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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눈 뜬 장님, 눈 먼 바리새인’-밴쿠버 사랑의교회 이은진 목사

눈 뜬 장님, 눈 먼 바리새인(요9:1-41)

밴쿠버 사랑의교회 이은진 목사

날 때부터 눈 먼 사람이 앞을 보게 되는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구약에도 하나님의 사람이 기적 베푸는 사건이 여기저기 나오지만 장님이 눈을 뜨는 기적은 없었습니다. 창세부터 지금까지 이런 일은 없었습니다. 엄청난 기적이었습니다. 이런 일을 당하면 함께 기뻐하고 하나님께 감사하고 예수님을 믿어야 할텐데, 좋은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고 사소한 것을 가지고 시비 거는 사람이 등장합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입니다.

왜 시비를 걸고 있을까요?

9:14 -그런데 예수께서 진흙을 개어 그의 눈을 뜨게 하신 날이 안식일이었다

 그 날이 안식일이었기 때문입니다.

십계명에는 안식일을 거룩하게 지키고 일하지 말 것을 명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어떤 것이 일의 범주에 들어가는가 하는 문제가 생기기 때문에 그들은 안식일에 하지 말아야 할 일에 대해 책을 만들어 가지고 있습니다. 그 중의 하나가 진흙을 반죽하면 안되는 것입니다. 도자기나 벽돌을 만드는 일의 기초이기 때문입니다. 한 걸음 더 나가서 절대 흙을 개면 안된다까지 해석해서 예수님이 침을 뱉어 진흙을 갠 것을 반죽의 행위로 보았습니다. 그리고 죽기 직전이 아니면 내일 고칠 수 있으면 두라고 되어 있는데, 내일 기다려도 될 장님을 안식일 고쳤다는 것이 그들에게는 거슬렸습니다. 진짜 좋은 일, 큰 일은 보지 못하고 사소한 것 트집 잡아 시비를 겁니다.

우리도 교회생활 하면서 좋은 것, 큰 것 보이지 않고 사소한 것이 자꾸 눈에 보이면 내가 바리새인이 되고 있지 않나 조심해야 합니다. 사소한 것이 마음에 짐이 되고 문제가 됩니다. 거룩한 것, 아름다운 것, 좋은 것이 눈에 보이지 않고 조그마한 것이 시험이 되고 짐이 되면 바리새인이 되고 있는 것입니다.

참 눈먼 사람이 누구입니까? 바리새인입니다. 보이지 않으니 하나님의 아들을 십자가에 못 박은 것입니다.

바리새파 사람들이 눈 뜬 사람을 심문합니다. 이 사람은 간증을 잘 하는 사람입니다.

9:15-그는 “그분이 내 눈에 진흙을 바르신 다음에 내가 눈을 씻었더니, 이렇게 보게 되었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리새파 사람들 사이에서 논란이 일어납니다.

9:16- 바리새파 사람 가운데 더러는 “안식일을 지키지 않는 것으로 보아서, 그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사람이 아니다” 하고 말하였으나, 더러는 “죄가 있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표적을 행하여 보일 수 있겠는가?” 하고 말하였다. 그래서 그들 사이에 분열이 생겼다.

창세전부터 없었던 엄청난 기적이 있습니다. 그리고 안식일 지켜야 할 규율을 어긴 사람이 있습니다. 어떤 것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는가?  큰 일이 아니라 사소한 것이 그들의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때부터 바리새파 사람들은 점점 눈이 멀어갑니다.

9:17 그들은 눈멀었던 사람에게 “그가 네 눈을 뜨게 하였는데, 너는 그를 어떻게 생각하느냐?” 하고 다시 물었다. “그는 예언자입니다” 하고 그가 대답하였다.

이제부터 스토리를 보면 이중주가 벌어집니다. 장님은  점점 눈이 뜨여지고 바리새인은 점점 눈이 멀어갑니다.

9:11그가 대답하였다. “예수라는 사람이 진흙을 개어 내 눈에 바르고, 나더러 실로암에 가서 씻으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내가 가서 씻었더니, 보게 되었습니다.”

곰곰이 생각하니 깨달음이 왔습니다. 영의 눈이 뜨여진 것입니다. 점점 영의 눈이 뜨여지고 있습니다.

바리새인이 그 부모를 찾습니다.

:18-19 유대 사람들은, 그 사람이 전에 눈이 멀었다가 보게 되었다는 사실을 믿지 않고, 마침내 그 부모를 불러다가  “이 사람이,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당신들의 아들이오? 그런데 지금은 어떻게 보게 되었소?” 하고 물었다.

그 전에는 장님이 눈을 떴다는 것은 인정했습니다 그런데 점점 눈이 멀어져 이제 장님이 아니었다고 합니다. 이들의 눈이 점점 멀어집니다.

부모를 불러 물어봅니다. 부모도 눈치가 있어 슬슬 뺍니다.

