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기만 하라
마가복음 5:21-43절의 ‘A-B-A´’로 구성되어 있는 샌드위치 구조(sandwiched structure) 가운데에서 중앙에 배치되어 있는 십이 년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이 고침을 받는 사건은(막 5:25-34)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질병으로 죽었을 때 다시 살아나는 사건의 열쇠 역할을 합니다. 마가복음 4:35-5:43절의 내용을 통하여 우리는 예수님의 주권(Lordship)에 관하여 생각해 보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는 풍랑을 잠잠하게 하시는 사건을 통하여 자연을 다스리시고(막 4:35-41), 군대 귀신들린 자를 치료해 주시는 사건을 통하여 귀신을 다스리시고(막 5:1-20), 열두 해 혈루증을 앓던 여인과 죽은 야이로의 딸을 고쳐 주심으로 질병과 죽음(막 5:21-43)을 다스리시는 분이십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은 구약의 율법(레 15:19-33)에 근거하여서 부정한 상태였고, 유대인 공동체 구성원들이 이 여인과 접촉할 경우에 공동체가 부정한 상태가 되는 상황 가운데 있었습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예수님의 옷 자락을 만지기만해도 자신의 병이 고침을 받는다는 믿음의 확신과 신뢰를 가지고 예수님의 옷 자락을 만졌습니다 (막 5:30). 예수님을 향한 믿음의 확신과 신뢰는 기적을 만들어 냈고, 열두 해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했던 여인은 고침을 받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기적을 통하여 우리는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을 깨닫게 되는데, 장벽을 뛰어넘는 믿음은 기적의 가장 중요한 요소라는 사실입니다. 이러한 측면에서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의 믿음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려주시는 사건과 연결 되어 있습니다.
예수님께서 죽은 야이로의 딸을 일으키시는 사건은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에게 말씀하고 계신 상황과 오버랩(overlap)되면서 시작됩니다.
(막 5:35) 아직 그(예수)가 말하고 있을 때 회당장의 [집]에서 [사람들이] 와서 말하기를, “당신의 딸이 죽었습니다. 왜 아직도 선생님을 괴롭히십니까?” (36) 그러나 예수님은 그 전해지는 말을 곁에서 우연히 들으시고 회당장에게 말했습니다.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기만 하라” (37) 그리고 그(예수)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야고보의 형제 요한을 제외하고 아무도 그(예수)와 함께하는 것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38) 그리고 그들이 회당장의 집으로 들어가셨습니다. 그리고 그(예수)는 소란과 울음, 그리고 많이 울고 있는 사람들과 통곡하는 사람들을 보셨습니다. (39) 그리고 [예수께서] 들어가시고 그들에게 말씀하셨습니다. “왜 소란을 피우며 울고 있느냐? 이 아이는 죽지 않았고 자고 있다.” (40) 그러자 그들이 그(예수)를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그(예수)는 [그들을] 모두 내쫓고, 아이의 아버지와 어머니, 그리고 자신과 함께 있는 자들을 데리고 아이가 있는 곳으로 들어가셨습니다. (41) 그리고 그 아이의 손을 붙잡고 그녀에게 말씀하시기를 “탈리타 쿰!” 이것을 번역하면 “소녀야,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어나라”라는 의미입니다. (42) 그러자 즉시 소녀가 일어나서 걸었습니다. 그녀는 열두 살이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즉시 큰 놀라움에 경악을 멈추지 못했습니다. (43) 그리고 아무도 이 일을 알지 못하도록 그(예수)는 그들에게 많이 당부하셨습니다. 그리고 아이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말씀하셨습니다. (Translated by YG Kim)
예수님께서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에게 말씀하시던 상황이 끝나기도 전해 야이로의 집에서 사람들을 보내어 야이로에게 전한 소식은 이미 야이로의 딸이 죽었으므로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메시지였습니다(막 5:35).
회당장 야이로의 입장에서 보면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과 예수님이 대화를 나누시는 시간으로 인하여 야이로의 딸의 생명을 잃었습니다. 지금 야이로는 만일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이 길 위에서 끼어들지 않았다고 하면 자신의 딸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것입니다.
