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된 경건(야고보서 1 : 19 – 27)
밴쿠버 초대교회 정영민 목사
성도란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을 일컫는 말입니다. 기독교인, 크리스천으로 불립니다. 세상에 수많은 성도가 있는데, 코비드 펜데믹으로 인해 신앙이 송두리째 흔들리는 것을 보게 됩니다.
얼마 전에 하부르타 코칭 세미나에 참석한 적이 있었습니다. 온라인으로 진행하는 세미나였고, 주로 목회자, 선교사님이 참석하였습니다. 그중에 딱 1명만 집사님이었습니다. 그룹 토의와 나눔을 할 때, 집사님과 한 조가 되어 나눔을 하였습니다.
이 집사님은 신앙의 열정이 있는 분이었습니다. 개척교회에서 10년을 신앙생활을 하고 그 이후에 대형교회로 옮겨서 3년 동안 행복하게 신앙 생활했다고 합니다. 교회에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많은 것을 배우고 나누고 했습니다. 성경공부도 하고 봉사 그리고 선교 등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해서 바쁘게 지내며 만족했다고 합니다.
그러다가 코비드 펜데믹이 와서 온라인 예배로 전환이 되었습니다. 그동안 교회에서 셀 그룹으로 예배드리는 10가정이 있었는데, 1년이 지나니까 3-4가정은 교회를 떠났고, 나머지 가정은 신앙이 흔들리고 온전히 예배드리는 가정은 3가정만 남았다는 충격적인 이야기였습니다. 집사님도 참으로 힘든 과정을 지나고 있다고 합니다. 교회에서 온라인으로 하는 프로그램에 참여해도 자신의 신앙을 지키기가 어려웠다고 말합니다.
이 이야기가 마음에 와닿았습니다. 아마도 대부분의 성도님도 공감하실 이야기라 생각이 듭니다. 이미 온라인 예배로 1년이 지났습니다. 오랫동안 온라인으로 예배를 드리다 보니, 신앙인으로서의 정체성의 위기가 왔으며, 펜데믹 상황에서 어떻게 신앙생활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있을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야고보서 말씀을 통해 참된 경건에 대해서 말씀을 나누고자 합니다.
그동안 한국교회는 수많은 성경공부, 수많은 제자훈련, 수많은 예배가 있었습니다. 외적인 성장은 가져왔다고 자부는 하지만 내면적인 성장, 즉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의 성장은 부족함을 느낍니다.
화려한 조명과 음향을 동원한 예배, 유명한 설교자의 설교, 간증 집회, 잘 짜인 콘서트와 같은 찬양 예배 등 프로그램에 익숙하게 되었습니다.
보기에 익숙하고 화려한 예배나 집회에 참여하고, 또 그런 교회 멤버가 되면 신앙생활을 잘하고 있다고 스스로 만족했던 것 같습니다. 그러나 펜데믹을 통해 참 신앙인의 삶이 무엇인지를 구별되고 있습니다.
나 자신에게 질문을 해 봅니다.
나는 혼자서도 예배할 수 있는가?
나는 혼자서도 찬양할 수 있는가?
나는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며 있는가?
나는 하나님의 사랑을 실천하고 있는가?
오늘 야고보서 말씀은 참된 경건에 대해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예수님의 형제입니다.
예수님의 생전에는 예수님을 믿지 않았지만, 나중에는 예루살렘 교회의 지도자가 되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유대인으로서, 지혜문학을 사용하여 야고보서를 기록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야고보가 율법을 위반했다는 이유로 대제사장 아나노스에 의해 사형을 선고받고 예루살렘에서 순교했다고 합니다. AD 62년입니다. 그런데도 약 30년간 예루살렘 교회에서 목회하며,
성도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몸소 겪은 이야기를 지혜문학을 통해 기록했습니다.
참된 경건은 권위는 있되 권위 의식은 없어야 합니다.
19절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19절에,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렇게 호칭을 합니다. 이 호칭을 한 번만 한 것이 아니라, 사도바울을 향해서도 형제라고 호칭합니다.
초대교회 당시 교회 지도자이건, 성도이건 서로를 향해 형제라고 부르는 것이 일반적이었습니다.
