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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바라는 한 가지 일(시27:4)_밴쿠버하임교회 김성남 목사

바라는 한 가지 일(시27:4)

밴쿠버하임교회 김성남 목사

시27:4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

One thing I ask of the LORD, this is what I seek: that I may dwell in the house of the LORD all the days of my life, to gaze upon the beauty of the LORD and to seek him in his temple.

시27편은 다윗이 사울 왕의 추적을 받아 도망자 신세가 되어 바위틈과 굴 속에서 피난처를 찾을 때에 쓴 시입니다. 다윗이 기록한 시들이 많이 있지만 다른 어떤 시에서도 하나님을 예배하고자 하는 마음이 이렇게 간절히 표현되어 있지 않습니다. 

시27:1-3

1 여호와는 나의 빛이요 나의 구원이시니 내가 누구를 두려워하리요 여호와는 내 생명의 능력이시니 내가 누구를 무서워하리요   

2 나의 대적, 나의 원수된 행악자가 내 살을 먹으려고 내게로 왔다가 실족하여 넘어졌도다 

3 군대가 나를 대적하여 진 칠찌라도 내 마음이 두렵지 아니하며 전쟁이 일어나 나를 치려 할찌라도 내가 오히려 안연하리로다  

그리고 4절에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 곧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 여호와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 그의 성전에서 사모하는 그것이라는 말씀이 등장합니다. 

이 말씀에서 “여호와의 집”은 하나님의 성전을 말하는 것이고, “하나님의 아름다움을 바라보며”라는 말은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본다는 말이고, “그의 성전에서 사모한다”는 말은 그 하나님을 찬양하며 예배한다는 말입니다. 

한 마디로 다윗은 하나님의 성전에서 예배드릴 때 하나님의 임재안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며 살고 싶은 그 소망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내가 여호와 하나님께 바라는 한 가지 소망은 그것입니다라고 고백하는 것입니다.   

좀더 자세히 이 말씀을 분석해보겠습니다. 원문에서 4절 말씀 제일 앞에 오는 단어는 “원띵”입니다. 

“한 가지 일”이라는 단어를 그 절 제일 앞에 두는 것은 그것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한 가지 일이라고 할 때 “바라는 한 가지일”이라고 했는데, “바라다”는 말은 과거로 부터 계속해서 소망했던 것을 말합니다. 

또한 내가 여호와께 바라는 한 가지 일 그것을 구하리니라고 할 때 “구하리니”는 그 한 가지 일을 과거로부터 지금까지 구하여 왔으며, 앞으로도 이것을 계속해서 구할 것이라는 뜻이 담겨있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에 오직 한 가지만을 구하겠다는 말입니다.  제사장이나 레위인처럼 성전에서 상주하겠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전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며 하나님과 교제하고 싶다는 소원입니다. 

언제 말하는 거지요? 내가 내 평생에 여호와의 집에 살면서….평생..생존하는 모든 날 동안에 하나님을 예배하며 살고 싶다는 표현입니다. 

여러분의 소망은 무엇입니까?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를 관통하는 소망! 한 가지만 세워보라면 무엇이라고 말하고 싶습니까?….. 다윗과 같은 소망 있습니까? 

하나님의 소망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창조부터 타락, 구원을 이뤄가심에 한 결 같은 하나님의 소망은 타락한 인간들을 구원하여 하나님의 자녀, 하나님의 백성으로 삼아 교제하는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예수님이 이 땅에 오신 것입니다. 그것을 이루기 위해 성령님을 보내주신 것입니다. 

사도행전 15장16절-17절에 하나님의 소원이 담긴 말씀이 나옵니다. 

행 15:16-17

16 이 후에 내가 돌아와서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지으며 또 그 허물어진 것을 다시 지어 일으키리니

17 이는 그 남은 사람들과 내 이름으로 일컬음을 받는 모든 이방인들로 주를 찾게 하려 함이라 하셨으니

예수님이 오셔서 하시는 일이 다윗의 무너진 장막을 다시 짓는 것입니다. 다윗의 장막이 허물어졌다고 말씀하십니다. 다윗의 장막은 솔로몬 성전이 세워 지기 전까지 약 40년동안 세워져 있었습니다. 모세의 장막과 다윗의 장막의 차이가 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는 짐승제사가 있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장막에는 경배와 찬양이 있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는 장소에 따라 들어갈 수 있는 사람들의 직분이 달랐습니다. 다윗의 장막은 그 자체가 지성소였기에 예배자들이 들어가서 찬양하는 곳이었습니다. 모세의 장막에는 지성소가 따로 있어서 하나님의 임재를 그곳에서만 일년에 한번 체험했지만, 다윗의 장막은 그 자체가 지성소였기에 하나님을 찬양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하고, 하나님의 임재 안에서 회복되는 장소였습니다. 대제사장만, 일년에 한번 체험할 수 있는 것을 예배자 누구든지 체험하며 누리게 한 것입니다. 그 시대 예배 방법으로는 파격적이었습니다. 