지금 야이로의 딸과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는 여인 중에 누가 더 위급한 상황으로 예수님의 손길이 필요합니까? 야이로의 딸입니다.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은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을 치유해 주시고 나서 고쳐 주셔도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야이로의 딸이 죽어가는 시간에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과 대화를 나누고 계셨습니다.
예수님의 발에 향유를 붓고 머리카락으로 예수님의 발을 씻었던 마리아의 오빠인 나사로가 고침을 받는 사건에서도 동일한 문제가 발생합니다.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병들어 죽게 되었다는 소식을 들으시고 “…이 병은 죽을 병이 아니라, 오히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이다.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 이 [병을] 통하여 영광을 받게 하려는 것이다”(요 11:4; Translated by YG Kim)라고 말씀하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의도적으로 나사로가 죽은 사흘 후에 베다니에 도착하셨니다(요 11:39). 그러므로 마르다와 마리아는 만일 예수님께서 나사로가 죽기 이전에 도착하셨다고 하면 자신의 오빠인 나사로가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말합니다(요 11:21, 32). 그러나 예수님께서는 나사로의 죽음의 소식을 듣고 베다니로 출발하시면서 믿음의 중요성을 강조하십니다(요 11:15).
이러한 연관성 가운데에서 마가는 자신의 복음서에서 예수님께서 행하시는 기적은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포기했을 때에 나타난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이 폭풍 가운데에서 죽게 되었을 때에 갈릴리 호수를 꾸짖으셨고(막 4:38-39), 거라사의 군대 귀신 들린 자를 아무도 제어할 수 없을 때 온전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셨으며(막 5:1-20), 열두 해 혈루증을 앓고 있던 여인이 많은 의사들의 노력에도 고칠 수 없었을 때 고쳐 주셨습니다 (막 5:24-34).
자신의 딸이 죽었다는 절망의 소식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시는 내용은 “두려워하지 말고, 오직 믿기만 하라”(막 5:36b)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힘으로는 더 이상 할 수 없다고 인정하는 죽음을 이기는 믿음을 회당장 야이로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러나 회당장 야이로는 마치 어린 시절부터 심한 경련을 일으키면서 물과 불에 뛰어 들어갔던 귀신 들린 어린 아이의 아버지처럼 “내가 믿습니다.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십시오”(막 9:24b; Translated by YG Kim)라고 대답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는 자신의 딸이 이미 죽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회당장 야이로의 집으로 들어가실 때 오직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만을 데리고 가셨습니다. 마가복음에서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은 다른 제자들에 비해 조금 더 친밀한 관계 속에서 예수님의 가르침을 받습니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높은 산에 올라가셔서 변형되실 때에도 예수님과 동행한 제자들이고(막 9:2), 예수님께서 겟세마네에서 기도하실 때 예수님 곁에서 기도 요청을 받은 자들이기도 합니다(막 14:33).
