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탐욕,” 죽음에 이르는 죄 (1)
고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플리니 2세는 로마 황제에 의해 소아시아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그는 자기 통치 영역의 사회 상황을 편지에 써서 황제에게 보고 했습니다. 그가 남긴 수 백통의 편지들과 기록은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를 이해 하는 유익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가 네로 황제에게 썼던 편지 중에 아테네의 종교 현상을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화했던 아테네는 3천 개 이상의 공적인 신들이 존재했었고, 개인 집의 벽에는 작은 신들이 셀 수 없을 만큼 새겨져 있었습니다. 거리의 초입과 건물의 들어가는 문마다 앞에 신상들이 세워져있었습니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다산과 부의 여신 아르테미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성의 욕망을 채워주는 히메로스, 재력의 신 풀로터스, 치료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등 인간의 마음 속에 잠재된 욕구가 신들로 형상화 되어 도시에 가득 찼었습니다.
팀 켈러는 『모조의 신들 Counterfeit gods』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고대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며, 현대 사회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 (儀式)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나 경기장 같은 신전이 있어,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면 거기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미모와 권력과 돈과 성취의 신이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한 이것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면의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태도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양만 다르지 지금도 나타납니다. 팀 켈러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우상 공장”이라 표현합니다.
고대 히랍어 “플레오넥시아”는 우상을 만드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낱말입니다. “탐욕”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의 근본적인 개념은 물질적 소유를 “더 가지는 having more,” “더 받는 receiving more,” 결국에는 “더 원하는 wanting more” 사람의 마음입니다. 역사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 사람 헤로도토스는 “플레오넥시아”를 “권력의 굶주림”으로 사용했습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속에 이 단어는 돈, 명예, 그리고 욕체적 욕망과 관계하여 사용됩니다. 고대 히랍 사회에서 이 단어는 동료들을 이용하려는 정신적 태도로 “거만한 욕심”을 의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매우 뻔뻔스러운 행위,” “과도한 야망,” “폭력,” 또는 더 좋은 상황에서 인간이 범하는 “후회할 양심”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관리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정직하게 행하는 태도를 “플레오넥시아”라 했습니다. AD 5세기에 시루스 (Cyrus)의 주교이자 교회사가인 데오도렛 (Theodoret)은 탐욕을 “항상 더 많이 얻는 것을 목표로 하여 사람이 소유하기에 부적합 것을 빼앗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 (Cycero)는 이 단어를 “타인에게 속한 것을 불법적으로 빼앗으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정의했습니다. 탐욕은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강력한 소유 욕망입니다.
신약 성경은 탐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선, 탐욕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의 태도를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탐욕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시작하여 그 결과로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가 되며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에 등을 돌린 사람들이 만드는 문화와 사회는 탐심이 지배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리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탐욕의 두번째 특징은 생명을 물질적 차원에서 평가하는 태도입니다. 탐욕에 사로잡힌 사람은 인간의 가치를 숫자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섬겨야 할 사람들을 이익의 수단인 상품으로 취급합니다. 이 사람들의 최후도 역시 멸망입니다.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경고합니다. 탐심의 세번째 특징은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은 반복하여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탐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지배하는 힘이 있습니다. 재물은 무소불위의 힘이 있어서, 물질을 탐하는 사람에게 재물은 우상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탐욕의 네번째 특징은 성적인타락입니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취하려는 욕망이 탐욕의 본질입니다. 탐욕에 이끌리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일종의 착취의 도구들이고, 자신과 자신의 욕구 외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탐욕은 언제나 심판, 저주, 사형, 그리고 죽음과 관계합니다. AD 4세기 소아시아에 살았던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땅의 재물을 많이 움켜진 자들은 마치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선박과 같아서, 폭풍우가 심하게 불 때 난파할 가능성이 무척 높아진다. 반면, 재물을 손에서 놓는 자들은 날개가 가벼워진 독수리가 더 높이 올라 폭 넓은 시야를 확보하여 먹이를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삶이 훨씬 안전해 진다.” 인간은 탐욕에 사로잡힐 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고, 세상 욕심을 놓을 때 하나님을 붙잡게 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것만이 탐욕을 다스리는 근원적 해답입니다. 다윗은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피할 요새는 오직 여호와라고 간증합니다.
“탐욕,” 죽음에 이르는 죄 (1)
고대 이탈리아에서 태어난 플리니 2세는 로마 황제에 의해 소아시아 총독으로 임명됩니다. 그는 자기 통치 영역의 사회 상황을 편지에 써서 황제에게 보고 했습니다. 그가 남긴 수 백통의 편지들과 기록은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를 이해 하는 유익한 정보를 제공합니다. 그가 네로 황제에게 썼던 편지 중에 아테네의 종교 현상을 기록한 내용이 있습니다. 그 당시 세계에서 가장 번화했던 아테네는 3천 개 이상의 공적인 신들이 존재했었고, 개인 집의 벽에는 작은 신들이 셀 수 없을 만큼 새겨져 있었습니다. 거리의 초입과 건물의 들어가는 문마다 앞에 신상들이 세워져있었습니다. 지혜와 전쟁의 여신 아테나, 다산과 부의 여신 아르테미스, 미의 여신 아프로디테, 성의 욕망을 채워주는 히메로스, 재력의 신 풀로터스, 치료와 의술의 신 아스클레피오스, 등 인간의 마음 속에 잠재된 욕구가 신들로 형상화 되어 도시에 가득 찼었습니다.
