을 수가 없었습니다. 음식까지도 황금으로 변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 그만 자신의 황금의 손을 의식하지 못하고 사랑하는 딸을 만지고 말았습니다. 그 순간 그의 사랑하는 딸도 황금으로 변해 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는 자기가 만들어 놓은 황금의 세계를 바라보면서 해가 지는 황혼 녘에 절규하며 소리쳤습니다. “내가 원한 것은 황금이 아닙니다! 나의 딸의 생명을 돌려주십시오. 내가 원한 것은 황금이 아닙니다! 한 모금의 물입니다” 우리는 이전에 사랑했던 사람들과 더이상 기쁨의 교제와 관계를 나누지 못하게 하는 이 마이더스의 손을 오늘날도 볼 수 있습니다. 지금도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재산으로 인해 그들이 가장 사랑하고 가장 가까웠던 사람들과 법정에서 소송을 벌이고 있습니까? 

이렇게 탐심은 우리의 삶을 물질과 관련하여 정의함으로 하나님이 우리를 지으신 목적과 전혀 반대되는 삶을 살게 합니다. 즉 그것은 우리와 세상을 지으신 창조주 하나님을 무시하고 피조물을 섬기게 만듭니다. 이런 이유로 성경은 탐심은 우상숭배라고 단언하십니다. 골3:5,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탐심은 일종의 신이 되고자 하는 성향을 가지고 있으며 사람들이 나쁜 일들을 행하도록 부추깁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본문에서 한 가지 비유를 통해서 탐심을 가진 사람이 얼마나 어리석은 사람인지를 우리에게 가르쳐 줍니다. 우리는 보통 이 비유를 어리석은 부자’ 비유로 알고 있습니다. 왜냐하면 이 이야기의 끝에서 하나님이 이 부자를 ‘어리석은 자’로 부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예수님의 이 비유가 우리에게 큰 호소력을 주는 이유가 있습니다. 주님의 비유들은 늘 우리에게 큰 감동과 교훈을 줍니다. 그럼 오늘 이 비유가 우리에게 주는 충격은 무엇입니까? 그것은 하나님이 말하는 이 어리석은 부자는 그 때도 그렇고 지금도 사람들에게는 전혀 어리석은 사람처럼 보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오히려 이 부자는 사람들에게 분명히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으로 보였을 겁니다. 성경은 이 사람이 부정직한 하거나 부도덕한 방법으로 소유를 늘렸다고 말하지 않습니다. 지금 우리가 이 사람을 본다면 우리 눈에 그는 능력 있고 실력 있는 사업가입니다. 그는 또한 신중한 사람입니다. 그의 수확을 저장할 공간이 부족하자 당황하지 않고 그는 곰곰이 생각하고 효율적으로 계산하여 그것들을 저장할  새로운 공간을 만듭니다. 이처럼 그는 사업을 잘 계획하고 잘 실행하여 많은 이익을 만들어 낼 뿐만 아니라 또한 미래를 위해 잘 투자하는 정말 흠잡을 데가 없는 CEO 입니다. 

그러나 사람들의 눈에는 능력 있는 이 부자를 하나님은 어리석은 자라고 정의 내리고 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이 어리석은 부자의 잘못이 무엇입니까? 우선 이 어리석은 부자는 소유를 자기 자신만을 위한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그가 이런 생각을 한 이유는 자기가 이 모든 것을 이루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그는 풍성한 소출이 모두 자기의 공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런 생각때문에 그는 그의 모든 부를 자기 자신만을 위해 쓸 계획을 세웁니다. 여기에서 그의 관점에 있는 문제점이 발견됩니다. 그의 재산은 그 혼자 이룬 것이 아닙니다. 거기에는 많은 다른 사람들의 땀과 협력이 들어 있고 무엇보다도 하나님의 은혜와 도움이 있었기에 가능했습니다. 무엇보다도 엄밀히 말하면, 그의 수확은 하나님이 준비해 주신 모든 자연이라는 셋팅 위에서 다른 사람들의 노력에 의해 이루어진 것입니다. 물론 그도 그의 몫을 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 앞의 것이 제공 되지 않았다면 아무리 그가 그의 몫을 다했어도 이루어지지 않았을 겁니다. 이 진리는 오늘날에도 똑같이 적용됩니다. 그래서 진정한 선진국은 단순히 돈의 많고 적음으로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그 나라의 국민들이 그들의 공동체를 얼마나 감사하고 사랑하는지 그래서 그곳에 자기들의 소유를 얼마나 되돌려 주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우리가 가만히 살펴보면 진짜 선진국들은 그런 모습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본문에서 이 어리석은 부자가 하는 말을 자세히 한번 살펴 보십시오. 그는 온통 나’라는 1인칭대명사를 사용하고 있으며 내가 무엇을 할 것이다’라는 동사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는 모든 단어들 앞에 ‘나의’ 라는 1 인칭 소유격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에게 있어서 모든 것은 자기 것입니다- 내 곳간, 내 곡식, 내 물건, 내 영혼. 그런데 사실 그것은 이 어리석은 부자의 착각이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자기의 모든 소유를 자기가 컨트롤 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지만 실제는 그렇지 않았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가 자기 것이라고 생각한 모든 것의 주인은 사실 따로 있었습니다-하나님.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아 이 땅에서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부요한 자로 살기 위해서는 우리가 하나님의 청지기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우리들에게 그분의 것을 맡기셨고 우리는 단지 몇 십년 동안 그것을 맡아 잘 관리하며 주님의 뜻을 따라 물질을 투자하며 사용하는 것입니다. 그렇게 우리가 신실한 청지기가 되면 이 땅에서 부요한 자로 풍요를 누릴 뿐만 아니라 하나님 나라에서도 영원히 부요한 자로 살게 될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요한 삶을 누리는 부자의 모습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우리 모두가 하나님께 대하여 진정한 부자로 살아가기를 기도합니다 아멘!

