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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경계를넘는용기, 경계인의행복_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최종원 교수

경계를 넘는 용기, 경계인의 행복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미팅에 오신 모든 분들을 환영합니다. 매 학기 이 모임을 할 때마다 마치 가족 상견례 하는 듯한 긴장이 듭니다. VIEW에서 배우고 가르치는 당사자들만 모임이 아니라, 가족들까지 함께 하다 보니 가족분들은 VIEW에 대한 어떤 인상을 갖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여기에 십 년 이상 거주한 저 같은 사람과 최근에 캐나다에 들어온 분들이 가지는 공통점이 무엇일까요? 경계인(liminality)이 아닐까요? 모두 그러지는 않겠지만, 경계인으로서 겪는 정체성과 문화적 갈등은 시간이 지난다고 사그라지지는 않습니다. 내일이 설날입니다. 별것 아닌 그 날이 오면 새삼스레 고향과 가족이 기억나고 그리워집니다. 

성경에서 경계인의 설움을 잘 나타낸 것은 시편137편에 나오는 바빌론 강가에서 고향을 기억하며 울었던 이스라엘인들에 대한 기록입니다. 바빌론에 패해서 포로로 끌려간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이 나옵니다. 그들은 하루의 고된 노동을 마치고 어스름한 저녁 무렵에 바빌론 강가에 앉아서 자신들이 떠나온 고향을 기억하며 울었습니다. 그들을 괴롭히는 바빌론 사람들이 이스라엘 포로들에게 고향의 즐거운 노래 한 자락을 부르라고 청했습니다. 이 얘기를 더 하면 신파가 되겠지요. 과하게 무거울 필요는 없습니다. 이제는 한국을 떠나는 것이 평생 못 볼 것 같은 헤어짐은 아닙니다. 더군다나 10시간이면 인천공항에 넉넉히 도착하는 밴쿠버의 삶은 더욱 그렇습니다. 

그럼에도 국경을 넘는다는 것, 나의 언어와 문화의 경계선을 넘어 다른 경계 속으로 들어가기란 만만한 경험은 아닙니다. 물리적 국경만 해도 그렇습니다. 코로나19를 겪으면서 별로 생각해 보지 않았던 것을 다시금 생각하게 만듭니다. 세상은 국경이 허물어지는 것 같았는데, 코로나19를 겪으면서 우리는 국경봉쇄라는 낯선 상황을 맞닥뜨렸습니다. 얘기치 않게, 경계가 도드라졌습니다. 국경을 넘어 캐나다에 들어오거나, 미국 육로 국경을 건너거나 그 무엇이든 대부분 국경에서의 경험은 그리 좋지 않습니다. 긴장, 불안, 불쾌감 등의 단어가 가장 다가옵니다. 국경을 건너고 나면 안도감이라는 감정이 듭니다. 

우리 모두는 그 경계를 넘어 다른 경계선 안에 들어왔습니다. 경계인은 서로 다른 문화, 심지어 적대적이기까지 한 문화를 가지고 있는 두 사회에서 살도록 운명 지어진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형성하고 가지고 온 문화는 이 땅에서 주류는 아닙니다. 충돌하는 두 문화 속에서 살아가는 경계인은 양면성을 갖습니다. 새로운 문화 속에서 느끼는 해방감도 있지만, 새로운 문화가 우리의 민족적, 문화적, 종교적 정체성을 흔들어 놓을 수 있다는 위험도 본능적으로 느낍니다. 늘 경계를 늦추지 않는 보수성이 경계인의 특징이기도 합니다. 그래서 섬이 되기 쉽습니다. 실제 한인 커뮤니티들은 이 땅에서 섬처럼 살고 있습니다. 넘쳐나는 문화에서 스스로를 지키고, 자녀들과 우리의 미래를 지키기 위해서 말입니다. 그에 대한 동의 여부를 떠나 경계인으로 살아가는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입니다. 열린 사회 속에서 숨쉬는 것을 뿌듯해 하지만, 가장 닫혀 있는 이 모순의 삶을 살아가는 것이 경계인일 수 있습니다. 

그러면 국경을 건너는 삶은 언제부터 이렇게 일상적이 되었을까요? 잠깐 언급했던 바빌론의 이스라엘의 경험에서도 그러했듯이, 대부분 근대 사회에서 경계를 넘는 이주민의 역사는 식민지 경험과 연결되어 있습니다. 이른바 더 나은 사회, 발전된 문화를 찾아가는 길을 떠났습니다. 유럽 이민사는 2차대전 이후 식민지였다가 독립한 나라들에게서 노동력을 수급 받고자 대규모 이민을 받아들이면서 시작되었습니다. 한국도 예외는 아닙니다. 북미 이민사의 대표라고 할 수 있는 1900년 초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 이주는 미국의 값싼 노동력에 대한 필요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익숙한 터를 넘어 다른 경계 안으로 들어오는 경험은, 다른 우월하다고 흔히 여겨지는 지배적 문화권으로 들어오는 불균형의 경험입니다. 우리의 문화나 정체성이 이 지배 문화권이 보이는 배타성이나 편견을 겪을 때, 주변성, 한계성을 마주합니다. 그 속에 살아가는 이들은 경계인이 됩니다. 경계에 서 보는 삶, 경계인이 되는 경험, 그 속에 유쾌하지 못한 기억들이 들어올 수도 있습니다. 완전히 수용되지도, 그렇다고 다시 이전의 문화로 완전히 돌아가지도 못하는 이중의 공간에 갇히게 됩니다. 사회학에서는 이런 경계인들의 선택지를 동화(assimilation), 회귀(return), 평형(poise), 초월(transcendence)이라는 네 자리로 표현합니다. 완전히 동화되거나, 과거의 문화로 돌아가거나, 그 안에서 비틀거리며 균형을 시도하거나, 아니면, 그 모든 것을 초월하는 것입니다. 아마 완전한 초월이 가능한지는 모르겠습니다. 어쩌면 이 속에서 대부분의 선택은 평균대 위에서 팔을 들어 올려 평형을 유지하려고 애쓰는 삶이지 않을까 싶습니다. 

