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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아!그런뜻이었구나] 애통, “경건한 슬픔”  

애통, “경건한 슬픔”  

트로이 전쟁에 함께 참전하자고 젊은 아킬레우스를 찾아간 오디세우스는 그를 향해 “오, 아카이아인 중에서 가장 용맹스런 용사여, 당신을 능가할 자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그를 칭송합니다. 그의 마음이 움직이자 오디세우스는 전쟁에 임하는 자의 마음의 각오를 말합니다. “시체를 보고 애통해 하면 안된다. 많은 사람들이 매일 쓰러지기 때문이다. 죽임 당한 자를 장사하는 것은 마땅하다. 그러나 마음을 굳건히 하고 애통해 하는 것은 단 하루 뿐이어야 한다.” 죽음 앞에 슬퍼하는 것은 인간의 본능임을 깨닫게 합니다. 이곳에 애통하다는 의미로 사용된 희랍어는 “펜테오”입니다. 이 낱말은 슬픔, 비탄, 애통, 비애와 같은 의미로 마음 속의 극심한 슬픔을 표현할 때 사용됩니다.  

   창세기에 야곱이 애통해 하는 장면이 있습니다. 그의 아들 요셉이 사나운 들짐승들에게 찢겨 죽었다는 소식을 들은 야곱의 태도를 설명할 때 이 단어가 사용되었습니다. “자기 옷을 찢고 굵은 베로 허리를 묶고 오래도록 그의 아들을 위하여 애통하니 (펜테오) 그의 모든 자녀가 위로하되 그가 그 위로를 받지 아니하여 이르되 내가 슬퍼하며 (펜테오) 스올로 내려가 아들에게로 가리라 하고 그의 아버지가 그를 위하여 울었더라.” 다윗 왕이 아들 압살롬의 비극적인 죽음의 소식을 들었을 때, 이 단어를 사용하여 그의 애통하는 마음을 표현합니다. “왕의 마음이 심히 아파 문 위층으로 올라가서 우니라 그가 올라갈 때에 말하기를 내 아들 압살롬아 내 아들 내 아들 압살롬아 차라리 내가 너를 대신하여 죽었더면, 압살롬 내 아들아 내 아들아 하였더라 어떤 사람이 요압에게 아뢰되 왕이 압살롬을 위하여 울며 슬퍼하시나이다 하니.” 사랑하는 자식의 죽음 소식을 들은 부모의 애통함은 눈물로 표현됩니다.   

   플루타크는 펜테오의 의미를 설명하기 위해 아들을 잃은 여왕에게 철학자가  했던 충고를 소개합니다. 다음은 그 철학자가 슬픔에 잠긴 아르시노 여왕에게 했던  내용입니다. 신들의 왕인 제우스가 각각의 신들에게 인간의 다양한 영예를 그들에게 분배하여 맡길 때, 애통은 그곳에  나타나지 않았습니다. 대신 모든 분배가 끝난 후에야 그가 왔습니다. 애통은 자신에게도 어떤 영예를 분배해 주는 것이 마땅하다고 주장합니다.이미 모든 영예를 다 나눠 준 제우스는 당황해 하면서 죽은 자들의 경우에 수여되는 “눈물과 슬픔”이라는 영예를 줍니다. 그후 모든 신들은 자신을 존경하는 사람들에게 그들이 가진 영예를 수여했고, 마찬가지로 애통도 자신을 존중하는 사람을 소중하게 대우했습니다. 

   이야기를 끝마친 철학자는 여왕에게 이렇게 조언합니다. “그러므로 부인, 당신이 애통을 무례하게 대하면 그분은 당신 가까이 오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당신이 슬픔과 비통함을 소중히 하고 존경한다면, 그분은 당신을 사랑하고 애정 어린 마음으로 영원히 당신과 함께 있을 것입니다.” 철학자의 이야기에 감탄한 여왕은 평안한 마음과 함께 애도와 탄식이 완화되었습니다. 비록 깊은 슬픔이지만 애통은 일종의 영예인 것입니다. 

   위에서 살펴 본 것처럼 이 낱말은 고대 희랍 사회에서 인간의 두 현상을 나타낼 때 사용되었습니다. 첫째, 펜테인은 애도를 설명하는 가장 강력한 말입니다. 이 단어는 죽은 자를 애도하거나 죽은 자와 같은 사람을 애도하는 데 사용되는 단어입니다. 사도 바울은 심각한 도덕적 죄를 범하고도 뉘우치기 보다는 오히려 교만하여 져서 애통하지 않는 그리스도인들을 책망할 때 이 단어를 사용합니다.   죄에 대한 그리스도인의 슬픔은 뭔가 잘못되었다는 온화하고 막연한 후회일 뿐만 아니라, 그것은 죽은 자에 대한 슬픔만큼이나 극심한 슬픔임에 틀림없습니다.

