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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죽음, “승리의 출발 선”

죽음, “승리의 출발 선”

고대 희랍 사람들의 견해에 따르면 죽음은 인간 존재의 끝이 아닙니다. 대신 죽음은 인간을 하데스 (Hades) 속의 존재로 이끄는 그림자였습니다. 죽음은 더이상 생명이 아니었습니다. 생명이라 불리는 것이 죽음에 의해 완전히 멸망했기 때문입니다. 생명이 부재한 죽음이 이끄는 장소인 하데스는 모든 인간에게 무서운 공포의 세계였습니다. 그래서 희랍인들에게 생명은 최상의 선이었습니다. 

   그리스 고전 작가 헤시오도스는 생명은 인간이 소유할 수 있는 최대의 선이다고 말합니다. 그는 이 사실을 증명하기 위해 죽음을 설명합니다.  “거대하고 호화찬란하며 막대한 힘을 가진 신들로 알려진 티탄신 (Titan)들은 폭력과 파괴와 저열한 일에 자신들의 힘을 쏟아 붓는 신들이다. 이들은 언제나 지구의 끝이 있는축축한 곳에 안개 낀 어둠 아래 숨어 있다. 그곳은 엽겹고 축축하여 신들조차 혐오하는 깊고 큰 심연이며, 사람이 일단 그곳에 들어가면 나오지 못하는 상태로 잔인한 폭발들이 그들을 이리저리 뒹굴게 한다.  거기에는 어두운 밤의 자식들이 거주하고 있다. 그들은 공포스런 죽음의 신과, 죽음 신의 형제인 수면의 신과 악독한 어둠의 신이다. 그들은 쇠의 마음을 가졌고, 그들 속에는 퇴폐와 악덕이 가득하여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다루며, 누구든지 그들에게 한 번 사로잡히게 되면 강력한 옥죄임을 당하게 된다. 이들은 모든 신들 뿐만 아니라 심지어 불멸의 신들에게도 미움을 받는다.” 죽음은 존재하는 한 영역으로 인간에게 선을 빼앗는 어둠의 공간입니다.  

    호메로스의 작품 속에 등장하는 영웅들은 명예를 얻기 위해 자기 목숨을 걸었습니다. 위대한 평판을 얻는 영광스런 죽음은 영원한 생명을 얻는 행위로써 자신의 목숨을 바쳐야하는 대가를 요구했습니다. 전투에서 영예롭게 쓰러진 자들은 지상에서 그들의 명성으로 불멸의 삶을 살았습니다. 죽은 자들은 자신들의 명성에 대해 뭔가를 듣게 된다고 믿었습니다. 그렇지만 의로운 행위의 죽음들이 언제나 영광을 동반하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죽음 그 자체로 끝나기도 했습니다. 결국 죽음은 영광을 받는 동안에만 그 도시에 살아 있는 위대함이었습니다. 따라서 잘 죽는 것은 (위대하게 죽는 것은) 육체의 죽음을 정복하는 위대한 삶으로 고대 그리리스의 관습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어떻게 죽느냐는 중요한 문제였습니다. 한 개인의 죽음은 그 사람이 선한지 악한지를 결정하는 기준이 되었습니다. 결국 죽음은 윤리적인 문제로 등장합니다. 자살과 같은 심사숙고 하는 죽음이 가치가 있고 정당화 되었습니다. 무가치한 생활과 부끄러운 몸이나 모든 수고와 고난을 안고 있는 육체는 비관적으로 간주되어 죽음을 선택하게 했습니다. 이처럼 모의된 죽음은 외적인 부끄러운 육체적 삶을 생명으로 전환되는 기회이며, 그 행위는 하나님의 축복으로 자신의 운명을 옮기는 것으로 여겨졌습니다. 그러므로 죽음은 오늘의 선한 삶을 위한 단호한 결단과 수용으로 이어졌으며, 수명의 장단을 넘어 가치있는 삶을 소중히 하는 동기를 제공했습니다. 이러한 영웅적인 동기의 죽음과 이 땅에서의 가치에 따른 자살은 성경의 죽음과 명백히 다릅니다. 