다윗의 장막에서 악기로 찬송하는 사람들이 사천명이나 되었습니다. 24시간 열려 있어서 순번대로 돌아가면서 찬양하며 예배를 했습니다. 솔로몬 성전시대가 열리면서 다윗의 장막은 역사속에서 사라지게 됩니다. 더 불어서 하나님 앞에서 그렇게 열정을 다해 예배드리던 일들도 점차적으로 사라지게 되고 결국은 나라 자체가 망하게 됩니다. 

하나님은 무너진 다윗의 장막을 회복시키겠다고 하셨습니다. 무너진 다윗의 장막은 무너진 하나님에 대한 예배, 허물어진 하나님과의 교제를 의미합니다. 마지막 때에 예배의 회복, 교제의 회복을 일으키시겠다는 것입니다. 

주일예배를 참석하고 수요예배, 금요 예배를 참석했다고 해서 저절로 회복이 되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하나님을 향한 열정이 삶 가운데 있습니까? 예배 가운데 있습니까? 행15:16절 말씀을 하실 때 기준으로 하면 다윗의 장막은 천년전 일입니다. 지금으로 부터면 3천년 전 일입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잊지 못하십니다. 천년이 지나도, 삼천년이 지나도 잊지 못하는 예배와 그 안에서의 친밀한 교제!!

우리 회복할 수 있을까요?  있습니다. 하나님이 원하시고, 찾으시고, 받으시는, 축복하시는 예배가 있습니다. 

요4:23-24

23 아버지께 참되게 예배하는 자들은 영과 진리로 예배할 때가 오나니 곧 이 때라 아버지께서는 자기에게 이렇게 예배하는 자들을 찾으시느니라 

24.하나님은 영이시니 예배하는 자가 영과 진리로 예배할지니라

영과 진리로 예배하라는 말은 성령이 주시는 열정과 진리를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하라는 말씀입니다. 내 열정은 상황에 따라, 기분에 따라 업엔 다운이 되지만 성령이 주시는 열정은 상황이나 기분에 상관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영이십니다. 영이신 하나님과 교제하려면 내가 거룩한 영의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예배의 자리에 성령님이 임재해 계십니다. 모든 예배 순서 순서마다 성령의 임재가 있습니다. 찬양, 기도, 말씀, 헌금…모든 예배시간에 성령님 생물처럼 살아 역사 운행하십니다. 그러므로 성령의 임재를 더 구하고 사모하는 것은 예배에서 핵심입니다. 

종교개혁자 칼빈에게 있어서 예배의 핵심은 성령의 임재였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부흥이라는 책에서 하나님의 성령이 역사하시지 않을 수록 예배는 형식화되어간다. 반면, 신앙이 회복될 수록 성령이 주관하시는 예배가 된다”라고 말했습니다. 로이드 존스 목사님은 예배에서 성령을 소멸시키는 것에 대하여 경고를 이렇게 했습니다. 

“11시에 시작해서 순서지에 적힌 순서대로 진행하다가 12시 축도로 마칩니다. 프로그램에 메여 있어서 성령께서 역사하실 틈이 없지 않습니까? 어째서 이처럼 형식적이 되었습니까? 모든 것을 이처럼 묶어 두는 것은 무엇 때문입니까? 성령께서 갑자기 임하시면 어떻게 하시렵니까? 저는 매우 심각하게 이 문제를 여러분에게 말씀드립니다.”

존 파이퍼 목사님도 예배의 의식적인 부분이 하나님께 의미가 없을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예배의 의식이나 형식이나 프로그램이 성령님보다 우선할 수 없습니다.

진리로 예배하는 말은 복음의 진리를 받아들인 사람이 복음을 담고 있는 하나님의 말씀을 사모하는 마음으로 예배드리는 것입니다. 사마리아 여인이 예수님께 예배를 어떻게 드려야 합니까라고 묻자 예수님은 프로그램이나 의식 또는 형식을 이야기 하지 않으셨습니다. 영과 진리로… 이 사람이 바로 참된 예배자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예배자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 관계, 예배의 회복을 위해 이 질문을 해보겠습니다.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의미입니까? 

예수님은 당신에게 누구입니까?

예수님은 당신에게 어떤 존재인가라고 묻는 것입니다. 

다윗에게 하나님은 정말 목자였고, 생명이었고, 빛이었으며, 방패, 산성, 반석이 되어 주셨습니다. 그것을 다윗은 무슨 교리를 배워서, 책상에 앉아서 배운 것이 아닙니다. 삶 속에서 하나님과 교제하면서 깨닫게 된 내용들입니다.  다윗이 시편에서 고백한 하나님에 대한 모든 고백은 진심이었습니다. 그 진심이 다윗의 삶 가운데 전심으로 표현되었습니다. 