성도들을 향해 ‘내 사랑하는 형제들’ 얼마나 가족애를 느낄 수 있습니까?
그런데 오늘날 교회 안에 이미 권위주의적 계급 같은 것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 직분은 하나님의 일을 감당하고 성도를 돕는데 그 역할이 있습니다. 그러나 교회에서 이미 직분은 1등 신자와 2등 신자로 나누어지게 됩니다. 교회구성원들이 서로를 향해 ‘내 사랑하는 형제님, 자매님’이라고 부르며 신앙생활을 하면 얼마나 좋을까? 이런 생각을 해 봅니다. 그런데 야고보 사도는 권위주의적인 색채를 띠지 않고 디아스포라 성도들을 향해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이렇게 부릅니다.
그렇다고 해서 야고보 사도가 권위가 없는 것이 아니라 대단한 권위를 지닌 사도였습니다.
사도행전에 보면, 이방인의 구원과 할례 문제로 인해 갈등이 있었을 때, 이것을 매듭 시킨 장본인이 야고보입니다.
예수님의 제자인 사도들과 장로들, 그리고 사도바울도 다른 이의를 제기하지 못할 만큼, 야고보의 말에는 권위가 있었습니다. 사도바울도 이러한 야고보를 가리켜 ‘기둥같이 여기는 야고보’ 갈 2 : 9절에 말씀하고 있습니다.
야고보 사도는 권위 의식을 가진 사도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 의해 권위를 인정받은 사도였습니다.
그러면 야고보의 권위는 무엇으로 인정을 받았습니까? 여기서 참된 경건이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역사가 요세푸스에 의하면 야고보는 기도의 사람이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야고보 사도를 가리켜 ‘낙타 무릎’이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그 이유는 기도하느라 굳어져 버린 그의 무릎을 보며 그렇게 불렀다고 합니다. 또 다른 기록에 의하여 ‘의인 야고보’였다고 합니다.
그의 권위가 단지 예수님의 형제였기 때문이 아니라, 평소에 무릎을 꿇고 하나님께 기도하는 기도의 사도였습니다. 그리고 야고보 사도는 참된 경건의 삶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의 신앙의 권위는 살아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많은 목회자, 선교사, 교회 리더십들이 있는데, 야고보 사도와 같은 참된 경건으로 살아 있는 권위가 세워지기를 원합니다.
2. 참된 경건은 언어생활부터 바르게 시작해야 합니다,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참된 경건은 말씀을 듣는 자세부터 바르게 시작해야 합니다.
‘듣기는 속히 하고’ 귀가 얇아서 이 소리, 저 소리를 쉽게 들으라는 것이 아니라 들으려는 자세로, 경청의 자세로 들으라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더디 듣고(경청의 자세가 아니라, 대충 듣고), 속히 말하기를 좋아합니다. 어떤 사람들은 아예 남의 말을 듣지 않고 자기 말만 합니다.
커뮤니케이션의 이론에서, 가장 효과적인 설득을 위해서는 3:1의 원칙을 지키라고 말합니다. 곧 세 번 듣고 한번 말할 때 가장 효과적인 대화와 설득이 이루어진다고 말합니다. 마찬가지로 기도할 때의 원칙이 있습니다.
기도는 하나님과의 대화이기 때문에, 일방적으로 우리의 요구만 늘어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듣지 않으면 대화라고 할 수 없습니다. 일방적인 통보입니다.
‘하나님! 이 문제 해결해 주실 줄 믿습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 알지도 못하면서 무조건 내뱉는 말은 자기 확신이나 주문 같은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어떤 말씀을 하시는지 들으려고 하지 않는다면 기도했다고 말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경건한 사람은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려고 경청합니다.
‘하나님! 말씀해 주십시오.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어떤 말씀을 하시든지 경청하겠습니다. 말씀해 주세요.’라고 기도한 후 들으려고 한다면 하나님께서 말씀해 주십니다.
3. 참된 경건은 분노가 아니라 온유와 인내로 이루어집니다.
19. 내 사랑하는 형제들아 너희가 알지니 사람마다 듣기는 속히 하고 말하기는 더디 하며 성내기도 더디 하라
20. 사람이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참된 경건은 언어생활부터 변화됩니다. 그리고 경건한 사람은 성내지 않습니다.
