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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성육신, “성탄의 메시지”

성육신, “성탄의 메시지”

예수 그리스도의 성육신 (成肉身, the incarnation)은 기독교의 핵심 요소입니다. 기독교 신앙의 전체 상부 구조는 여기에 달려 있습니다. 이 사실을 패커는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것은 속죄라는 그리스도의 수난절에 전하는 메시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부활이라는 부활에 전하는 메시지에 있는 것도 아니고, 성육신이라는 성탄절의 메시지에 있다. 정말로 충격적인 기독교의 주장은 하나님이셨던 나사렛 예수가 사람이 되셨다는 것이다. 신성을 상실하지 않은 채 인성을 취하셨기 때문에 나사렛 예수는 참으로 완전하게 인간이셨고, 마찬가지로 참으로 완전하게 신적 존재라는 것이다.” 기독교 신학의 모든 영역에서 인정된 하나님의 아들의 성육신에 대한 성경적 표현은 역사 기록에 근거한 것입니다. 

   고대 로마의 역사가 타키투스는 자신이 직접 지켜 본 당시 사회 현실을 이렇게 기술합니다. “네로는 대중이 그리스도인이라 부르는 계층에 가장 극악한 고문을 가했다. (자기 이름이) 그 운동의 유래가 된 그리스도는 티베리우스 (Tiberius) 통치 기간 동안 로마 총독들 중의 한 사람인 폰티우스  필라투스(Pontius Pilatus)의 손에 극심한 형벌을 받았다.” 그는 사람인 예수 그리스도가 기독교를 시작했다고 기록했습니다. 

   로마 제국 최고 통치자로 알려진 트라야누스 황제가 플리니우스로부터 받은 편지에 이런 내용이 있습니다. “그들은 특정한 날의 새벽에 모이는 습관이 있습니다. 그 때 그들은 번갈아 가며 그리스도께 찬양을 불러 드리고 어떤 악한 행위도 하지 않을 것을 엄숙하게 맹세하는데, 마치 하나님께 하는 것처럼 합니다.” 그리스도는 다른 신들과는 달리 일반 사람들처럼 땅에 살았던 하나님이었습니다.    

   유대의 역사가 요셉푸스는 성육신 그리스도에 관하여 매우 주목할만한 사실을 기록으로 남겼습니다. “이때 예수께서 살고 있으니 그는 지혜로우신 자라. 그를 사람이라 부르는 것이 옳은 것은 그가 놀라운 일을 행하고, 진리를 기쁨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선생이기 때문이다. 그는 많은 유대인과 이방인을 자신에게 끌어들였다. 그는 그리스도이다. 빌라도가 우리 중 지도자들의 제안에 따라 그를 십자가에 처형하도록 정했을 때, 처음에 그를 사랑했던 사람들이 그를 버리지 않았다. 그는 사흘 만에 다시 나타났다. 그에게서 이름을 딴 그리스도인 분파는 지금도 멸종되지 않았다.” 기독교를 적대했던 요세프스의 이와같은 진술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이 역사적 사실임을 확증해 줍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생애를 기록하는 기독교 밖의 저술가들은 한 결같이 인간이셨던 예수님의 신적인 특징을 언급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이같은 표현은 성경에서 쉽게 발견되는 하나님 한 분 안에 여러 위격이 존재하고, 특히 예수 그리스도 안에 인성과 신성이 결합되어 있다는 기록과 일치합니다. 바로 이 특성이 첫번째 성탄절에 일어났던 가장 심오하고 헤아릴 수 없는 미스테리입니다. 예수님의 잉태는 남녀간의 성적인 결합의 결과 물이 아니었습니다.  천사는  예수님을 잉태하는 여인에게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이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알렸습니다. 

   하나님이 인간으로 태어나셨습니다. 전능하신 분이 일반 아이와 마찬가지로 꼼지락거리고 누워서 부모를 빤히 바라보고 먹을 것을 받아 먹고 말하는 법을 배워야 했습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그 모습을 “그는 연한 순처럼, 마른 땅에서 나온 줄기처럼 주 앞에서 자랐으니 그에게는 풍채나 위엄이 없고 우리의 시선을 끌 만한 매력이나 아름다움도 없다”고 예언했습니다. 사람으로 태어나신 하나님께서 아기였던 시절이 있다는 것은 엄연한 사실입니다. 이것은 인간 이성으로 이해할 수 없는 신비입니다. 성육신의 사실은 수용하는 믿음과 거절하는 불신의 원인이 됩니다. 기독교는 “… 하나님 아버지를 믿사오며 그 외아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사오니”라는 고백 위에 신앙의 터를 잡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성육신의 인정과 부정이 신앙인과 불신자를 구별하는 기준이라고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사람의 몸으로 오셨다는 것을 인정하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은 사람이고 하나님께 속한 것이요. 예수께서 그런 분이시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는 사람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성령을 받지 않은 사람입니다.”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은 시작부분에 예수님의 탄생 이야기를 어느 정도 상세하게 기술합니다. 이와 구별되게 요한복음은 예수님의 탄생 스토리가 없습니다. 대신에 그분의 성육신 내용을 기록합니다. 그 이유를 요한은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라고 밝힙니다. 그리고 자신의 책을 시작하면서 요한은 우선적으로 하나님과 아들 예수님과의 관계를 설명합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그리고 말씀의 실체를 이렇게 기술합니다.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 제자들과 함께 활동하는 예수님을 “말씀”으로 부른 것입니다.  그렇다면, 예수님은 태초에 계셨고, 예수님은 곧 하나님이십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을 칭하는 “말씀”은 희랍어 “로고스”입니다.  1세기 헬라 문화에서 로고스는 다양한 문맥에서 사용되었습니다. 구약성경을 자주 인용하는 요한은 히브리어 “말씀” 개념을  사용합니다. 말씀으로 번역되는 히브리어 “다바르”는 천지 창조 때에 하나님의 역동적인 창조의 능력과 관계합니다. 말씀은 곧 하나님을 의인화한 단어입니다. “그가 (하나님께서) 그의 말씀을 보내어 그들을 고치시고 위험한 지경에서 건지시는 도다.” 하나님의 말씀은 곧 역동적으로 일하시는 하나님 자신입니다. 구유에 뉘어 있던 그 아이가 바로 하나님이었습니다. 말씀이 육신되신 예수님께서 이제 우리 가운데 거하신다는  것이 성탄의 메시지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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