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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동네목사개척이야기] 인과응보유감

인과응보유감

“자업자득(自業自得)”이라는 말이 있다. ‘자신이 한 일로부터 자신이 이득을 얻는다’는 뜻이지만 이 말은 주로 부정적 의미로 쓰인다. 지난주, 이번주가 중고등학교 기말고사 기간이다. 자녀가 공부를 열심히 해서 좋은 결과를 얻었을 때 “잘했네 자업자득이지” 라고 쓰지는 않는다. 공부를 하지 않다가 좋지못한 결과를 얻었을뿐인데 시험에 대해 불평을 쏟아놓는다면 “그럴줄 알았어. 자업자득이지”라고 말한다. 이 말 맥을 같이 하는 말이 있다. 바로 “인과응보”이다. 원인이 있으니 결과가 따라왔다는 뜻으로 도덕과 윤리에 대해 가장 보편적인 원리이다.

드라마 ‘더 글로리’하면 떠오르는 명대사가 있다. “연진아 나 지금 되게 신나, 브라보 연진아”
이 드라마에서 악역의 대명사 박연진과 대립된 인물 문동은 중에서 누구를 응원하는가? 사람들은 악한 사람이 흥왕하는 것보다 억울한 일 당한 사람이 아픔을 딛고 일어나 재기하길 응원한다. 이것은 권선징악, 인과응보에 대한 보편적 정서를 말한다.

잘못한 사람, 나쁜 짓을 마땅히 대가를 치르고, 응징 당한다면 착한 사람들이, 법을 잘 지키는 사람들이 억울하지 않은 세상이 될 것이다. 악한 일도 줄어들고 나쁜 일, 나쁜 사람이 줄어들 것이다. 자업자득, 인과응보의 법칙이 모든 사람, 모든 사건에 그대로 적용된다면 우리 사회가 좀 더 공의로운 사회가 되지 않을까?

그런데 세상의 사건들과 그 사건에 얽혀 있는 사람들은 흑과 백, 명과 암으로 선명하게 구분되지 않는다. 사실은 선과 악이 혼재되어 있다. 중학교 자녀로부터 교내에서 발생한 학교폭력에 대한 이야기를 종종 듣는다. 학교폭력 문제만해도 피해자가 어느새 가해자가 되어 있어 학폭 문제는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과관계가 꼬인 실타래 같을 때가 많이 있다.

그래서 권선징악, 인과응보의 경계선이 모호해지고, 선한 뜻이 포함되어 있지만, 악한 요소가 일부 혼재되어 있고, 악의 경향이 강한듯하나 선한 의지가 간섭되어 있다. 때문에 어떤 사건의 당사자와 그로 말미암은 피해자가 겪는 고통에는 뿌린대로 거든다는 인과응보의 원리를 적용하기는 어렵다. 더욱이 압도적 재앙이나 갑작스런 고통을 당한 경우에 인과응보를 적용하는 것은 오히려 2차 피해와 상처를 발생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인과응보는 고통의 문제에 대해 한계를 가진 설명이다.

문제는 응과응보의 원리가 신앙과 결합이되면 종교적 도그마로 변질되는 순간이다. 2011년, 일본에 쓰나미가 밀려왔을 때 많은 교회들이 일본이 수많은 우상과 2차세계대전 전범국으로서 회개하지 않았기 때문이라며 이런 만났다며 설교의 예화로 사용하였다. 때문에 우리도 회개하지 않으면 압도적 재앙에 노출될 것이라는 목소리를 높았다. 이것은 일본이 당한 쓰나미 사건에 국한된 메시지가 아니라 세계사에 일어나는 자연재앙, 압도적 고통의 사건마다 그런 재앙이 닥칠만한 죄악이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죄악을 회개하라는 목소리가 드높았다.

인간이 항거할 수 없는 자연적 재앙과 이로 인해 고통당하는 사람들에게 인과응보는 적실한 해석이었을까? 장애 자녀를 가진 많은 부모의 공통점 중 한가지는 “내 죄가 많아서 아이가 저렇게 되었다, 내 죄를 아이가 대신받았다”고 한다. 아니다. 그렇지 않다. 성경과 교회사를 관찰하면 신실한 믿음의 사람들이 기근에 굶주리거나 전쟁의 칼을 만나거나 언어폭력을 당하거나 파멸되었던 일이 많이 있었다. 예수님조차도 십자가에서 비웃음과 조롱, 멸시와 폭력적 고통을 받으셨다. 개인에게 일어난 고통의 상황을 죄를 심었으니 그런 결과가 있는 것이라 퉁칠 수는 없다.

나쁜 짓을 당하거나 고통과 재앙을 당한 사람이 있다면 그럴만한 죄를 지어서 일까? 이 해석에는 한계가 있다. 만일 나쁜 일, 불행한 일 당한 사람을 인과응보의 원리로만 판단한다면 “그럴만한 짓을 했으니 그런 결과를 얻는 것”일까? 이것은 고통을 당한 사람에게 현실적 고통 외에도 죄책감과 자책감이 너 자신에게 있다는 고통을 가중하는 꼴이 된다.

사실 압도적 고통과 재난을 당한 사람들은 “하늘이 자리를 벌하거나 버림받았다”라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 이 지점에서 마음은 낙심과 분노라는 두가지 방향으로 전개된다. 마음이 낙심으로 기운다면 살 소망을 잃어버리게 된다. 하지만 분노로 마음이 기운다면 신에 대한 노여움으로 저주하는 인생을 살게 된다.

이러한 생각은 정말 무서운 것이다. 왜냐하면 하나님은 우리의 일거수, 일투족을 감시하다가 죄의 요소를 발견하면 그대로 되갚는 분이시 때문이다. 모든 죄를 보시고 그대로 심판하시는 하나님은 너무나 끔찍이다. 스치듯 지나간 잘못된 생각, 잠시 생겼다가 사라진 악한 마음까지 모든 것을 벌하신다면 우리 모두는 죄인으로서 매일 심판을 받아야 하는 사람들이다. 때문에 인과응보는 유감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보다 훨씬 자비롭고 부요한 분이시다. 홀로 된 한 여성이 자녀들을 키우면서 자신에게는 조금 버거운 주택 융자금을 매달 납입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느 날 실직까지 하고 말았다. 더 이상 은행빚을 갚을 수가 없게 되었고, 몇 달 후에는 자녀들과 함께 살아가던 집까지 잃을 지경이 되었다. 그런데 그 사실을 알게 된 한 친구가 그녀의 빚을 대신 갚아주었다. 그녀의 연체금을 갚았다. 바로 이것이 성경이 말하는 은혜이다. 죽어 마땅하고, 가진 전부를 잃어도 마땅히 대꾸할 말이 없는 죄인인 우리를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죽음으로 대속해준 것이다. 이로 인해 우리는 하늘의 것과 땅의 것을 누리게 만들어 주신 것을 ‘은혜’라고 한다. 우리는 인과응보의 원리에 나와 세상을 적용하여 살아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의 원리’로 세상을 바라볼 때 훨씬 살만한 세상이 된다. 우리를 이렇게 까지 사랑하는 하나님의 사랑 안에서 용납받았다는 것을 받아들이고 은혜로 살아가는 하루가 되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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