9:20-22 부모는 대답하였다. “이 아이가 우리 아들이라는 것과, 나면서부터 눈먼 사람이었다는 것은, 우리가 압니다. 그런데 우리는 그가 지금 어떻게 보게 되었는지는 모르고, 또 누가 눈을 뜨게 하였는지도 모릅니다. 다 큰 사람이니, 그에게 물어 보십시오. 그가 자기 일을 이야기할 것입니다.” 그 부모는 유대 사람들이 무서워서 이렇게 대답한 것이다.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고백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회당에서 내쫓기로, 유대 사람들이 이미 결의해 놓았기 때문이다. 

회당에서 쫓긴다는 것은, 지금이라면 한 교회 나가면 다른 교회 나가면 되지만, 이 당시에는 갈 때가 없습니다. 받아주지 않습니다.

요 9:24- 바리새파 사람들은 눈멀었던 그 사람을 두 번째로 불러서 “영광을 하나님께 돌려라. 우리가 알기로, 그 사람은 죄인이다” 하고 말하였다.

눈이 머는 속도가 가속되고 있습니다. 기적은 인정했다가 아니다 했다가 예수는 죄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눈 멀었던 사람은 점점 영의 눈이 뜨여진다. 왜 바리새파 사람들이 자기를 불러 이렇게 하는지 감이 왔습니다. 눈이 뜨여지면 담대해집니다.

9:25- 그는 대답하였다. “나는 그분이 죄인인지 아닌지는 모릅니다. 다만 한 가지 아는 것은, 내가 눈이 멀었다가, 지금은 보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9:26 그들은 다시 물었다. “그 사람이 네게 한 일이 무엇이냐? 그가 네 눈을 어떻게 뜨게 하였느냐?”

9:27 그는 대답하였다. “그것은 내가 이미 말씀드렸는데 여러분은 곧이듣지 않았습니다. 그러면서 어찌하여 다시 들으려고 하십니까? 여러분도 그의 제자가 되려고 합니까?”

이제는 바리새파 사람들을 놀리는 정도가 되었습니다. 부모님은 겁이 나서 뺐는데 자신이 생겼습니다. 배운 것도 없고 일생 구걸만 한 거지인데, 앞에 있는 사람은 성경박사들인데 실체를 보고 나니까 겁이 없어집니다.

궁금해서 그런 것이 아님을 알았습니다.

바리새인들은 평정을 잃고 눈이 멀어갑니다.

9:28-29 그러자 그들은 그에게 욕설을 퍼붓고 “너는 그 사람의 제자지만, 우리는 모세의 제자다. 우리는 하나님이 모세에게 말씀하셨다는 것은 안다. 그런데 이 사람은 어디에서 왔는지, 우리가 알지 못한다” 하고 말하였다.

우리는 모세의 제자인데 그 예수라는 자는 어디서 굴러먹던 사람인지 모른다는 것이지요.

9:30그가 그들에게 대답하였다. “그분이 내 눈을 뜨게 하여 주셨는데도, 여러분은 그분이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니, 참 이상한 일입니다.

거지는 바리새인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졌습니다. 이 사람들이 어떤 사람인지 다 알아 버렸습니다.

:31하나님께서는 죄인들의 말은 들어 주시지 않으시지만, 하나님을 공경하고, 그의 뜻을 따라 사는 사람의 말은 들어 주시는 줄을, 우리는 압니다.

:33그분이 하나님께로부터 오신 분이 아니라면, 아무 일도 하지 못하셨을 것입니다.”

바리새인은 점점 눈이 멀어가는데 장님은 점점 눈이 뜨여갑니다. 처음에는 예수같은 사람이라고 했다가, 예언자 같다고 했다가, 지금은 하나님이 보낸 사람이라고 고백합니다.

:34그들이 그에게 말하였다. “네가 완전히 죄 가운데서 태어났는데도, 우리를 가르치려고 하느냐?” 그리고 그들은, 그를 바깥으로 내쫓았다.

예수도 죄인이고 너도 죄인이라고 하면서 폭력을 써서 좇아냅니다. 마치 도자기가 가득 차 있는 어두운 창고에 들어가 더듬거리다가 도자기 하나가 깨어지니 평정을 잃고 도자기를 다 깨는 모습이 상상 됩니다. 장님이 되어 버렸습니다. 반면 거지 소경은 궁극적으로 눈이 뜨여지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그를 다시 만나십니다.

:35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 사람을 내쫓았다는 말을 예수께서 들으시고, 그를 만나서 “네가 인자를 믿느냐?” 하고 물으셨다.

즉, “네가 그리스도를 믿느냐”는 질문입니다.

:38 그는 “주님, 내가 믿습니다” 하고 말하고서, 예수께 엎드려서 경배하였다.

구약에 엎드려 경배하다는 말이 나올 때면 언제나 대상이 하나님입니다. 점점 눈이 뜨여져서 그 앞에 엎드려 꿇어 경배하며, “당신은 하나님입니다”라고 고백합니다. 눈이 활짝 열린 축복을 받았습니다. 장님에서 이야기가 시작되었는데 장님은 점점 눈이 뜨여지고 바리새인은 눈이 머는 것으로 이야기가 끝납니다.

:39 예수께서 또 말씀하셨다. “나는 이 세상을 심판하러 왔다. 못 보는 사람은 보게 하고, 보는 사람은 못 보게 하려는 것이다.”