   신약 성경에서 가장 빈번하게 죽음으로 번역되는 희랍어 “다나토스”는 죽어 있는 상태를 뜻합니다. 나사로가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는 “그가 잠잔다”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은 그의 죽음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인데 제자들은 그가 잠들어 쉬는 것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으로 생각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나사로가 죽었느니라”고 말씀합니다. 그 다음으로 자주 사용되는 “죽음”의 용어는 “아포드네스케인”입니다. 이 낱말은 진행의 의미가 포함된 “죽어진다”는 뜻으로 사용됩니다. 아기 예수님의 죽음을 피해 애굽에 머물던 요셉과 마리아는 “헤롯이 죽기까지” 그곳에 머물렀다고 기록합니다. 희랍어 “코이마오”는 죽음을 “잠잔다”고 번역됩니다. 바울은 예수님의 부활을 실제 목격한 사람들 중에 현재 죽은 자도 있다는 것을 이렇게 기록합니다. “그 후에 오백여 형제에게 일시에 보이셨나니 그 중에 지금까지 대다수는 살아 있고 어떤 사람은 잠들었으며.” 이 죽음들은 하나님의 세계와 그분의 존재와 멀어진 모든 인간 삶의 영역으로 극도의 공포가 있는 곳입니다.  바울은 이 질서를 “오직 그에게만 죽지 아니함이 있고 가까이 가지 못할 빛에 거하시고 어떤 사람도 보지 못하였고 또 볼 수 없는 이시니”라고 설명합니다. 

   이 낱말들은 영웅적 행위를 묘사하는 데는 결코 사용되지 않습니다. 비록 그리스도의 죽음이 인류 구원을 위한 영웅적인 유사성이 있지만, 성경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한 죽음이라고 설명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아직 죄인 되었을 때에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위하여 죽으심으로 하나님께서 우리에 대한 자기의 사랑을 증하셨느니라.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의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은즉 화목하게 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아나심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을 것이니라.”  그리스도의 죽음의 의도는 인간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낱말들은 자살과 관계되어서는 결코 사용되지 않습니다. 죽음은 언제나 영혼을 뿌리 채 뒤흔드는 공포스러운 잔인함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순교했던 사도들의 죽음은 그리스도를 향한 깊은 충성심이었습니다. 인간을 사랑하시는 하나님을 향한 그들의 신의는 죽음을 겁낼 만큼 목숨에 집착하지 않았습니다.  사도 요한은  순교자들의 죽음을 “그들은 죽기까지 자기들의 생명을 아끼지 아니하였도다”고 설명합니다. 사도들은 또한 충성된 자들에게는 면류관을 주신다는 하나님의 말씀을 절대로 신뢰했습니다. “너는 장차 받을 고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볼지어다 마귀가 장차 너희 가운데에서 몇 사람을 옥에 던져 시험을 받게 하리니 너희가 십 일 동안 환난을 받으리라 네가 죽도록 충성하라 그리하면 내가 생명의 관을 네게 주리라.”

   죽음의 더 중요한 요소는 죽음을 이기는 유일한 분인 하나님의 돌보심이 시작되는 것입니다. 죽음은 인간의 완전 무너진 상태로 스스로는 모든 활동이 중단된 현실입니다. 이런 사망의 상태를 뜻하는 “다나토스”는 희망과 돌봄의 시작이라는 의미도 있습니다. 이 원리를 바울은 다음과 같이 설명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그의 죽으심과 합하여 세례를 받음으로 그와 함께 장사되었나니 이는 아버지의 영광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심과 같이 우리로 또한 새 생명 가운데서 행하게 하려 함이라.”  그리스도의 죽음을 받아들이는 신자들, 즉 하나님과 친밀한 교제를 나누고 그분을 위해서 충성하는 그리스도인의 삶에는 하나님의 세심한 돌보심이 시작되었습니다. 이제 죽음은 그리스도인의 삶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없습니다.  이 사실을 자신의 삶에서 체험한 바울은 우리를 두렵게 하는 죽음을 향하여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라고 조롱합니다. 결코 있을 수 없다는 강조입니다. 연약한 인간의 끝은 전능하신 하나님의 선하심이 출발하는 포인트입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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