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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동네목사개척이야기] 자발적 불편을 선택하는 사람

자발적 불편을 선택하는 사람

사람은 변화와 위기 앞에서 두 가지 버튼을 쥐고 있다. 첫 번째는 ‘마지 못해 받아들이기’ 버튼이고, 두 번째 버튼은 ‘기꺼이 받아들이기’ 버튼이다. ‘마지못해 받아들이기’ 버튼을 자꾸 누르다 보면 생각도 옹색해지고, 삶의 즐거움도 사라진다. 회피를 반복하게 되니 불평과 분노로 가득차게 된다. 하지만 ‘기꺼이 받아들이기’ 버튼을 사용하다 보면 변화와 성장의 풍경을 만나게 된다.

그리스도인들에게서 ‘기꺼이 받아들이기’ 버튼을 누르는 동기는 하나님이 나에게 맡기신 일이라는 생각이 들 때 자원하는 마음이 일어난다. 아무리 중요한 일도 억지로 하면 힘들고 무거운 짐일 뿐이다. 하지만 별일 아닌 것도 기꺼이 받아 들여 하게 되면 즐거운 마음과 새로움을 경험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에 그저 쉽고 좋기만 일이 어디 있겠는가? ‘기꺼이 받아들이기’를 할 때에도 반듯이 불편함과 댓가가 따르기 마련이다. 여기서 불편과 댓가는 자발성을 억제하는 강력한 장애물이다. ‘귀찮아서’, ‘잘 안될 것 같은데’, ‘손해보는건 아닐까?’ 하는 마음의 브레이크가 작용한다. 그럼에도 자발적으로 불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렇게 자발적 불편을 선택하는 사람들에게는 몇가지 특징이 있다.

첫 번째, 머리로 판단하는 것을 넘어 가슴으로 결정하는 사람들이다. 파스칼은 “가슴은 머리가 알지 못하는 것을 알고 있다.”라는 말을 했다. 세상에는 가슴이 따뜻하고 뜨거운 사람들이 있다. 이성적으로는 피곤해지고, 손해보는 일일지라도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이들은 단지 무모한 사람들이 아니다. 생각이 모자란 것은 더더욱 아니다. 머리를 뛰어 넘는 가슴의 뜨거움이 있는 사람들이다. 가슴의 뜨거움이 생기기 시작하면 도전하고 모험을 하게 된다. 새로운 것을 향해서, 새로운 선택을 향하게 된다.

다수의 사람들은 두려움과 부정적인 생각이 들면 회피하고 싶어 한다. 때문에 두려움과 부정적 생각은 앞으로 나가지 못하게 하는 올무와 같다. 그런데 머리와 이성이 아니라 그것보다 더 큰, 가슴으로 생각하게 되면 결단하게 되고, 그 어려움은 오히려 내가 할 일이요, 그 힘든 것은 비전과 사명으로 여기게 된다.

인생을 살다보면 몇 번의 중요한 결정해야 할 때가 있다. 이성적인 판단도 필요하고 머리로 분석하는 것도 중요하다. 하지만 마음의 냉냉함은 용기로 이어지지는 않는다. 이럴 때 믿음의 사람들이 기도를 시작하면 가슴이 뜨거워지는 현상을 경험하게 된다. 가슴이 먼저 느끼는 것이다. 그때 용기와 담대함이 발생한다.

두 번째, 안락한 것을 내려놓고 낯선 것을 받아들이는 용기이다. 사람들은 불편을 회피하려 한다. 사실, 불편은 적응되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일 때 온순해진다. 자발적인 사람은 낯설고 익숙하지 않고 불편한 것을 새로운 것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다. 생각의 보폭이 크고 깊어진 용기를 가진 사람들이다.

때로 우리는 남을 위해서 무언가를 섬기고 싶은 생각이 들 때가 있다. 누군가를 돕고, 기여하고 싶은 마음이다. 하지만 그 순간 다른 마음도 일어난다. 나의 시간, 안락함을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다. 돕고 싶은 마음과 나의 안락함이 충돌 속에서 자신의 안락함을 포기하지 않고는 자발성은 생기지 않는다. 자발성이란 안락함을 포기해야 일어나는 것이다. 여기에는 다른 사람보다 조금 더 섬기려는 마음을 취해야 한다. 조금 더 인내력을 가져야 한다.

에머슨이 이런 흥미 있는 말을 했다. “영웅이란 다른 사람들보다 더 용감한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보다 10분 더 용감한 사람”이라고 말했다. 10분만 더 용감하면 영웅이 된다는 것이다. 10분만 더 오래 참으면 끈기 있는 사람이 된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보다 10분만 더 용기를 갖고, 희생하는 사람이 자발적인 사람이라는 것이다.

이 세상의 어떤 멋진 일도 아무런 비용과 대가를 치르지 않고서 일어나지 않는다. 멋지고 아름다운 일의 뒷면에는 누군가가 댓가를 지불하고 시간을 쏟아낸 것이다. 이것이 역사의 현장이다.

나의 주변에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다른 사람들이 격려를 받는다. 자원하는 사람이 있으면 주저하다가도 힘을 얻게 된다. 우울한 분위기가 명랑하게 바뀐다. 불평과 불만의 현장을 감사와 기쁨의 현장으로 변화된다. 수고로운 현장에 웃음과 활력이 있는가. 거기에는 반드시 자발적인 사람들이 있는 것이다.

반면 회피하는 사람의 특징도 있다. 핑계거리를 찾는다. 자신의 불운을 남의 탓으로 돌린다.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것을 즐기기보다는 지금 내가 없는 것만을 아쉬워 하는 사람이다.

자발적 불편을 선택하는 사람들이 롱런하기 위해서는 특별한 시야를 확보해야 한다.
바로 글로컬 관점이다. 글로컬이라는 말은 글로벌(global)과 로컬(local)이라는 단어가 합쳐진 말이다. 이 말을 이렇게 설명하면 좋을 것 같다. 거리의 청소부가 남들이 버린 쓰레기를 청소할 때에는 비참한 마음이 들었다. 그런데 ‘내가 하나님이 지으신 지구의 한 모퉁이를 깨끗하게 만드는 것이다’ 라는 마음을 갖게 될 때 똑같은 청소 행위이지만 비전과 소명의 행위가 되는 것이다.

불편의 현장을 현실에 반영된 상실의 현장으로 본다면 매우 작은 시야이다. 하지만 조금더 멀리보면서 불편을 감당할 때 비전을 상실하지 않게 된다. 불편을 왜곡시키거나 작은 의미로 축소시키지 않게 된다. 이런 통전적 시각을 갖게 될 때 자발성은 세상을 향한 축복의 통로가 되는 것 아닐까?

이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에 하나님은 요청하신다. 자발적 불편을 선택하는 부름이다. 이 시대의 아픔에 대해 나의 아픔으로 여기는 뜨거운 마음을 가진 사람들을 부르신다. 그 일을 위해서 내가 나서겠다고 하나님의 마음을 갖는 사람들을 부르신다. 이런 한 사람, 한 사람이 일터에서, 친구들에게서, 이웃들에게서 나타날 때 직장이 변화되고, 관계가 바뀌고, 공동체가 일어나며 가정이 새로워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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