예수님은 구원하러 오셨지만 예수님의 빛에 비침을 받으면 죄인과 의인이 저절로 갈라집니다. 장님과 장님 아닌 사람이 저절로 갈라집니다.

캄캄하면 얼굴에 더러운 것 묻은 사람 모릅니다. 그러나 불이 들어오면 깨끗한 얼굴 드러나고 더러운 얼굴 드러납니다. 빛이 어떤 사람을 더럽게 한 것 아닙니다. 그러나 빛이 비치므로 저절로 가릅니다.

예수님이 이런 효과를 가져 오십니다.

장님과 장님 아닌 사람이 갈리고, 의인과 악인이 갈리고, 믿음 있는 사람과 믿음 없는 사람이 저절로 갈라집니다.

예수님이 계신 곳에는 눈을 못보는 사람은 점점 눈이 멀어지는 가속이 일어납니다. 눈을 뜨는 사람은 점점 눈이 밝아지는 가속이 일어납니다.

예수님 계신 곳에는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는 중립이 없습니다.

점점 더 보게 되든지 점점 더 못 보게 되든지, 점점 믿음이 자라든지 점점 더 믿음이 없어지든지, 점점 더 의로운 사람이 되든지 악한 사람이 되든지!

예수님은 점점 더 가속하는 분입니다.

마13:12 가진 사람은 더 받아서 차고 남을 것이며, 가지지 못한 사람은 가진 것마저 빼앗길 것이다.

가속의 효과입니다. 부익부 빈익빈입니다. 예수님을 만나면 중립이 없습니다.

나는 믿음에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는 것 같다? 아닙니다. 진보하든지 퇴보하든지 둘 중 하나입니다. 심판하시는 효과 가속하시는 효과가 나타납니다.

지성인들이 모이는 교회가 있습니다. 컨트리클럽 가듯이, 이민생활 하면 다 교회 나오니까 다 신자고 교인이고 편하게 교회 나갑니다. 그런데 그런 교회에 복음이 들어가기 시작하면, 가속의 효과가 나타나기 시작합니다. 점점 더 믿음이 커지고 생활이 변하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그룹이 생기는가 하면 믿는 사람인 줄 알았는데 점점 더 안믿는 사람같은 이야기를 하고 점점 더 마음이 강팍해지고 점점 더 포악해지는 이런 가속의 효과가 반드시 있게 마련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 때문입니다.  예수님이 그러고 싶어서가 아니라 예수님 앞에서 중립이 될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되느냐?

:41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문제는 뭐냐? 본다고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 하다가 멈춥니다. 알게 모르게 ‘이제 본다’ 그러면서 하강이 시작됩니다. 내가 본다고 생각하니 예배도 소홀해지고 성경공부도 참석 안합니다. 다 같은 소리 하는 것 같습니다. 눈이 멀어가는 중입니다. 그러면 작은 것이 눈에 보이기 시작합니다. 평가하게 되고 비난하게 됩니다. 그냥 두면 지금 눈이 멀어가는 바리새인처럼 걷잡을 수 없게 됩니다.

어떻게 벗어나야 할까요?

:41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눈이 먼 사람들이라면, 도리어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지금 본다고 말하니, 너희의 죄가 그대로 남아 있다.”

내가 눈이 멀었다는 것을 인정하는 겁니다. 그리고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면 죄를 씻어 주십니다.

요일1:8-9 우리가 죄가 없다고 말하면, 우리는 스스로를 속이는 것이요, 진리가 우리 안에 없는 것입니다.

우리가 우리의 죄를 자백하면, 하나님은 미더우시고 의로우셔서,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시고,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하게 해주실 것입니다.

회복은 어디서 시작되는가?

내가 자꾸만 남의 결점이나 약점이 눈에 띄는 것은 내가 무엇을 이루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장님이라 그렇습니다. 볼 것을 못보기 때문입니다. 큰 것을 못 보아서 그렇습니다. 주님의 섭리의 손을 보지 못해서 그런 것입니다. 나는 장님이다 고백하면 하나님이 건져 주십니다.

이런 시험속에 있으면 나에게 시험 주는 대상을 탓하지 마십시오. 나에게 문제가 있습니다.

‘나는 보지 못합니다’ 고백하시고 방향을 바꾸시기 바랍니다.

둘 중에 하나입니다.

올라가는 싸이클에 있느냐 내려가는 싸이클에 있느냐! 중간은 없습니다.

내려가는 싸이클에 있다면 딱 고백하고 방향을 바꾸십시오

내가 주님이 역사하는 손길을 보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기독교 탓을 하고 교회 탓을 하고 지도자 탓을 하고 남 탓을 했습니다.

그런 고백이 있으면 싸이클이 바뀐다.

올라가는 싸이클로 전환됩니다.

눈 먼 소경이 예수라는 사람- 예언자-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눈이 뜨여진 것처럼, 우리 가운데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섭리하심, 임재하심, 하나님의 약속이 어떻게 이루어지는가 볼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믿음에 중립은 없습니다.

하강하든지, 상승하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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