이미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죽음으로 집 안은 소란과 울음으로 가득했는데, 마가는 많은 사람들이 울고 있다는 표현을 통하여 이미 장례식이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강조합니다(막 5:38). 고대 유대 사회에서는 죽은 자의 죽음을 애도하기 위해서 고용하는 전문적인 애도자들(professional mourners)이 있었습니다. 당시 회당장 야이로의 지위에 따라서 이미 많은 애도자들이 야이로의 딸의 죽음을 애도하면서 울고 있었는데,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책망하시면서 “이 아이는 죽지 않았고 자고 있다”(막 5:39c)라고 말씀하십니다. 이러한 야이로의 딸의 상태는 19세기 합리주의 신학자였던 테일러(Taylor) 교수가 주장하는 코마(coma) 상태가 아니라(Taylor, Vincent; The Gospel according to St. Mark, 1952; 285-286) 이미 죽어 장례가 시작된 상태입니다. 이미 전문적인 애도자들이 야이로의 집에 도착하였고, 예수님께서 “이 아이는 죽지 않았고 자고 있다”라고 말씀하셨을 때 사람들이 예수님의 말씀을 비웃었다는 사실(막 5:40a)을 통하여 야이로의 딸의 실질적인 죽음을 생각해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 아이가 죽었다고 말씀하시지 않고 잠들었다고 말씀하고 계십니까? 예수님께서 이 아이의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는 이유는 죽음이란 영원한 최종적인 종말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을 향한 잠깐의 상태를 표현하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예수님께서는 종말론적인 죽음을 맞이한 이 아이가 다시 현재의 삶으로 돌아온다는 의미에서 죽음을 잠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그리고 죽은 아이의 아버지인 회당장 야이로와 그의 아내를 데리고 그 아이가 죽은 방에 들어가셔서 아람어로 “탈리타 쿰”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막 5:41b). 예수님 당시에 팔레스타인 지역에서는 아람어가 통용되고 있었는데, ‘탈리타’(Talitha)은 ‘소녀여’(litter girl)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고, ‘쿰’(koum)은 ‘일어나라’(Arise)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러자 소녀는 즉시(immediately) 일어나서 걸었습니다(막 5:42). 마가가 헬라어로 성경을 기록하면서 ‘탈리타 쿰’이라는 아람어를 그대로 사용한 이유는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다시 살리는 치유의 언어가 초기 교회에서 아람어로 기억되고 암송되어서 그대로 전승되고 있기 때문입니다(박윤만, 마가복음 길 위의 예수, 그가 전한 복음; 2021; 424).
특별히 마가는 회당장 야이로의 이름을 밝히는 것과 다르게 이 소녀의 이름을 언급하지 않고 소녀가 열두 살이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습니다(막 5:42b). 마가복음 5:21-43절에서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의 이야기에서 공통적으로 사용하여서 서로의 사건을 연결하는 단어는 숫자 ‘12’입니다. 이러한 공통점 가운데에서 숫자 ‘12’는 유대 문화 가운데에서 상징되어지는 완전 숫자의 의미가 아니라 단지 두 사건을 하나로 묶는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소녀가 죽음에서 다시 살아났을 때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과 소녀의 부모는 놀라움에 경악을 멈추지 못했습니다(막 5:42c). 메시아의 비밀(Messianic Secret)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는 이 사실을 아무에게도 알리지 말라고 말씀하십니다(막 5:43a). 그러나 마태는 이 사실이 온 땅에 퍼졌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마 9:26).
마가는 예수님께서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과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죽음에서 일으키시는 사건을 통하여 하나님의 아들로서 예수님의 주권(Lordship)을 강조합니다. 또한 예수님께서는 이 사건을 통하여 참된 믿음에 관하여 가르치고 계십니다. 참된 믿음이란 인간의 한계 가운데에서 그 어떠한 장벽을 뛰어 넘어서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전적으로 신뢰하고 확신 가운데 믿는 것입니다.
<함께 나누기>
-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이 고침을 받는 사건은 죽은 회당장 야이로의 딸을 살리는 사건에서 열쇠의 역할을 한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마가복음 5:21-43절의 ‘A-B-A´’로 구성되어 있는 샌드위치 구조(sandwiched structure) 안에서 설명해 보십시오.
- 열두 해 동안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과 야이로의 딸 중에서 누가 지금 더 위급한 상황입니까? 만일 예수님께서 혈루증을 앓고 있었던 여인을 나중에 고쳐 주셨다고 하면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지 않을 수도 있지 않습니까? 이러한 질문 가운데에서 예수님께서 죽은 나사로를 살려 주신 사건과 비교해서 설명해 보십시오.
- 예수님께서 행하신 기적이 모든 사람들이 자신의 노력을 포기했을 때 일어났다는 의미는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회당장 야이로에게 믿음을 강조하셨을 때 야이로는 아무런 대답을 하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가 무엇입니까?
- 회당장 야이로의 딸이 죽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어떻게 알 수 있습니까? 예수님께서 야이로의 딸이 잠을 자고 있다고 표현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 예수님께서 ‘탈리타 쿰’이라는 아람어를 사용하신 이유는 무엇입니까?
복음에 빚진 자 김윤규 목사 (토론토 쉴만한물가 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