‘성내기를 더디하라, 성내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지 못함이라’
야고보 사도가 30년 목회하면서 참 많은 것을 경험했을 것입니다. 그중에서 인간의 혈기에 의해서 급하게 화를 내거나, 경솔하게 깊이 생각하지도 않고 화를 내는 것을 보았을 것입니다. 그래서 야고보 사도는 이러한 분노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으니, 절제해야만 한다고 가르칩니다.
성령의 9가지 열매 중 마지막 열매는 ‘절제(self control)’입니다. 이제 한 걸음 더 나아가, 온유와 인내를 요구합니다. 화가 나는 것을 더디 하면서 온유와 인내로 그 상황을 이겨내야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루게 된다는 것입니다.
야고보 사도의 30년 목회에서 나온 지혜입니다.
화가 난다고 무조건 화를 내거나 자신의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고 화를 내면, 하나님의 뜻과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4. 참된 경건을 이루려면 먼저 영혼의 청소가 있어야 합니다.
21절 그러므로 모든 더러운 것과 넘치는 악을 내버리고 너희 영혼을 능히 구원할 바 마음에 심어진 말씀을 온유함으로 받으라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반드시 2가지가 있어야 합니다. 첫째는 버리는 것과 둘째는 채우는 것입니다.
한가지 만으로는 하나님의 의를 이룰 수 없습니다. 두 가지가 다 충족되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는, 참된 경건한 자녀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마음 가운데 있는 더러운 것들과 죄를 다 쏟아버려야 합니다.
어떻게 쏟아 버립니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못 박혀 죽여야 합니다.
주님! 나의 욕심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주님! 나의 더러운 마음, 더러운 생각, 더러운 행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주님! 나의 게으름을 십자가에 못 박아 죽입니다.
이렇게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서 완전히 못 박아 죽이게 되면 하나님으로 채울 수 있습니다.
예를 들어, 목욕탕에 들어가려면 물이 깨끗해야 합니다. 그런데 목욕탕 물이 더럽습니다. 더러운 물에다 아무리 깨끗한 물을 채워 넣어도 깨끗해지지 않습니다. 목욕탕 물이 깨끗해지려면 먼저 더러운 물을 빼야 합니다. 그러고 나서 깨끗한 물로 채워야 합니다.
마찬가지로, 하나님의 뜻과 의를 채우려면, 내 영혼의 더러운 마음, 듣기도 전에 먼저 말하는 경솔함, 그리고 화를 내는 분노, 육신의 정욕, 탐심, 욕망 등 하나님의 의를 가로막는 모든 것들을 빼 버려야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이 이 모든 것들을 빼 낼 수 있습니다. 십자가에서 죽지 않고는 이 더러운 것들이 내 속에 죽지 않고 살아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 십자가에서 더러운 생각, 더러운 마음이 죽게 되면, 이제는 복음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말씀으로 내 마음을 채워야 합니다. 나의 내면을 하나님의 사랑으로 채워야 합니다. 하나님의 의로 성도 개개인이 채워지면 이 사회도 변화가 되게 됩니다. 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로 채워질 때, 우리 사회 구성원이 변화되고, 사회 시스템도 변화가 됩니다.
친구 목사님 부모님이 과테말라에서 오랫동안 선교사로 사역하면서 학교에서 성경을 가르쳤다고 합니다.
과테말라는 경찰 수보다 조직, 갱 숫자가 더 많다고 합니다. 어린아이들도 갱이 되는 것이 꿈이라고 할 정도로, 도시 자체가 위험하다고 합니다. 선교사님도 갱이 더 많은 도시에서 사역했습니다. 사람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학교 사역을 해도 물건을 다 훔쳐 간다고 합니다. 심지어 학교 변기 뚜껑도 훔쳐 가고, 선교사님 가정에 들어와서도 물건을 훔쳐 갔다고 합니다.
‘이들이 어떻게 하면 변할까?’
기도 중에 성경 교육해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시작했다고 합니다. 학교 수업시간에 성경을 가르쳤습니다.
