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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하나님의 권능과 뜻(사도행전 4:23~31)_밴쿠버순복음교회 배정호 목사

하나님의 권능과 뜻 / 사도행전 4:23~31

밴쿠버순복음교회 배정호 목사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요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31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세상이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실망을 안겨주고 주님의 품을 떠나게 하려고 유도합니다. 하지만 그 유혹을 참고 견디는 성도의 신앙은 모진 고난 앞에서 더 견고해집니다. 

  일본은 세계 제2차 대전의 추축국이었습니다. 중국과 동남아시아의 광대한 영토를 식민지화하며 수많은 전쟁범죄를 저지르고 다녔습니다. 일본 제국주의의 절정기에는 동남아시아에 20개가 넘는 국가에 식민지화를 이루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나라를 점령하면서 문화도 말살하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들이 시행한 것은 ‘일제 동화정책’이었습니다. 조선에서는 신사참배를 의무화하고 강제 징집을 했으며 일본어를 국어로 상용했고 이름까지 바꾸는 ‘창 씨 개명’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그런 노력이 남아 있는 나라는 하나도 없습니다. 땅을 점령했었을지는 모르지만, 언어를 빼앗지 못했고 민족정신을 빼앗지는 못했던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유대인들도 이런 노력을 했습니다. 기독교를 초기에 싹부터 잘라내고 싶어 했습니다. 그래서 산헤드린 공의회라고 하는 최고 권위를 가진 기관을 통해서 사도들의 입을 막으려고 시도했었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뜻대로 된 것은 하나도 없었습니다. 베드로와 요한의 입을 막을수도 없었고 가두어 둘 수도 없었습니다. 결국 석방하기에 이릅니다. 그런데 그 이후에 일어난 일이 참 놀라운 일이었습니다. 아마도 산헤드린은 막연한 기대를 하고 있었을지 모릅니다. 그래도 옥에 가두어서 겁을 주었으니 나가서 좀 잠잠히 있으려니 하는 기대였습니다. 그런데 그들의 기대는 어긋났습니다. 

  23절과 24절 상 반절을 보겠습니다. “23 사도들이 놓이매 그 동료에게 가서 제사장들과 장로들의 말을 다 알리니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동료들과 사람들에게 가서 자신들이 겪은 일을 다 말을 했고 그 결과 그들의 마음이 하나가 되어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함께 찬양하는 일이 벌어지게 되었습니다. 그들이 찬양한 내용이 무엇인지를 살펴 보겠습니다. 

  먼저 하나님을 더 알게 되었다는 내용을 24절과 28절 사이에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구체적으로 하나님은 창조의 하나님으로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유를 지으신 분이심을 확인하고 있습니다. 24절 하 반절을 보겠습니다. “24 그들이 듣고 한마음으로 하나님께 소리를 높여 이르되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물을 지은 이시오”

  사도들을 박해하고 나서 오히려 그들의 신앙이 견고해지는 모습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가 박해 했다고 없어지면 오늘날 우리에게 복음이 전해지고 이 감격스러운 예배의 현장이 우리에게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는 핍박을 받을 때마다 더 성장했습니다. 견고해졌습니다. 이게 아주 중요한 사실입니다. 처음에는 유대교의 핍박을 받았습니다. 나중에는 로마로부터 국가적인 핍박을 받았습니다. 중세에는 이교화된 가톨릭에게 핍박을 받았습니다. 아마 기독교의 순교자수는 어떤 전쟁의 피해자 숫자보다 더 많을 것입니다. 그런데 기독교의 복음전파는 멈춘 적이 없습니다. 가장 핍박을 많이 받을 때 카타콤에 들어가서 가장 순수한 신앙을 발굴해내게 되었고 오늘날에도 개혁주의 신앙으로 남아 있습니다. 가톨릭에게 핍박을 받던 청교도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배를 타고 신세계를 찾아 도피했는데 그곳이 미국 아닙니까? 이건 놀라운 사실입니다. 사단의 하수인들은 아무리 교회를 무너뜨리려고 해도 그 시도가 매번 허사로 돌아가고 만 것입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를 그리스도의 영원한 생명과 부활의 권능을 지니고 있기에 그 어떤 핍박을 받아도 건재하고 부활하고 번영하는 것입니다. 

  사도들은 이 사실을 더 확신하게 되었기에 선언하듯이 ‘대주재여 천지와 바다와 그 가운데 만들을 지은 이시오’라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 장엄한 선언이 여러분의 신앙 가운데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의 향한 믿음의 선언은 25절과 26절에 가면서 점점 더 구체적인 되어가고 있습니다.