팀 켈러는 『모조의 신들 Counterfeit gods』에서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시대도 고대 사회와 근본적으로 다르지 않다며, 현대 사회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문화마다 그 문화를 지배하는 우상이 있다. ‘제사장’과 토템과 의식 (儀式)도 있다. 사무실이나 헬스장이나 스튜디오나 경기장 같은 신전이 있어, 행복한 삶이라는 복을 얻고 액운을 물리치려면 거기서 제사를 드려야 한다. 미모와 권력과 돈과 성취의 신이란 바로 우리 개개인의 삶과 사회 전반에서 신적 위치를 점한 이것들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내면의욕망을 채우려는 사람들의 태도는 시대와 문화를 초월하여 모양만 다르지 지금도 나타납니다. 팀 켈러는 이런 인간의 마음을 “우상 공장”이라 표현합니다.
고대 히랍어 “플레오넥시아”는 우상을 만드는 인간의 마음을 표현하는 낱말입니다. “탐욕”으로 번역되는 이 단어의 근본적인 개념은 물질적 소유를 “더 가지는 having more,” “더 받는 receiving more,” 결국에는 “더 원하는 wanting more” 사람의 마음입니다. 역사학의 아버지로 알려진 고대 그리스 사람 헤로도토스는 “플레오넥시아”를 “권력의 굶주림”으로 사용했습니다. 고대 철학자 아리스토텔레스의 작품 속에 이 단어는 돈, 명예, 그리고 욕체적 욕망과 관계하여 사용됩니다. 고대 히랍 사회에서 이 단어는 동료들을 이용하려는 정신적 태도로 “거만한 욕심”을 의미했습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매우 뻔뻔스러운 행위,” “과도한 야망,” “폭력,” 또는 더 좋은 상황에서 인간이 범하는 “후회할 양심”을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높은 자리에 있는 관리들이 자신의 지위를 이용해서 부정직하게 행하는 태도를 “플레오넥시아”라 했습니다. AD 5세기에 시루스 (Cyrus)의 주교이자 교회사가인 데오도렛 (Theodoret)은 탐욕을 “항상 더 많이 얻는 것을 목표로 하여 사람이 소유하기에 부적합 것을 빼앗는 것”으로 해석했습니다. 로마의 정치가 키케로 (Cycero)는 이 단어를 “타인에게 속한 것을 불법적으로 빼앗으려는 인간의 욕망”으로 정의했습니다. 탐욕은 만족을 모르는 인간의 강력한 소유 욕망입니다.
신약 성경은 탐욕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설명합니다. 우선, 탐욕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마음의 태도를 설명하는 단어입니다. 탐욕은 “그들이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한다”고 시작하여 그 결과로 “하나님이 미워하는 자”가 되며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는 벌을 받게 됩니다. 하나님의 법에 등을 돌린 사람들이 만드는 문화와 사회는 탐심이 지배합니다. 하나님을 무시하는 사람들에 관해서 성경은 이렇게 경고합니다. “네가 만일 네 하나님 여호와를 잊어 버리면, 내가 너희에게 증거하노니 너희는 반드시 멸망할 것이라.” 탐욕의 두번째 특징은 생명을 물질적 차원에서 평가하는 태도입니다. 탐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인간의 가치를 숫자의 크기에 따라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지위를 이용하여 섬겨야 할 사람들을 이익의 수단인 상품으로 취급합니다. 이 사람들의 최후도 역시 멸망입니다. “그들이 탐심으로써 지어낸 말을 가지고 너희로 이득을 삼으니 그들의 심판은 옛적부터 지체하지 아니하며 그들의 멸망은 잠들지 아니하느니라.”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삼가 모든 탐심을 물리치라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고 경고합니다. 탐심의 세번째 특징은 우상숭배입니다. 성경은 반복하여 “탐심은 곧 우상숭배니라”고 말씀합니다. 무엇이든 사람이 탐하는 것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아 지배하는 힘이 있습니다. 재물은 무소불위의 힘이 있어서, 물질을 탐하는 사람에게 재물은 우상이 됩니다. 사람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기지 못합니다. 탐욕의 네번째 특징은 성적인 타락입니다. 자신에게 속하지 않는 것을 취하려는 욕망이 탐욕의 본질입니다. 탐욕에 이끌리는 사람에게 중요한 것은 자신의 욕망을 채우는 것이며, 다른 사람들은 일종의 착취의 도구들이고, 자신과 자신의 욕구 외에 어떤 신도 존재하지 않습니다. 성경은 “네 이웃의 아내나 그의 남종이나 그의 여종이나 무릇 네 이웃의 소유를 탐내지 말라”고 가르칩니다.
탐욕은 언제나 심판, 저주, 사형, 그리고 죽음과 관계합니다. AD 4세기 소아시아에 살았던 에바그리우스는 탐욕을 이렇게 설명했습니다. “이 땅의 재물을 많이 움켜진 자들은 마치 무거운 짐을 가득 실은 선박과 같아서, 폭풍우가 심하게 불 때 난파할 가능성이 무척 높아진다. 반면, 재물을 손에서 놓는 자들은 날개가 가벼워진 독수리가 더 높이 올라 폭 넓은 시야를 확보하여 먹이를 더 쉽게 찾을 수 있는 것처럼 삶이 훨씬 안전해 진다.” 인간은 탐욕에 사로잡힐 수록 하나님과 멀어지고, 세상 욕심을 놓을 때 하나님을 붙잡게 됩니다. 지존자의 은밀한 곳에 거주하며 전능자의 그늘 아래에 사는 것만이 탐욕을 다스리는 근원적 해답입니다. 다윗은 어두울 때 퍼지는 전염병과 밝을 때 닥쳐오는 재앙을 피할 요새는 오직 여호와라고 간증합니다. 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