   둘째, 펜테인은 언제나 눈물과 연결됩니다. 애통의 외적인 표현은 눈물로 나타납니다.  그렇기 때문에 애통이 사용된 문장에는 예외 없이 눈물이 언급됩니다. 펜테인은 마음 속에 아픔을 가져오는 슬픔뿐만 아니라 눈에 눈물을 흘리게 하는 내면 세계를  나타냅니다. 애통은 마음 속의 아픔을 사람 눈에 보이게 하는 외적인 표시입니다. 야고보는 죄인들을 향하여 “슬퍼하며 애통하며 울지어다 너희 웃음을 애통으로, 너희 즐거움을 근심으로 바꿀지어다”고 죄의 심각성을 깨달을 것을 호소합니다.
  이 단어의 가장 중요한 용도는 팔복에서 사용될 때입니다. 누가는 이 낱말을 야고보처럼 사용합니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배부른 자여 너희는 주리리로다 화 있을진저 너희 지금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로다.” 마태는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라고, 애통은 그 당사자에게 유익을 가져온다는 사실을 언급합니다. 다윗은 애통의 경험을 이렇게  남겼습니다. “하나님께서는 나의 통곡하는 슬픔을 춤으로 바꿔 주셨고, 나에게서 슬픔의 상복을 벗기시고 잔치 옷으로 갈아 입히셨다.”

   젊은 날 방탕한 삶에 이끌렸던 어거스틴은 회심하여 기독교의 성자가 됩니다. 자신이 타락의 늪에 빠졌을 때 어머니가 하셨던 기도를 이렇게 적었습니다. “나의 어머니는 보통 어머니들이 죽은 자식의 시체 앞에서 처절하게 애통하는 것보다 더 당신 앞에서 울부짖고 있습니다. 주님, 그녀는 제가 영적으로 죽어 누어 있는 것을 분별하고, 눈물의 기도를 쉬지 않습니다. 당신은 그녀의 흘러내리는 눈물을 멸시하지 않았습니다.” 어머니의 애통한 눈물의 기도는 허랑방탕한 구렁 속에 있던 아들을 빛의 세상으로 꺼낸 것입니다. 

   어거스틴은 회심의 순간 자기 안에 일어났던 일을 이렇게 고백합니다. “내 영혼의 은밀한 밑바닥으로부터 깊은 생각이 하나로 모아져 나의 비참한 모든 모습을 내 마음의 눈 앞에 쌓아 놓을 때, 내  속에 엄청난 폭풍이 일어나 강한 눈물의 소나기를 몰고 왔다. 나는 어느 무화과 나무 아래 주저 앉아 얼마나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내 눈의 홍수가 주님께 받아들여질 만한 제물로 쏟아져 나왔다. 나는 반복적으로 계속 부르짖었다. ‘오 주여, 언제까지니이까? 언제까지입니까? 왜 지금은 안됩니까?  왜 이 시간에는 나의 불결함을 끝나게 하시지 않습니까?’ 나는 가장 비통함으로 울부짖고 있었다. 

   이 때, 갑작스럽게 ‘들고 읽어라, 들고 읽어라’라는 노랫 소리가 들려 왔다. 나는 흐르는 눈물을 억제하고 일어나 성경책을 들었고, 제일 먼저 찾은 장을 나를 향한 하나님의 명령이라고 스스로 생각했다. 나는 성경을 펼쳐서 처음 본 구절을 조용히 읽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하거나 술 취하지 말며 음란하거나 호색하지 말며 다투거나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더 이상 읽지 않았다. 더 이상 읽을 필요가 없었다. 왜냐하면 이 말씀을 읽자마자 내 마음에 주입된 평온의 빛에 의해 의심의 모든 어둠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펜테인은 죄에 대한 심각성을 죽은 자를 애도하는 사람의 슬픔만큼 받아들일 때까지는 경건된 삶이 시작되지 않는다는 것을 알려줍니다. 기독교 신앙 속에 흐르는 밝고 아름다운 생명의 질서는 상한 마음의 경건한 슬픔에서 확인됩니다. 

이남규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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