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ome칼럼아! 그런뜻이었구나 두려움(1), 좋은 면 (경외심)

[칼럼: 아!그런뜻이었구나] 두려움(1), 좋은 면 (경외심)

두려움(1), 좋은 면 (경외심)

공포증을 의미하는 포비아(phobia)는 외래어입니다. 포비아는 두려움 혹은 공포를 뜻하는 고전 희랍어 포보스에서 유대되었습니다. 포보스는 항상 도망가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동사형은 “포베오”로 “도주하다” 혹은 “놀라다”는 뜻입니다. 호머의 작품에서는 이 단어가 거의 항상 “공포” 또는 “도주”로 사용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포보스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두려움”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용기를 의미하는 “타로스”의 반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황제나 신에 대한 “경외” 혹은 “숭배”를 의미합니다. 한없이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 앞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감정을 포보스라 했습니다.
  이 단어는 사용되는 방식이나 언급되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릅니다. 좋은 의미나 혹은 나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유용하고 칭찬할 만한 것, 또는 사악하고 경멸할 만한 것을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겁쟁이의 특성인 “두려움”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혹은 진정한 신앙인의 마음 자세인 “경외심”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포보스의 좋은 면을 살펴 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능력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태도를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무서워 하며 “유령이다!”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합니다. 광풍으로 인해 제자들이 승선한 배가 난파 직전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다를 꾸짖으며“잠잠하라”고 명령합니다. 바다가 곧 잠잠해 지는 것을 본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어째서 너희가 무서워 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초월적 행위의 현실을 직접 보고 깨달은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침상에 들려 온 중풍병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가 곧 일어나 상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인이라는 마을게 거주하는 과부의 아들을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소년아 내가 네가 말한다.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죽었던 아이가 일어나 앉은 모습을 본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봐 주셨다”고 서로 말했습니다.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 생활하는 자를 보시며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자,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갑니다. 그 상황을 본 사람들과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 했습니다. 병자들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믿을 수 없는 권능에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나타내기 위해 포보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제사장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할 때 오른쪽에 있는 주님의 천사를 보았고 느꼈던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사가랴는 천사를 보고 매우 놀라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위로해 줍니다. 또 이 단어는 수 개월 동안 벙어리 되어 말을 못하던 사가랴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하여 말이 회복되었을 때,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상태를 기술합니다. 밤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 자신들 앞에 나타난 천사를 보고 목자들이 보인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는 그들에게 “두려워 말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격려합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무덤 입구의 돌을 천사가 굴려냈을 때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무서워하는 반응에 사용되었고, 빈 무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때 여인들의 반응에 사용되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위로의 말씀을하십니다. 이 단어는 초자연적 현상의 경이로움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단어가 초대 교회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을 때 느꼈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사도들을 통해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단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거짓말을 하여 성령을 속인 후에 곧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에베소에서 악귀 들린 사람이 마술하는 유대인들을 쓰려 뜨려 제압할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내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누가는 초대 교회는 주님을 두려워 하는 중에 성령의 위로를 받아 내부적으로 평안하며 든든히 세워졌다고 기록합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공관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는 포보스가 나쁜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모든 경우에 이 단어는 활동하는 신성한 능력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느낌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신학자 오토가 그의 친구 볼트만에게 “성령에 관한 사상”인 자신의 새로운 책을 소개하면서 사용한 “완전히 타자,”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외부와 그 너머의 존재하는 무언가와 마주 했을 때의 감정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경이로움과 사랑과 찬양에 푹 빠져든 인간의 감정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면전에서 피조물에게 임하는 경외심을 묘사합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포보스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갖는 본질적인 경외심입니다.  

