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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스승의 본_에스와티니 기독의과대학교 양승훈 총장

스승의 본

오래 전 제가 미국 매디슨에 있는 위스콘신 대학 과학사학과 대학원 석사과정에 공부하고 있을 때의 일입니다. 저는 창조론 연구에 관심이 많았기 때문에 과학사는 물론 창조론 역사에서 최고의 권위자라고 할 수 있는 로널드 넘버스(Ronald L. Numbers) 교수님이 재직하시는 위스콘신 대학으로 유학을 간 것이었습니다. 졸업논문으로 어떤 주제를 택할까 고민하다가 교수님과 의논한 끝에 창조연대 논쟁과 관련된 주제를 정했습니다. 제가 물리학을 전공했으니 그와 관련된 주제를 정하는 게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입니다. 

구체적으로 저의 논문은 1940년대 후반에 등장한 탄소연대측정법을 둘러싸고 1950년대에 미국 복음주의 학자들 간에 일어났던 논쟁과 그로 인해 결국 미국 복음주의 과학자들이 분열하는 과정을 추적하는 것이었습니다. 탄소연대측정법을 둘러싸고 생긴 논쟁으로 인해 미국 복음주의 과학자들의 연합체였던 미국과학자협회(American Scientific Affiliation)가 분열하였습니다. 다시 말해 탄소연대를 받아들인 사람들은 ASA에 그대로 남았고, 거부한 사람들은 ASA를 탈퇴하고 나가서 별도로 창조과학연구협회(Creation Research Society)를 만들었습니다. 그리고 그 중심에 있었던 사람 중 한 사람이 바로 창조과학자 헨리 모리스였습니다.

이 분열이 미국 복음주의 과학자들 사이에서는 중요한 사건이었지만 일반인들이나 일반 과학사가들에게는 큰 관심사가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이 사건이 20세기 중반에 일어난 사건이었기 때문에 도서관에서도 관련 문헌을 찾는 것이 쉽지 않았습니다. 결국 저는 논문 작성을 위한 대부분의 연구들을 넘버스 교수님이 댁에 개인적으로 소장하고 계시는 자료들에 의존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마침 당시에 넘버스 교수님도 창조론 역사를 다룬 방대한 원고를 준비하고 계셨고, 그 원고의 1차 문헌들이 대부분 교수님 댁의 반지하 서재에 보관되어 있었습니다. 

넘버스 교수님 댁은 위스콘신 대학에서 버스를 타고 저의 집까지 가는 중간, 윙그라 호수(Lake Wingra)라는, 누에고치를 닮은 1.4제곱Km 정도 되는 작은 호숫가에 있었습니다. 교수님 댁은 호변의 약간 경사진 곳에 있었기 때문에 길에서 보면 1층인데 호수 쪽에서 보면 2층인, 좀 오래된 집이었습니다. 크기는 1, 2층 모두 합쳐서 대략 70평 남짓했는데 미국 중소 도시의 단독주택으로는 중간 크기의 집이었습니다. 교수님의 서재는 호수가 보이는 1층에 있었는데 평소에 교수님 가족은 2층에서 생활하셨고, 1층 전체가 교수님 서재였습니다. 서재에는 4단으로 된 파일 캐비넷 10여 개가 있었는데 캐비넷 속에는 창조론 역사 연구와 관련된 인터뷰 원고, 메모지, 서신과 각종 자료들이 일목요연하게 빼곡이 정리되어 있었습니다. 

저는 졸업 논문을 준비하기 위해 1991년 여름 두 달 가까이를 넘버스 교수님 댁의 반지하 서재에서 보냈습니다. 당시 사모님도 심리학자로서 병원에서 근무하고 계셨기 때문에 제가 아침에 댁에 가면 사모님은 이미 출근하셨고, 교수님은 어린 딸을 유치원에 데려다주신 후 곧 바로 출근하시곤 했습니다. 당시 교수님은 어린 딸 하나 뿐이었기 때문에 늘 집안이 조용했습니다. 며칠간 그렇게 하다보니 다소 불편하셨는지 교수님은 필요할 때 언제라도 집에 와서 작업을 하고 끝나면 문을 잠그고 가라고 하시면서 아예 제게 집 열쇠를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뒤로 몇 주간은 편하게 교수님이 출근하신 후에 댁으로 가서 작업을 했습니다.