다윗의 일생이 평탄한 인생이라서 그렇게 고백한 것이 아닙니다. 일생을 연단을 통해서 하나님이 세우신 왕의 자리에 올라간 사람입니다. 베들레헴, 기브아, 아둘람, 헤브론 그리고 예루살렘까지 다윗의 여정은 한 마디로 고난과 연단의 여정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모든 순간에 다윗은 한결같이 하나님을 향해 사랑과 믿음의 고백을 합니다. 그 고백이 기도가 되었고, 찬양이 되었고, 예배가 되었습니다.   

시편 150편 가운데 다윗이 기록한 시가 73편이나 됩니다.   히브리어로  “테힐림(םילהת)”이라고 불렀으며 그 뜻은 “찬양의 노래들이라는 뜻입니다. 시편을 기록한 첫째 목적은 하나님께 예배를 위함입니다.  

73편 가운데 예배에 대한 가장 강렬한 고백이 우리가 살펴보고 있는 시편 27:4절입니다. 다윗의 무너진 장막, 허물어진 다윗의 장막처럼 우리들의 삶 가운데 무너지고, 허물어진 영적인 영역이 많습니다. 더 큰 문제는 변화하고 싶은 의지가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과의 교제가 중요하고 예배가 중요함에도 하나님과의 교제나 예배에 있어서 매주 같은 마음이나 자세로 드린다면 하나님과의 교제가 회복이 될까요? 예배 가운데 임재하시는 하나님의 영광을 체험할 수 있을까요? 

느헤미야는 페르시아의 왕 아닥사스다가 마시는 술을 담당하는 술관원이었습니 다. 왕이 마시는 술은 아무나 세울 수가 없습니다. 왕이 절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어야 합니다. 아닥사스다 왕이 참으로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이 느헤미야였습니다. 그런 그가 어느 날 왕 앞에 섰는데 얼굴에 근심이 가득했습니다. 왕이 묻습니다. 무슨 일이 있느냐?? 이유가 있었습니다. 

그가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벽이 불탔다는 이야기를 전해 들었기 때문입니다.  

느1:3-4. 

3 그들이 내게 이르되 사로잡힘을 면하고 남아 있는 자들이 그 지방 거기에서 큰 환난을 당하고 능욕을 받으며 예루살렘 성은 허물어지고 성문들은 불탔다 하는지라 

4 내가 이 말을 듣고 앉아서 울고 수일 동안 슬퍼하며 하늘의 하나님 앞에 금식하며 기도하여

성이 무너지고, 성문이 불탔다는 말을 듣고 슬퍼하며 울며 금식하며 기도합니다. 

그리고 그는 왕의 허락을 받고 총독이 되어 예루살렘으로 돌아갑니다. 그리고 52일만에 성벽을 재건합니다. 

성과 성벽이 무너진 것으로 인하여 슬퍼하고 금식하며 울 수 있는 마음! 그 마음이 우리에게 필요합니다. 그것으로 부터 회복이 시작되기 때문입니다. 무너진 것을 그냥 방치하면 방치한대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온갖 종류의 어둠의 세력들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공격을 하고 또 공격을 해서 마지막 남은 모든 것 까지 취해 가려 합니다. 하늘로 부터 주어지는 귀하고 복된 모든 것들을 막기도 하고, 빼앗아 가기도 합니다. 그렇게 무너지고 허물어진 영적인 상태는 무장해제된 군인과 같습니다. 

전신 갑주를 입으라고 했더니 어디다 벗어 두었는지도 모르고, 뭐가 부족한지도 모르고 그저 살아가면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 성도들에게 말한 것처럼 영적으로 약한 자, 잠든 자, 병든 자가 됩니다. 

고전11:30 그러므로 너희 중에 약한 자와 병든 자가 많고 잠자는 자도 적지 아니하니

결론

다윗에게 하나님은 실제였습니다. 정말 목자였습니다. 여러분들에게 하나님은 실제하시는 분이십니까? 그 하나님을 향한 깊은 갈망이 있습니까? 

예배 또는 교제가 회복이 되면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영혼육뿐만 아니라 더 넓게는 사회에도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러나 예배나 교제가 무너지면 그것을 기점으로 해서 영, 혼, 육, 관계, 사회가 균열을 일으키게 되고 수많은 문제들이 일어납니다.  

찬양, 기도, 말씀, 성령과 동행하는 삶….이 가운데 무너진 영역인지 정직하게 살펴보십시오. 그리고 무너진 그 부분이 회복되길 간절히 소망하십시오. 하나님이 찾으시는 바로 그 예배자들이 되길 소망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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