   두려움이라고 번역되는 포보스는 그 의미가 두려움 보다는 “경외심”의 의미를 갖습니다. 원조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든든히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들의 삶에 성령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안에서 돕고 계시며 또한 그 뜻을 이루도록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이란 우리 안예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합당한 존경과 경외심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우리에게 누군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포보스는 영원한 삶을 소망하는 사람,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동역자로 자신의 책임을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의 감정을 묘사합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인 경외에서 가장 위대한 일들이 원인 된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이남규 목사

두려움 (1) 좋은 면 (경외심)

공포증을 의미하는 포비아(phobia)는 외래어입니다. 포비아는 두려움 혹은 공포를 뜻하는 고전 희랍어 포보스에서 유대되었습니다. 포보스는 항상 도망가는 개념을 갖고 있습니다. 이 낱말에 해당하는 동사형은 “포베오”로 “도주하다” 혹은 “놀라다”는 뜻입니다. 호머의 작품에서는 이 단어가 거의 항상 “공포” 또는 “도주”로 사용됩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사회에서 포보스는 가장 넓은 의미에서 “두려움”을 의미했습니다. 이는 용기를 의미하는 “타로스”의 반대입니다. 뿐만 아니라, 이 단어는 황제나 신에 대한 “경외” 혹은 “숭배”를 의미합니다. 한없이 자기보다 우월한 존재 앞에서 인간이 경험하는 감정을 포보스라 했습니다.
  이 단어는 사용되는 방식이나 언급되는 문맥에 따라 의미가 다릅니다. 좋은 의미나 혹은 나쁜 의미를 가질 수 있으며, 유용하고 칭찬할 만한 것, 또는 사악하고 경멸할 만한 것을 묘사할 수도 있습니다. 겁쟁이의 특성인 “두려움”으로 사용될 수도 있고, 혹은 진정한 신앙인의 마음 자세인 “경외심”을 뜻하기도 합니다. 이곳에서는 포보스의 좋은 면을 살펴 봅니다. 

   신약 성경에서 이 단어는 일반적으로 예수님의 사역과 하나님의 능력에 반응하는 사람들의 마음의 태도를 표현합니다. 예수께서 바다 위를 걸어오시는 것을 본 제자들은 겁에 질려, 무서워 하며 “유령이다!”라고 소리질렀습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안심하라 내니 두려워 말라”고 말씀합니다. 광풍으로 인해 제자들이 승선한 배가 난파 직전에 있을 때, 예수님께서 바다를 꾸짖으며“잠잠하라”고 명령합니다. 바다가 곧 잠잠해 지는 것을 본 제자들은 심히 두려워합니다. 예수님은 그들을 향하여 “어째서 너희가 무서워 하느냐? 아직도 믿음이 없느냐?”고 말씀합니다. 예수님의 초월적 행위의 현실을 직접 보고 깨달은 제자들은 두려워했습니다.        

   침상에 들려 온 중풍병자를 향하여 예수님께서 “일어나 네 상을 가지고 집으로 가라”고 명령합니다. 그가 곧 일어나 상을 가지고 가는 모습을 본 제자들은 두려워하며 하나님께 영광을 돌립니다. 나인이라는 마을게 거주하는 과부의 아들을 죽었을 때, 예수님께서 “소년아 내가 네가 말한다. 일어나라!”고 말씀합니다. 죽었던 아이가 일어나 앉은 모습을 본 사람들 모두가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사람들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돌봐 주셨다”고 서로 말했습니다. 귀신들려 무덤 사이에 생활하는 자를 보시며 예수님께서 “더러운 귀신아 그 사람에게서 나오라”고 명령하자, 귀신들이 돼지 떼에게 들어갑니다. 그 상황을 본 사람들과 그 소식을 들은 사람들이 크게 두려워 했습니다. 병자들을 회복시키시는 예수님의 믿을 수 없는 권능에 사람들이 보인 반응을 나타내기 위해 포보스가 사용되었습니다. 

