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만 (가장 큰 죄),” 죽음에 이르는 죄 (3)
“이제 우리가 신이다”는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 인조 인간 데이빗이 외친 한 소절입니다. 이전에는 신의 영역으로 이해되었던 세계를 이제 인간이 접근합니다. 유전자 변형을 통해 생명을 조직하고 새로운 종을 탄생시킵니다. 이 영화는 인간의 창조 행위가 경이롭지만 얼마나 위험한 일인지를 경고합니다. 자신들의 발명품에 비참하게 잠식되어 큰 대가를 치른 후에야 인류는 자만과 탐욕의 죄를 깨닫게 됩니다.
이 영화의 배경은 고대 그리스 신화에 등장하는 프로메테우스 신입니다. 그는 인간을 창조한 신으로 예지력이 최고도로 뛰어났습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는 그에게 건축, 천문학, 수학, 항해, 의학, 금속학, 등 인류 사회에 필요한 유용한 기술들을 가르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자신이 만든 인간에게 제우스에게 배운 모든 것을 전수합니다. 이제 인간들은 스스로 발전하여 큰 능력을 소유합니다. 이것을 지켜 본 제우시는 분을 내며 그들을 박멸할 것을 결정합니다. 한 번은 인간들이 소를 잡아 놓고 신들에게 희생 제물로 바칠 부분과 인간들이 소유할 부분에 관해 논쟁합니다. 중재자로 초대된 프로메테우스는 꾀를 내서 살코기는 흉한 창자로 감아 놓고, 먹을 것이 없는 뼈는 윤기 흐르는 기름 덩어리로 포장합니다. 때가 되자 나타난 제우스는 겉이 윤기나는 것을 집어듭니다. 자신에게 속아 넘어가는 제우스를 보면서 프로메테우스는 우쭐대며 웃습니다. 그 때 제스는 인간들에게 불을 빼앗으며, “이제부터 인간들은 오직 생고기만 먹는다”고 버럭 화를 냅니다. 나중에 프로메테우스는 제우스의 딸 아테나를 찾아 갑니다. 그녀의 승낙으로 불을 훔쳐 온 그는 인간들에게 불을 건냅니다.
이 사건으로 제우스는 인간들에게 복수를 맹세합니다. 속임수와 함께 끊임없이 자신의 지위에 도전하는 교만한 인간들에게 형벌을 내립니다. 먼저 프로메테우스를 백인들 산에 있는 돌기둥에 알몸으로 묶어 독수리로부터 날마다 간을 쪼이는 끔찍한 형벌을 받게합니다. 밤 사이 완전하게 다시 자란 그의 간은 낮 시간에 독수리에게 쪼이면서, 그의 고통은 사라질 날이 없습니다. 또 제우스는 흙으로 아름다운 여신 판도를 만듭니다. 그리고 인간 사회에 발생할 수 있는 모든 종류의 재앙 (질병, 고통, 욕망, 사악, 노년기, 등)이 담긴 항아리를 그녀에게 줍니다. 판도라는 그 상자를 열었습니다. 그 후 세상에는 온갖 악과 질병이 창궐하게 됩니다. 제우스의 분노는 결국 교만한 인간 사회에 재앙과 파멸을 불러왔습니다.
그리스 신화에 사용된 “교만”은 히랍어 “휘페레파노스”입니다. 이 낱말은 지혜와 용기가 “탁월한” 혹은 “월등한”이라는 뜻인 히랍어 “휘페르”와 다른 사람들에게 “드러나다” 혹은 “빛나다”을 뜻하는 “에파노스”의 합성어입니다. 고대 그리스에서 자신의 능력과 성취 그리고 우월적 지위를 극도로 이용해서 자기 자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까지 속이는 허풍장이를 “교만한 사람”이라고 불렀습니다. “휘페레파노스”는 자만심, 오만함, 그리고 주제넘는 추측으로 자신의 부유함과 능력과 지위를 자랑하면서 다른 사람들을 경멸하는 태도를 표현할 때 사용되었습니다. 크세노폰은 자신의 대표 작품인 『키루스의 교육』에서 바른 통치를 못하는 젊은 왕의 잔인한 성품을 설명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플라톤은 『국가』에서 신들과 인간을 지나치게 경멸하는 시인 호모의 글들을 해석하면서 “훼페레파노스”를 사용합니다.
교만은 다른 사람들을 얕보고 대신 자신을 높이는 태도 이상입니다. 자기 스스로가 삶의 주인이고 우주의 중심이 되려는 마음의 자세입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인간의 첫 범죄는 하나님의 통치를 거부하고 스스로 하나님처럼 되어 자신과 세계를 통치하며 살려고 한 것이었다고 해석합니다. 사람들이 바벨탑을 지을 때 서로 말하기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자”고 했습니다. “이름을 내자”는 행위와 통치의 주체가 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이름을 내는 것은 하나님의 통치와 지배가 아닌 사람인 우리가 주권자가 되어 삶과 사회를 지배한다는 의도입니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수고를 흩으셨습니다. 교만은 단지 사람들 사이에서 높은 지위를 차지하려는 태도를 넘어 하나님과 맞서는 마음의 상태입니다. 이사야는 이 사실을 잘 드러내 줍니다. “네가 네 마음에 이르기를 내가 하늘에 올라 하나님의 뭇 별 위에 내 자리를 높이리라 내가 북극 집회의 산 위에 앉으리라 가장 높은 구름에 올라가 지극히 높은 이와 같아지리라 하는도다.” 자신과 대항하는 교만한 자를 향해 하나님은 “그러나 이제 네가 스올 곧 구덩이 맨 밑에 떨어짐을 당하리로다”고 반응하십니다. 교만은 하나님께서 대적하시는 상대편인 사탄입니다.
교만은 본질상 하나님과 경쟁하는 적이다고 표현한 C.S. 루이스는 교만의 실체를 이렇게 표현합니다.“기독교 스승들의 가르침에 따르면 가장 근본적인 악, 가장 궁극적인 악은 교만이다. 성적 부정, 분노, 탐욕, 술 취함 같은 것들도 이 악에 비하면 단지 벼룩에 물린 자국에 불과하다. 악마는 바로 이 교만 때문에 악마가 되었다. 교만은 온갖 다른 악으로 이어진다. 교만은 전적으로 하나님께 대항하는 마음의 상태다. 정말 흉악하고 악마적인 교만은 다른 사람들을 얕본 나머지 그들이 자신에 대해 무슨 말을 하든 전혀 신경 쓰지 않을 때 찾아온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존경심을 높이기 위해 비겁하게 행동하거나 정욕에 휩쓸리거나 성급하게 구는 것을 이겨낸다. 이것이 교만이며, 악마는 이런 모습을 보면서 흐믓해한다.” 교만은 내면적이고 영적인 악이기 때문에 교묘하고 치명적입니다.
이 악으로부터 자유로울 사람은 없습니다. 나는 교만하지 않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는 교만하다는 명백한 증거입니다. 한 사발의 물을 가지고 있으면 그 무게를 느낍니다. 그러나 그가 물 속으로 들어간다면 물이 온통 그를 덮어 더이상 물의 부담을 느끼지 못합니다. 교만이 발끝에서 머리 끝까지 차 있는 사람은 자신이 교만하다고 느끼지 못합니다. 이 교만의 죄로부터 벗어나는 길은 “나는 교만한자”인 것을 깨닫는 곳에서 출발합니다. “오호라 나는 곤고한 사람이로다. 이 사망의 몸에서 누가 나를 건져내랴.”이남규 목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