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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희년 이야기]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세례 요한은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를 전파하면서 반드시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고 역설했다(눅 3:7-9).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하는 이유는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질 것이고, “아브라함의 자손”이라는 허명으로는 그 진노의 심판을 피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좋은 열매” 곧 “회개에 합당한 열매”는 다름 아닌 ‘희년 혁명’과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이 그 바로 앞에 인용된 이사야의 예언(눅 3:4-6)에 담겨 있다.  

이 예언에서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과 작은 산이 낮아진다는 것은, 골짜기처럼 낮은 사람들 곧 정치적으로 권력이 없고 경제적으로 재물이 없는 사람들이 권력과 재물을 갖게 되어 높아지고, 산과 작은 산처럼 높은 사람들 곧 정치적으로 크고 작은 권력이 있고 경제적으로 크고 작은 재물이 있는 사람들이 그 권력과 재물을 잃고 낮아지게 된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처럼 힘없고 가난한 사람들이 높아지고 힘 있고 부한 사람들이 낮아진다는 것은 바로 ‘희년 혁명’을 뜻한다. 이 희년 혁명은 부자들의 정당한 재산을 빼앗아 가난한 자들에게 나눠주는 것이 아니라, 원래 가난한 자들의 정당한 몫이었으나 부자들이 빼앗아간 것을 가난한 자들에게 돌려주는 것이다. 

세례 요한은 ‘광야에서 외치는 자의 소리’로서, 모든 골짜기가 메워지고 모든 산이 낮아지는 희년 혁명에 의해 주의 길을 준비하려 했다. 그는 “내가 선지자 엘리야를 너희에게 보내리니”(말 4:5)라는 예언을 성취하는 인물로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주 앞에 먼저 와서”(눅 1:17) 예언자의 사역을 감당하리라고 하나님은 천사를 통해 말씀하셨다. 

그럼 왜 엘리야인가? 그것은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에 의해 이스라엘에 전면적으로 도입된 바알 숭배와 바알 체제에 정면으로 맞서, 여호와 신앙과 희년 체제를 수호하기 위해, 아합 왕가를 위시한 바알 정권에 대한 혁명(왕상 19:15-18)을 섬긴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례 요한도 “엘리야의 심령과 능력으로” ‘죄 사함을 받게 하는 회개의 세례’와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통해, 엘리야 시대의 바알 숭배와 바알 체제에 필적하는 당대의 맘몬 숭배와 맘몬 체제를 척결하고 희년 혁명을 이루어 주의 길을 준비하려 한 ‘희년의 예언자’였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회개에 합당한 열매란, 바알 체제에 영합해온 삶을 청산하고 희년 정신을 실천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나아가 바알 체제를 혁파하고 희년 체제로 변혁하는 삶을 사는 것이다. 이런 세례 요한의 가르침은 바로 다음 장인 누가복음 4장의 ‘나사렛 메시아 선언’에 등장하는 “주의 은혜의 해” 곧 희년과 일맥상통하는 것이다.

이미 도끼가 나무뿌리에 놓였으니 좋은 열매 맺지 아니하는 나무마다 찍혀 불에 던져지게 될 것이다. 세례 요한 당대의 이스라엘 사람들은 비록 세례 요한에게 나아와 회개의 세례를 받기는 받았지만,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는 철저한 회개에는 실패했다. 그리고 하나님이 보내신 예수님을 죽였다. 그래서 결국 예루살렘 성이 무너지고 성전이 파괴되는 ‘여호와의 크고 두려운 날’이 이르고 말았던 것이다. 

우리는 그들을 반면교사로 삼아 회개에 합당한 열매를 맺어야 한다. 바알 체제에 영합해온 삶을 청산하고 희년 정신을 실천해야 한다. 바알 체제를 혁파하고 희년 체제로 변혁해야 한다. 그 길이 우리 자신도 살고 가난한 약자들도 살고 부유한 강자들도 사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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