   이 단어는 제사장 사가랴가 성전에서 분향할 때 오른쪽에 있는 주님의 천사를 보았고 느꼈던 감정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사가랴는 천사를 보고 매우 놀라서 두려움에 휩싸였습니다.” 천사는 그에게 “사가랴야, 두려워하지 말라. 네 기도를 하나님께서 들으셨다”고 위로해 줍니다. 또 이 단어는 수 개월 동안 벙어리 되어 말을 못하던 사가랴에게 초자연적인 힘이 작용하여 말이 회복되었을 때,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두려움으로 반응하는 상태를 기술합니다. 밤에 들판에서 양떼를 지키고 있을 때 자신들 앞에 나타난 천사를 보고 목자들이 보인 반응을 설명하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주의 사자가 곁에 서고 주의 영광이 그들을 두루 비추매 크게 무서워하는지라.” 천사는 그들에게 “두려워 말라. 보아라. 모든 백성을 위한 큰 기쁨의 소식을 가지고 왔다”고 격려합니다. 이 단어는 예수님의 무덤 입구의 돌을 천사가 굴려냈을 때 무덤을 지키던 경비병들의 무서워하는 반응에 사용되었고, 빈 무덤을 보고 집으로 돌아갈 때 여인들의 반응에 사용되었습니다. “그 여자들이 무서움과 큰 기쁨으로 빨리 무덤을 떠나 

제자들에게 알리려고 달음질할새,” 예수님께서 그들을 만나 “무서워하지 말라 가서 내 형제들에게 갈릴리로 가라 하라 거기서 나를 보리라”고 위로의 말씀을하십니다. 이 단어는 초자연적 현상의 경이로움에 두려워하는 사람들의 마음을 나타냅니다.    

   사도행전에서는 이 단어가 초대 교회 사람들이 표적과 기사를 통해 하나님의 능력을 보았을 때 느꼈던 마음의 상태를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사도들을 통해 많은 기적과 표적이 나타났습니다. 그러자 모든 사람들에게 두려운 마음이 생겼습니다.” 이 단어는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가 거짓말을 하여 성령을 속인 후에 곧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냅니다. “온 교회와 이 일을 들은 모든 사람들이 큰 두려움에 사로잡혔습니다.” 에베소에서 악귀 들린 사람이 마술하는 유대인들을 쓰려 뜨려 제압할 때 주변 사람들의 반응을 나타내기 위해 이 단어가 사용됩니다. “이 일이 에베소에 사는 모든 유대인과 그리스인들에게 알려지자, 그들은 두려움에 사로잡혔으며, 주 예수의 이름을 찬양했습니다.” 누가는 초대 교회는 주님을 두려워 하는 중에 성령의 위로를 받아 내부적으로 평안하며 든든히 세워졌다고 기록합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공관복음서나 사도행전에서는 포보스가 나쁜 의미로 사용된 경우가 단 한 번도 없습니다.  모든 경우에 이 단어는 활동하는 신성한 능력에 직면했을 때 사람들의 마음 속에 있는 느낌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신학자 오토가 그의 친구 볼트만에게 “성령에 관한 사상”인 자신의 새로운 책을 소개하면서 사용한 “완전히 타자,” 즉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외부와 그 너머의 존재하는 무언가와 마주 했을 때의 감정을 묘사합니다. 그것은 경이로움과 사랑과 찬양에 푹 빠져든 인간의 감정입니다. 그것은 창조주의 면전에서 피조물에게 임하는 경외심을 묘사합니다. 가장 깊은 의미에서 포보스는 하나님 앞에서 인간이 갖는 본질적인 경외심입니다.  

   두려움이라고 번역되는 포보스는 그 의미가 두려움 보다는 “경외심”의 의미를 갖습니다. 원조 교회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가운데 든든히 세워졌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그들의 삶에 성령의 위로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은 “항상 복종하여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고 권면합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께서는 자기의 기쁘신 뜻을 이루기 위하여 우리 안에서 돕고 계시며 또한 그 뜻을 이루도록 힘과 능력을 공급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두려움과 떨림이란 우리 안예 계시는 하나님을 향한 합당한 존경과 경외심입니다. 베드로는 그리스도를 주로 삼는 우리에게 누군가 우리 안에 있는 소망이 무엇인지 묻는다면 온유함과 두려움으로 대답할 것을 준비하라고 조언합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포보스는 영원한 삶을 소망하는 사람, 항상 하나님을 의식하는 사람, 그리고 하나님의 동역자로 자신의 책임을  결코 잊지 않는 사람의 감정을 묘사합니다. 신약성경은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끊임없는 인식인 경외에서 가장 위대한 일들이 원인 된다는 사실을 전합니다. 이남규 목사

spot_img

최신 뉴스

인기 뉴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