한참 논문 작업을 하고 있는데 어느 날 교수님이 플라스틱 바인더로 제본한 두툼한 원고 뭉치를 하나 갖고 오셨습니다. 그리고 이미 그 자체가 벽돌인 바인더 원고를 읽어달라고 부탁하셨습니다. 받은 자리에서 차례만 읽어봐도 저의 논문 주제의 배경이 되는 내용이었습니다. 저는 곧 바로 그 원고를 샅샅이 읽기 시작했습니다. 사실 몇몇 오탈자 외에는 원고에서 거의 고칠 게 없었습니다. 문장도 완전했고, 논리적 전개나 흐름도 거의 손 델 것이 없었습니다. 방대한 1차 자료들을 능수능란하게 활용하면서 오랜 시간 원고를 준비하신 교수님의 실력에 놀랐습니다. 교정원고를 넘겨드리면서 많이 배웠다는 감사의 말과 더불어 문학적으로 문장이 너무 아름다웠다고 했더니 교수님은 자기가 정말 듣고 싶었던 칭찬이라고 기뻐하셨습니다. 

이 책이 바로 1992년, 뉴욕 Knopf 출판사가 “과학적 창조론의 진화”(The Evolution of Scientific Creationism)란 부제로 출간한  『창조론자들』 (The Creationists)이었습니다. 이 책은 출간되자마자 많은 사람들로부터 “반진화주의의 가장 결정적인 역사서”(probably the most definitive history of anti-evolutionism)라는 극찬을 받았는데 몇 년 뒤 한국어로도 번역되었습니다. 이 책은 2006년, 하버드 대학 출판부(Harvard University Press)가 “과학적 창조론에서 지적 설계론까지”(From Scientific Creationism to Intelligent Design)란 다른 부제를 붙여서 개정증보판을 출간하였는데 여기에는 초판에 포함시키지 못했던 지적 설계 운동을 포함시켰습니다.

제가 초판 『창조론자들』 교정본을 넘겨드린지 오래지 않아 넘버스 교수님은 원고를 출판사에 넘겼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원고를 마치신 것을 축하드린다고 하자 고맙다는 말씀과 더불어 폭탄선언을 하셨습니다. 원고를 마친 후에 자기 서재에 있던 모든 창조론 역사 관련한 자료들을 미시간에 있는 안식교 계통의 앤드류스 대학 (Andrews University) 도서관에 모두 기증했다는 것입니다. 교수님은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말씀하셨지만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그 때가 1991년 늦여름이었던 것으로 기억되는데 넘버스 교수님이 1942년 생이시니 당시 교수님의 나이는 불과 49세였습니다. 학자로서는 한창 연구를 하시는 나이인데, 또 앞으로도 그 자료들을 사용할 일이 많을 텐데 교수님은 오랜 세월동안 피땀 흘려 모은 그 귀한 1차 자료들을 미련 없이 기증하신 것입니다. 

30년 전의 일이기는 하지만 이 충격은 저의 머리 속에 너무나 분명하게 각인되었습니다. 그리고 그 충격이 지난 7월 15일, 밴쿠버 집에 있던 저의 모든 창조론 책과 자료들, 화석들을 65개의 바나나 상자에 담아 대전에 있는 침신대 도서관에 기증하게 된 동기가 되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하나만은 스승의 본을 따른 것이지요. 사실 창조론 대강좌 시리즈 7권을 모두 마쳤으니 이제 하나님 나라에서 창조론 연구와 관련하여 제가 할 수 있는 학술적 기여는 대충 끝났다고 생각됩니다. 아마 그런 일은 거의 없으리라 생각하지만 혹 앞으로 그 자료들이 꼭 필요한 경우가 생기면 그 때는 제가 침신대에 가서 빌려보면 될 것입니다. 저의 남은 인생 동안 별로 사용하지도 않을 자료들을 집안에 쌓아두고 먼지만 쌓이게 하기보다 이들이 후학들의 손에 들어가서 더 나은 창조론 연구가 이어지기를 기대합니다. 아울러 저의 자료들을 출발점으로 해서 침신대가 국내는 물론 국제적으로 창조론 연구의 중심적인 기관이 되기를 기원합니다. 

한국침례교신학교에 기증한 자료들

에스와티니 기독의과대학교 양승훈 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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