  25절과 26절에 계시의 하나님이시고 다윗의 입을 의탁하사 성령으로 말씀하셨고, 온 세상이 그리스도를 반대할 것을 말씀하셨다는 내용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25 또 주의 종 우리 조상 다윗의 입을 통하여 성령으로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열방이 분노하며 족속들이 허사를 경영하였는고 26 세상의 군왕들이 나서며 관리들이 함께 모여 주와 그의 그리스도를 대적하도다 하신 이로소이다” 

  여기서 25절의 분노하다라고 하는 헬라어 원어는 ‘에프뤼악산’입니다. 우리나라 말로 하면 불같이 성질을 부린다는 표현이 어울릴 거 같습니다. 말이 화가 나면 푸르륵 거리면서 화를 내는 모습을 상상하시면 되겠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화가 난 말이 아무리 날뛰어도 주인이 잡은 고삐에 다 통제를 당하지 않습니까? 야생마도 일단 고삐가 걸리면 통제될 수밖에 없습니다. 아무리 기세등등한 사람도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있을까요? 오늘날 하나님의 손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 도대체 무엇이라는 말입니까? 이 세상에는 없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을 대적하는 모든 것이 허사일 것이라고 말씀하는 것입니다. 

  모든 것의 주인이신 하나님께서 승리를 주실 것을 27절과 28절에서 확신합니다. 

“27 과연 헤롯과 본디오 빌라도는 이방인과 이스라엘 백성과 합세하여 하나님께서 기름 부으신 거룩한 종 예수를 거슬러

28 하나님의 권능과 뜻대로 이루려고 예정하신 그것을 행하려고 이 성에 모였나이다”

  이 내용은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승리를 기억하고 고백한 내용입니다. 성도들은 유대교의 핍박이 시작되자 전날 그리스도께서 그들에게 어떻게 고난을 겪으셨으며 또 그 결과가 어떠했는지를 기억했습니다. 주님께서 헤롯에 의해 조롱당하셨고 본디오 빌라도에게 십자가 처형을 당하셨으며,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얼마나 많은 수모와 배신을 당하셨나요. 그러나 그 모든 일이 다 예정된 사항이었다는 것입니다. 

  그 당시에는 얼마나 이상했을까요? 세상에 메시야가 저렇게 맥없이 당하는 게 맞나? 그런 의심과 도무지 이해되지 않는 의구심들이 마음에 가득했을 것입니다. 자 그런데 돌아보니 어떤 일이 벌어졌습니까? 예수님께서 부활하신 거에요. 그런데 이런 모든 것이 자신들이 구원의 길을 마련하시려는 계획안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제는 어떤 생각을 하게 될까요? 이제 이렇게 핍박을 받는 것도 뒤에 더 큰 일이 성취되기 위한 전주곡에 불과 하구나 예수님께서 그렇게 맥없이 당하시는 것 같더니 보란 듯이 무덤에서 일어나시고 죽음을 정복하시고 약속하신 성령을 보내 주셨는데 오늘 사도들이 겪는 고난도 이제 앞에 다가올 엄청난 하나님의 사역이 예비 되어 있구나라고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게 바로 간증이고 역사이고 믿음입니다. 다른 사람 이야기를 들을 필요가 뭐가 있나요? 예수님의 이야기를 보면 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여러분 스스로에 관한 이야기로 적용하면서 풀어가면 됩니다. 여러분 어떠세요. 고난이 올 때마다 가슴 졸이기만 하세요? 아니면 그 고난 속에서 역사하시고 정복하실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희망을 생각하면서 가슴이 막 뛰세요? 

  고난을 극복하고 나서 맺으신 부활의 첫 열매 되신 예수님을 생각하면서 가장 예수님을 핍박했던 예루살렘 유대인을 하루에 수천 명을 회개시키는 그 놀라운 능력을 바라보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고난도 그 고난만 보지 않고 장차 다가올 열매를 생각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가슴에 그 미래를 생각하면서 희망의 솟구침이 있게 되는 것입니다. 

  히브리서 12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1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 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 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2 믿음의 주요 또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

3 너희가 피곤하여 낙심하지 않기 위하여 죄인들이 이같이 자기에게 거역한 일을 참으신 이를 생각하라” 

  성경적 신앙관을 가지기 위해서는 성경이 기준이 되어야 합니다. 성경은 고난을 신앙 성장의 계기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명확하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사도들은 하나님께 자신들을 돌보아 주신 하나님께 기도하게 되었습니다. 

“29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30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그 기도의 내용은 자세히 구분해서 세 가지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첫째로 저희의 위협함을 하감 하옵시고.

  둘째로 그의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의회의 금지령을 방해받지 않고 그들의 위협을 두려워하지 않고 말씀을 전할 수 있게 하여 주소서.

  셋째로 순을 내밀어 병을 낫게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와 같은 세 가지 내용입니다. 