평형 잡기를 추구하는 속에서 생성된 가치를 문화 혼종성(hybridity)이라고 표현합니다. 혼종성은 이질적인 문화권에 살면서 경계인의 삶의 정체성을 유지하면서 지배 문화와 균형 잡기를 시도할 때 얻어지는 결과물입니다. 혼종성은 정체성 포기라는 혐의를 받기도 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강제하지 않아도 자기 검열과 긴장을 쉽게 버릴 수 없습니다. 그런데 모든 새로운 문화는 이 경계와 경계가 만나는 공간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불안정하고 틀이 없다 보니, 낯선 것에 대한 수용성이 있습니다. 혼종성이 창조하는 문화는 지배 문화에 젖은 사람들에게 자신을 돌아보게 하고, 비주류 경계인들의 정체성과 고민이 들려지게 할 수 있습니다. 아마 한국계 미국인 작가 이민진의 ‘파친코’ 같은 작품이 그 대표적인 사례이겠지요. 

기독교의 역사도 이 문화적 혼종성과 무관하지 않습니다. 초기 기독교의 확장은 경계를 넘는 만남 속에서 가능했습니다. 바빌론 유수 70년의 시간이 지난 후에 귀환한 사람들도 있지만, 그 땅에 남아 헬레니즘 문명권 전역으로 흩어져 뿌리내리게 되었습니다. 이들을 ‘디아스포라’라 부릅니다. 가장 큰 디아스포라 공동체는 이집트에 있었습니다. 헬레니즘 문명이라는 당대의 지배 문명 속에서 그들은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지키고 세대 간에 계승해야 하는 고민을 안고 있었습니다. 히브리말보다 헬라어에 익숙해진 세대들에게 히브리의 종교적 정체성을 이어가는 일은 쉽지 않았습니다. 그 해결책의 하나로 가장 큰 디아스포라 공동체가 있던 이집트 알렉산드리아에서 히브리 말 성경의 헬라말 번역 작업이 이루어졌습니다. 이 번역 성경을 칠신입역이라고 부릅니다. 

헬라 세계의 공용어인 헬라말로 유대인의 경전이 번역되면서, 뜻하지 않은 문화 혼종성이 출현했습니다. 이로써, 유대의 종교에 관심을 가진 헬라인들이 자기들의 언어로 번역된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비록 유대교에 입교하지는 않았지만, 히브리인들의 하나님을 믿고 경외하는 사람들의 무리가 생겼습니다. 이방인이면서 여호와 신앙을 가진 그들을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들’(God fearers)이라고 부릅니다. 혼종성은 거기 머물지 않았습니다. 헬라인이면서 히브리 종교의 주변에 머물던 사람들이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문명인이나 야만인이나 차별이 없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들었을 때, 기독교로 빠르게 개종하게 되었습니다. 만약 히브리인들이 민족적 가치를 고수하느라 히브리 성경의 헬라말 번역을 거부했다면, 복음의 세계화는 이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지지 못했을 것입니다. 헬라 문화 속에 경계인으로 살던 유대인들이 성경 번역으로 만들어낸 종교적 혼종성은, 여호와 신앙을 간직한 종교적 경계인인 헬라인들이 그리스도의 세계로 들어올 토대를 만들었습니다. 바로 바빌론 강가에서 시온의 노래를 부르지 못해 괴로워하던 바로 그들을 통해 엄청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이처럼 혼종성은 경계 속에서 새로운 창의성을 만들어냅니다. 우리네 한국인들은 선명성, 단일성, 순수성을 좋아합니다. 더욱이 교회에서는 혼합이라는 단어만 들어도 경기를 일으키지요. 생명은 무균실의 삶에서 이어지지는 못합니다. 고립 속에 시들거나, 경계 속에서 새로운 창조를 이루어 내거나, 입니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우리는 익숙한 지리, 문화, 언어의 경계를 넘어 낯선 곳에 왔습니다. 낯선 땅에 적응하는 우리는 낯선 영성에도 적응해야 합니다. 물리적 공간만이 아니라, 우리의 심성 역시 익숙한 자리를 떠나 경계선에 서는 용기가 필요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새로운 가치를 만들어 내는데 기여하는 의외의 행복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거창하게 경계인, 혼종성 얘기를 했지만, 캐나다의 삶은 실은 대부분 단순합니다. 이 고민하지 않고도 살아내기에 어쩌면 충분한 환경인지 모릅니다. 그럼에도 한 번 정도는 우리의 자리를 생각을 해 볼 수 있으면 좋겠다 싶어 환영의 말씀으로 나누었습니다. 우리는 의식하는만큼 살아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낯선 땅에 잘 오셨습니다. 잘 살아내십시오,를 이렇게 장황하게 길게 한 것입니다. “잘 오셨습니다. 잘 살아내십시오.”

밴쿠버기독교세계관대학원 최종원 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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