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의 영토_김카리스
예루살렘 성전은 유대인들에게 자신들의 민족적, 종교적 정체성을 대표하는 장소였다. 그런 곳이 로마군에 의해 파괴된 CE 70년 이후, 유대인들은 자신의 민족을 콕 집어 선택한 신에게 더이상 제사를 드릴 수 없게 된다. 성전 제사 이외에 그들과 신의 관련성으로 민족의 정체성을 대변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가를 고민한다. 더군다나 여러 나라로 흩어져 디아스포라의 삶을 살아가게 된 그들에게 장소를 뛰어 넘어 영토의 역할을 하는 무엇이 절실했다. 이 천년이 넘는 오랜 유수의 시간동안 이방 문화의 극심한 박해와 동화의 압박 속에서 자신들이 잃어 버린 영토와 성전 말고, 즉, 장소와 공간 대신 그들에겐 조상 대대로 내려온 정해진 ‘시간의 영토’가 있었다. 금요일 해 질 녘부터 토요일 해 질 녘까지의 시간, 안식일을 지키는 것은 이방의 땅에서 자신들이 누구인지를 잊지 않는 생존과 결속의 울타리가 되었다. 현대 시오니즘 유대인 사상가 아하드 하암(Aḥad Haʿam)은 “유대인들이 안식일을 지킨 것이 아니라, 안식일이 유대인들을 지켰다”라고까지 말한다.
유학 차 처음 이스라엘에 갔을 때 내게 가장 생경하게 느껴진 이스라엘만의 무엇은 안식일이었다. 안식일엔 공공 교통수단이 운행을 멈추고, 상점들이 문을 닫았다. 안식일에 운전 중 길을 잘 못 찾아 들어선 예루살렘의 한 종교인 마을에서 나와 차에 동승한 친구들은 돌 팔매질을 받았었다. 금지된 안식일의 행위 중 하나인 운전을 하는 이방인인에게 날아든 영역권의 표시였다. 조상들의 율법대로 살려는 사람들이 모인 그 마을이라는 장소도 문제였으나 더 큰 요인은 그들의 안식일이라는 시간을 우리가 침범한 것일 수도 있었을 것이다.
시간은 유대인뿐 아니라 유대인이란 민족이 형성되기 훨씬 이전 인류의 조상 아담과 하와에게서도 중요한 정체성의 지표임을 볼 수 있다. 그들의 타락으로 에덴에서 쫓겨날 때 인류의 첫 아버지와 어머니는 생명 나무 열매에 대한 접근권도 잃는다. 하나님과 함께하던 친밀한 거주 공간을 잃었을 뿐 아니라 그들의 시간에도 제한이 걸린 것이다. 즉, ‘죽음’으로 나아가는 존재가 되었다. 신과의 관계를 누릴 시간적 공간이 영원에서 죽음 전 몇 년, 수로 한정되고 그 제한된 시간 마저 고통이 동반되게 되었다.
시편 90편은 인간이 가진 시간의 유한성을 이렇게 표현한다.
3. 주께서 사람을 티끌로 돌아가게 하시고 말씀하시기를 너희 인생들은 돌아가라 하셨사오니
4. 주의 목전에는 천 년이 지나간 어제 같으며 밤의 한 순간 같을 뿐임이니이다
5. 주께서 그들을 홍수처럼 쓸어가시나이다 그들은 잠깐 자는 것 같으며 아침에 돋는 풀 같으니이다
6. 풀은 아침에 꽃이 피어 자라다가 저녁에는 시들어 마르나이다
7. 우리는 주의 노에 소멸되며 주의 분내심에 놀라나이다
8. 주께서 우리의 죄악을 주의 앞에 놓으시며 우리의 은밀한 죄를 주의 얼굴 빛 가운데에 두셨사오니
9. 우리의 모든 날이 주의 분노 중에 지나가며 우리의 평생이 순식간에 다하였나이다
10. 우리의 연수가 칠십이요 강건하면 팔십이라도 그 연수의 자랑은 수고와 슬픔뿐이요 신속히 가니 우리가 날아가나이다
사실, 이런 시간의 한계를 절감하는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 앞에서 사람이 인간의 한계, 피조물의 현실을 직시하여 겸손케 만드는 기재로도 쓰인다. 그래서 차라리 이를 시편 90편의 화자는 지혜라 부른다.
12. 우리에게 우리 날 계수함을 가르치사 지혜로운 마음을 얻게 하소서
그러나 잃어버린 공간과 시간에 대한 회복의 소망은 성경안에 줄곧 자라왔다. 특히, 사람의 시간을 앗아가기 마련인 일을 금하고 창조의 완성을 묵상하는 신과 함께 하는 대표적인 시간, 안식일 속에서 그 묵직함을 보게 된다. 이 시간이 민족의 정체성으로 연결되는 역사적 기록은 출애굽 후 시내산 모세의 시대일 것이다. 이 시간은 십계명의 네 번째 계명으로 명문화 되었고 (출애굽기 20:8-11), 언약의 표징으로 공표되었으며 (31:16-17), 신명기 5장에 가서는 창조 외에 출애굽 구원의 은혜가 그 의미에 더해지며 재 공포 된다.
이 시간의 존중 여부는 이스라엘에게는 하나님과 언약 백성인지 아닌지 구분하는 지표였다. 광야에서 안식일을 범한 자들에 대한 민수기 15장의 기록도 안식일 준수가 참 심각하게 다루어 졌음을 보여준다. 포로기 이후 귀환 공동체 때는 이방 상인들이 안식일에도 예루살렘 성안으로 들어와 장사를 하고 백성들이 물건을 사는 등 이 시간을 빼앗아 민족의 정체성을 무너트리는 일이 성행했다. 느헤미야는 이 일을 막기 위해 안식일 직전에 성문을 걸어 잠그는 극단적인 개혁을 단행하기도 한다.
예수의 예로 넘어가 보자. 안식일에 육체의 고통가운데 있는 자들을 고치고 회복시키는 일을 한 예수를 금하는 유대 종교 지도자들에게 자신이 그 시간, 안식일의 주인이심을 말씀하신다(마가복음 2:27-28). 또한, 안식일에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일한다”라고 말하여 언뜻 노동을 금하는 안식일의 법칙에 정면으로 반하는 듯한 말씀을 하시기도 하신다(요한복음 5:16-17). 그러나, 이는 생명을 살리는 일, 즉, 시간을 회복하는 것이 본질임을 안식일에 대한 노동의 고정관념을 뒤엎으며 천명하신 것이다. 더군다나 예수는 부활로 죽음을 정복하여 시간의 회복, 영원에 잇댄 삶의 길을 보여주는 것을 자신의 사역의 절정에 놓는다. 영원한 교제에 대한 열망이 사람들 뿐 아니라 하나님안에 있음을 보여준다.
시편 90편의 화자는 장소의 은유로 시간 속, 영원한 시간 속의 그 회복된 관계를 노래한다.
1. 주여 주는 대대에 우리의 거처가 되셨나이다
2. 산이 생기기 전, 땅과 세계도 주께서 조성하시기 전 곧 영원부터 영원까지 주는 하나님이시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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