  29절에 ‘굽어보시옵고’라는 말은 고난을 감해 달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굽어본다는 것은 눈을 떼지 않고 응시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초대 교회 성도들은 유대교로 인해 고난당하는 동안에 그것을 피하게 해달라고 기도하지 않았습니다. 그 고난이 축복으로 가는 보장된 길이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이런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의 기도는 어때야 할까요?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하는 것이 아니라 고난 중에도 담대히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보실 때 이뻐하지 않으시겠습니까? “주여 이제도 그들의 위협함을 굽어보시옵고 또 종들로 하여금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하여 주시오며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여러분 고난 중에 어떤 기도를 드리세요? 이런 기도 드려본 적이 있으세요? 우리는 대부분 고난을 피하게 해 달라고 기도하지 이렇게 기도하지 않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기도하는 사람의 특징이 뭘까요? 그것은 복음으로 가득 차 있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신 의도를 정확히 이해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고난을 주시는 의도가 우리가 피해달라고 하는 기도를 하라고 고난을 주실 것 같으세요? 아니면 고난을 극복하면서 더 견고한 신앙인이 되라고 주실 것 같으세요? 군인이 훈련을 받을 때는 정말 힘들지만, 그 훈련을 통해서 전쟁에 이기는 강인한 사람이 되기를 기대하면서 훈련을 받습니다. 훈련을 피하고 싶어 하면서 도망가라고 호된 훈련을 시키는 것이 아닙니다.

  예수를 믿는 과정에서 오직 평안만을 누리고 세상의 물질과 명예를 누르기를 간구하는 것은 다른 세상 종교인들의 간구와 다를 바 없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다는 것은 주님께서 주시는 고난의 진정한 의미를 이해하는 사람이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 주님께서 여러분의 삶에 주시는 고난의 참된 의미를 이해하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그 고난을 피하는 기도가 아니라 고난을 잘 견디고 극복해서 견고한 신앙을 가질 수 있도록 인도해 주시기를 원하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런 기도자를 찾고 계십니다. 그리고 그들에게 응답해 주십니다. 

  하나님께서 성숙한 사도들의 기도에 응답을 해주셨습니다.    

  31절입니다. “빌기를 다하매 모인 곳이 진동하더니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여기서도 세 가지 현상으로 말씀을 정리해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모인 곳이 진동하였습니다.

  둘째로 무리가 다 다시 한 번 성령이 충만하게 되었습니다. 

  셋째로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게 되었습니다. 

  이 세가지입니다. 사도들을 향한 산헤드린 공의회의 협박은 예수의 이름을 전하지도 말고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협박을 담대하게 벗어났습니다. 그리고 그들 앞에서 담대히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그런데 그 기도의 내용이 참 대단하지 않습니까? 그들이 제일 겁을 먹고 막은 것은 다름 아닌 병이 낫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을 정면으로 대항해서 기도하고 있습니다. 마치 이런 태도입니다. 막으려면 막아봐라! 아무리 막아도 나는 한다. ‘손을 내밀어 병을 낫게 하시옵고 표적과 기사가 거룩한 종 예수의 이름으로 이루어지게 하옵소서 하더라’ 더 많은 병이 낫기를 위해서 기도했습니다. 그리고 응답이 내렸습니다. 실제로 병이 낫고 표적과 기사가 임했습니다. 모인 곳이 진동하고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해졌습니다. 

  이 기도의 응답을 보면서 주목해야 할 것은 더 많은 병자의 치료쪽으로 기도 응답이 마무리 되지 않고 성령의 충만함으로 마무리되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성령의 충만함은 앞으로 다가올 더 큰 사건들을 이기게 해 주시는 주님의 특별한 선물이었습니다. 

  여러분 모두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시고 앞으로 다가오는 큰 어려움을 이길 수 있는 충분한 은혜를 받아 누리시기 바랍니다. 

  결론을 맺습니다. 

  일본은 아시아의 여러 국가를 점령하면 자국이 더 커지고 힘이 있는 제국이 되리라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의 꿈은 반세기도 지속할 수 없었습니다. 그들의 문화도 전파할 수 없었습니다. 오히려 핍박받던 나라들의 주권과 애국심이 고취되었습니다. 이것은 역사의 증언입니다. 

  마찬가지로 유대인은 정치적인 수단으로 폭압적으로 사도들의 자유를 빼앗고 복음을 가로막으려고 했습니다. 그런데 오히려 그들에게는 큰 변화가 있었습니다. 그 변화는 그들의 마음에 창조주 하나님에 대한 주권과 그분에 대한 생각으로 가득 채움을 받는 것이었습니다. 

  이 역사의 역설을 보면서 하나님께서 성취하시는 통쾌한 승리의 장면을 엿보게 됩니다. 하나님께서는 온갖 나쁜 것들을 통해서도 주님의 나라를 이 땅 위에 이루어 나가신다는 것이며 그 발걸음을 결코, 멈추지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이 일의 증인으로서 여러분을 선택하셨습니다. 그 선택에 감사하시면서 더 깊은 신앙의 길로 나가시는 여러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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