두번째로 왜 이 부자가 어리석은 사람입니까? 그는 소유로 삶이 평가되고, 안전을 보장받을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큰 소리로 자신만만하게 스스로에게 외칩니다. 19절, “내가 내 영혼에게 이르되 영혼아 여러 해 쓸 물건을 많이 쌓아 두었으니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거워하자“ 그는 그가 많은 재물을 축적했기 때문에 그의 영혼이 복되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그가 이 세상에서 가장 큰 축복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가 생각하는 그의 모습은 똑똑하고 지적이며 그의 인생은 눈부신 한 낮의 여름과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판단은 전혀 달랐습니다. 20절에 “하나님은 이르시되 어리석은 자여…” 하나님은 그가 똑똑하기는 커녕 어리석은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리고 너무 불쌍한 사람이라고 말합니다. 그는 그의 금고에 많은 재물이 있으니 그의 인생이 평안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많은 건물을 가지고 있으니 그의 미래가 안전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 어리석은 부자는 적어도 몇 십년 동안은 아무 문제 없이 그가 원하는 모든 것을 하며 안전하게 살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생각은 전혀 달랐습니다. 그에게는 미래가 없는 것이 아니라 당장 내일이 없었습니다. 그에게는 당장 내일에 대한 보장과 안전이 없었습니다. 20절, “…오늘 밤에 네 영혼을 도로 찾으리니 그러면 네 준비한 것이 누구의 것이 되겠느냐”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에 가장 중요한 것은 우리가 이 땅에 사는 동안 얼마나 많은 재물을 가졌느냐 에 달려 있지 않습니다. 심판의 날에 우리의 삶을 결산할 때에 주님은 우리 통장에 얼마나 많은 돈을 소유하고 있는지에 관심이 없습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서는 그날에 우리 삶은 우리가 얼마나 많이 가졌는지가 아니라 내가 가진 소유로 무엇을 했는가에 따라 평가될 것입니다. 이 부자는 자기와 사람들에게 가장 똑똑하고 현명한 사람처럼 보였지만 실상은 가장 어리석은 자로 밝혀졌습니다. 그 이유를 주님은 정확하게 가르쳐 주십니다. 21절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 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하지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사랑하는 여러분, 주님은 우리가 이 땅에서 진정으로 부요한 삶을 누리며 살아가기를 원하십니다. 그리고 진정한 부자는 탐심으로 가득차서 자기 자신만을 위하여 재물을 축적하는 것이 아니다고 경고하십니다. 자기 자신만을 위해 부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 가장 가난한 것입니다. 부가 주는 위로와 물질이 제공하는 힘은 우리에게 삶에 대한 거짓된 안전을 제공해 주며 그것은 또한 일시적이며 곧 사라질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진정으로 부요한 삶은 물질적인 대상이 아니라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삶입니다. 우리의 소유를 통해 선한 일을 하며 또한 도움이 필요한 사람들에게 관대하게 베풀어 줄 때에 우리는 하나님께 인정을 받습니다. 그것을 통하여 복음이 증거되고 주님의 교회가 세워지며 사람들의 입에서 하나님의 이름이 높임을 받는다면 그는 하나님 앞에서 진정으로 부요한 사람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한 자로서 진정으로 부요한 삶을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되기를 예수님의 이름으로 축복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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