신기하게도 갱들이 더 많은 도시에서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학교에서는 사건 사고가 줄게 됩니다. 그러자 다른 도시 교육청에서 문의가 들어왔다고 합니다.
‘왜 선교사님이 운영하는 학교에서는 아이들의 사건, 사고가 별로 없습니까?’ 선교사님께서 성경을 가르치면 사건, 사고가 준다고 알려주자 그때부터 과테말라 교육부에서 공교육에 성경 윤리 시간을 만들어서 아이들을 가르치기 시작했다고 합니다. 매년 몇 번씩 일반 학교의 선생님을 모아서 성경 교육을 한다고 합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의 변화가 사회를 변화시킵니다.
5. 참된 경건은 진리를 행할 때, 진리를 더 깊게 이해할 수 있습니다.
23. 누구든지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아니하면 그는 거울로 자기의 생긴 얼굴을 보는 사람과 같아서
24. 제 자신을 보고 가서 그 모습이 어떠했는지를 곧 잊어버리거니와
우리는 거울을 보고 금방 자기의 모습을 잊어버립니다. 그래서 또 거울을 봅니다. 마찬가지로 말씀을 듣고 행하지 않는 자는 똑같습니다. 계속 거울을 보고 자기의 모습을 잊어버립니다. 행함이 없는 성경 지식, 행함이 없는 성경공부, 행함이 없는 듣는 말씀은 거울을 보고 자기의 모습을 잊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예배를 드렸습니까? 우리는 그동안 얼마나 많은 말씀을 들었습니까?
엄청나게 많은 예배를 드리고 주일 예배를 통해 하나님 말씀을 들었지만, 변화가 일어나지 않습니다.
예배를 드리며 말씀을 들을 때는 ‘아멘’, ‘감사합니다’ 이렇게 응답하지만, 세상에 나가면 완전히 말씀을 다 잊어버립니다. 이것은 마치 거울을 보니까, 머리가 헝클어지고, 옷에 김치가 묻은 것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거울에서 돌아서자마자 다 잊어버렸습니다. 잊어버리니까 머리가 헝클어진 그대로, 옷에 김치가 묻은 그대로 있는 것입니다.
1년 동안 그대로 있고, 10년 동안 그대로 있습니다.
그러면서 자신은 만족하며 살아갑니다. 그래도 주일 예배를 드렸기 때문에 다 잘 될 것이라고 착각합니다.
영적으로 잘 성장했을 것이라고 스스로 안도합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이런 모습을 원하시겠습니까? 아닙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모습에서 벗어나서 하나님의 말씀 은혜를 누리며, 말씀의 능력을 체험하며 살아 숨 쉬는 신앙생활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한 마디로, 말씀에 깨우침이 있고 성령님의 인도하시는 역사가 있으면 바로 순종해야 합니다.
말씀을 들을 때 기회가 생각이 난다면 순종해야 합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아! 내가 이렇게 해야겠다는 말씀이 떠오르면 적용하고 실천해야 합니다.
기타실력이 늘어나고 잘 치려면 연습해야 합니다. 눈으로 보고 깨닫는다고 해서 기타실력이 느는 것은 아닙니다. 아무리 눈으로 보고 감동하고 감격해도 기타를 잘 칠 수 없습니다. 연습해야 합니다. 행동해야 기타를 잘 칠 수 있습니다.
성도는 오늘도 예배를 드립니다. 찬양으로 영광 돌립니다. 말씀을 듣습니다.
우리가 하나님께 마음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예배를 드릴 때 하나님께서 예배를 통해서 주시는 말씀이 있습니다.
예배를 드릴 때 가장 먼저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말씀해 주십시오. 주의 종이 듣겠습니다’ 이런 자세로 나아가면 성령님께서 깨닫게 하십니다.
지금, 이 순간에도 알려 주십니다. 그러면 연습해야 합니다. 부지런히 실천해야 합니다.
참된 경건이 무엇입니까?
하나님의 말씀을 부지런히 듣고, 부지런히 행하고, 부지런히 실천함으로써 하나님의 능력을 체험하는 것이 참된 경건입니다. 오늘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 앞에서 날마다 참된 경건이 살아 숨 쉬며 하나님의 사랑의 깊이와 힘을 진정으로 깨닫는 성도님들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해 올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