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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연재] 행복을 당신 손 위에_인생의 훈련소

인생의 훈련소

6년의 열애 끝에 드디어 1996년 12월 7일 수표교교회에서 결혼했다. 그곳은 양가 부모님께서도 결혼식을 올린 장소로 1909년 9월 9일에 창립된 감리교회이다.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 예쁘고 엄숙한 교회 본당에서 결혼예식을 갖게 되었다. 신랑과 신부, 그리고 신랑 측 부모님과 신부 측 부모님을 사랑하는 지인들이 많이 오셔서 축하를 해 주셨다. 담임목사님 이신 김 목사님께서는 미국에서 목회하시다 오셨기에 결혼식도 서양식으로 이끌어 주셨다. 결혼식이 토요일에 있어서 결혼 첫날은 교회 근처인 친정집에서 보내고, 주일, 예배 후 부산을 거쳐 괌으로 신혼여행을 다녀왔다. 다른 신혼부부 여러 팀과 함께 가는 여행이라 더욱 즐겁게 행복한 시간을 보내고 온 것 같다. 

그러나 신혼여행에서 돌아온 우리를 맞이한 것이 보금자리 신혼집이 아니라 인생의 훈련소일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나는 동화 속 주인공과도 같은 연애 시절을 보내고 이제 하나님의 사람, 그리고 사모로서의 혹독한 훈련의 시간과 맞닥뜨리게 된 것이다. 신혼여행에서 돌아오자마자 교회의 모든 예배는 다 참여해야 했다. 어찌 보면 당연한 일임에도 불구하고 새벽예배, 수요예배, 금요 철야 예배, 주일예배, 속회 예배, 심방 예배 등등… 

가장 힘들었던 것은 새벽예배로, 산후조리 두 달 후 친정에서 오자마자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사모의 자리를 의무감으로 지켜야 했고 갓난아기와 함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어서 즐거움이 사라지고 있었다. 게다가 예배를 드리기 위해 가로등도 없는 깜깜한 시골길을 혼자 걸어갈 때 칠흑 같은 어둠 속 여기저기서 사납게 울어 대는 개 짖는 소리가 너무 무서워, 천국에서 지옥으로 떨어진 기분도 들었다. 

신혼집으로 살게 된 곳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원천동이라는 곳이다. 그냥 지명만 들어보면 수도권의 괜찮은 곳 같지만, 사실 그곳은 개발이 허용 안 되는 그린벨트 지역으로 꽤 깊은 시골이었다. 그리고 원천리(遠川里)라는 당시 이름의 한자 뜻이 물의 근원(根源)이 아닌 멀 원(遠)자로, 봄만 되면 물이 마르는 물이 귀한 동네였다. 마을 사람들이 흙집에서 살기도 하는 여러 가지로 열악한 곳이었는데, 나는 대도시에서만 자라고 살아서 사실 이런 시골은 처음이었다.

어떠한 마음의 준비도 없이 사모가 된 나에게 익숙한 생활환경마저 허락되지 않았던 것이다. 게다가 신혼집으로 살 집도 아직 준비되어 있지 않았다. 언덕 위 아름다운 교회, 그 옆 창고를 개조해서 우리 집을 만드는 중이었다. 

교회는 화장실이 밖에 있었고 남자 한 칸, 여자 한 칸으로 된 재래식 화장실이었다. 그 화장실은 곧 우리 집 화장실이기도 했다. 화장실 이야기가 나왔으니 생각나는 게 많다. 화장실 안에는 큰 똥파리들과 쥐들이 살고 있었다. 화장실 앞에 두엄을 쌓아 두니 아마도 똥파리가 많이 꼬였던 모양이다. 화장실을 가려면 마음의 준비를 단단히 해야 했다. 신문지를 준비해서 볼일을 보기 전 직사각형으로 뚫려 있는 구멍 밑으로 먼저 던져야 한다. 그래야 밑에 더러운 이물질이 튀지 않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은 새로 온 전도사님 내외분이 살 집을 만들어 드린다고 창고를 개조하여 집을 짓고 있었다. 그동안 우리는 장로님 댁 방 한 칸을 얻어 살아야 했다. 아쉬운 것 하나 없이 대도시에서 살았던 내겐 하루아침에 급변화 된 환경의 적응이 쉽지 않았다. 게다가 예민한 내 성격이 한 몫을 더했다. 

감사하게도 몇 개월이 지나자 우리만의 공간, 집이 생기게 된다. 기역자형으로 되어 있는 우리 집 주방은, 주말에는 교회 식당으로 사용되었다. 천장이 낮아 옷장을 들여놓을 수도 없었고, 우리의 살림집은 사람들이 하루 종일 일하는 바깥의 밭과 바로 붙어 있었다. 새벽기도가 있는 오전 4시 30분부터 우리 집 주변은 사람들의 발걸음 소리와 이야기 소리가 들린다. 방 안에 있어도 방음이 안 되어 우리 이야기를 누군가가 듣는 것만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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