희년의 안식과 하나님의 나라
희년은 거룩하다(레 25:10, 12). 희년은 사회학적이고 생태학적인 의미뿐만 아니라 본질적으로 신학적인 의미를 갖고 있다. 희년에 가난한 사람들이 땅과 집과 자유와 가족을 되찾는다는 점에서 희년에는 사회학적 의미가 있다. 또 희년에 농사를 짓지 않고 땅을 쉬게 한다는 점에서 희년에는 생태학적 의미가 있다. 희년에 담긴 사회학적 의미와 생태학적 의미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바로 희년에 담긴 신학적 의미이다.
레 25:10, “너희는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여”에서,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라고 명하신 분은 다름 아닌 하나님이시다. 그리고 오십 년째 해를 거룩하게 하라는 말씀 다음에, 희년에 가난한 사람에게 땅과 자유와 가족을 되찾아주고 또 희년에 농사를 짓지 말고 땅을 쉬게 하라는 말씀이 이어진다. 그리고 다시 12절에서 “이는 희년이니 너희에게 거룩함이니라.”는 말씀이 나온다. 곧 10-12절의 구조는 희년이 거룩하다는 희년의 신학적 의미가 처음과 마지막을 둘러싸고 있고, 그 안에 희년에 가난한 사람들에게 땅과 자유와 가족을 되찾아 주라는 희년의 사회학적 의미와 희년에 농사를 짓지 말고 땅을 쉬게 하라는 희년의 생태학적 의미가 들어 있는 것이다. 이것은 희년의 여러 의미들 가운데 신학적 의미가 본질적으로 중요하다는 점을 잘 드러낸다. 오늘날 그리스도인과 교회가 희년에 담긴 하나님의 뜻을 우리 시대에 맞게 잘 적용하여 실천하려 할 때 잊지 말아야 할 것은, 희년 실천은 단순한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나 환경 보호 프로그램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희년 실천은 희년을 지키라고 명하신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거룩한 순종이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성령님으로 충만한 그리스도인은 세 가지 감수성이 있는 사람이다. 첫째는 ‘신학적 감수성’인데, 이는 하나님께 대한 감수성을 뜻한다. 특히 하나님의 마음에 예민한 감수성이다. 둘째는 ‘사회학적 감수성’인데, 이는 이웃에 대한 감수성을 뜻한다. 특히 가난한 이웃들의 고통에 예민한 감수성이다. 셋째는 ‘생태학적 감수성’인데, 이는 피조 자연에 대한 감수성을 뜻한다. 롬 8장에는 이 세 가지 감수성과 깊이 관련된 세 가지 탄식이 잇달아 나온다. 곧 ‘성령의 탄식’(롬 8:26), ‘인간의 탄식’(롬 8:23), ‘피조물의 탄식’(롬 8:22)이다. 이 세 가지 탄식을 볼 수 있고 들을 수 있는 사람이 바로 성령님으로 충만한 사람이다.
그리고 (안식년과 희년을 모두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희년’에 이루어지는, (안식과 해방을 모두 아우르는) ‘넓은 의미의 안식’은, 하나님을 위한 안식이자 사람을 위한 안식이며 땅을 위한 안식이다. 그런데 이와 같이 하나님과 사람과 땅이 모두 (해방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안식을 누리는 (안식년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희년의 안식은, 바로 창세기에서 태초에 하나님이 엿새 동안 천지와 만물을 창조하시고 이렛날에 사람과 땅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안식하신 ‘태초의 안식’을 역사 안에서 재현한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창 2:1-3). 또한 하나님과 사람과 땅이 모두 안식하는 희년의 안식은 바로 요한계시록에서 종말에 하나님이 새 하늘과 새 땅을 창조하시며 사람과 땅을 비롯한 모든 피조물과 더불어 안식하실 ‘종말론적 미래의 안식’을 역사 안에서 미리 맛본다는 중요한 의미가 있다(계 21:1-4).
요컨대 희년에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사람과 땅 모두의 안식은 태초의 안식을 재현하는 동시에 종말론적 미래의 안식을 미리 맛보는 것이다. 그런데 이와 같은 태초의 안식과 종말론적 미래의 안식은 모두 하나님의 나라를 뜻한다. 히 3:7-4:11에 의하면, 하나님의 안식은 바로 하나님의 나라를 가리키며, 따라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지 못한다는 뜻이고, 반대로 하나님의 안식에 들어간다는 것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간다는 뜻이다.
이처럼 하나님과 사람과 땅이 모두 안식하는 희년의 안식은, 태초의 안식과 종말론적 미래의 안식이 가리키는 하나님의 나라인 것이다. 구약성경과 신약성경을 관통하는 대주제가 바로 하나님의 나라이다. 그런데 하나님의 나라가 가장 중요한 주제라는 것은 신약성경에서는 분명하다(막 1:14-15, 행 28:30-31). 하지만 구약성경의 대주제도 하나님의 나라라는 사실은 잘 드러나 있지 않다. 그런데 희년에 이루어지는 하나님과 사람과 땅의 안식에서 우리는 하나님의 나라를 발견할 수 있다. 우리는 하나님과 사람과 땅이 모두 (해방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안식을 누리는 (안식년을 포함하는 넓은 의미의) 희년에서, 태초에 임한 하나님의 나라와 종말에 임할 하나님의 나라가 과연 어떤 나라인지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