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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교단상] 벌써 돌이 굴려져있는데…(마가복음 16:1-8)_노승환 목사(뉴저지찬양교회)

벌써 돌이 굴려져있는데…(마가복음 16:1-8)

노승환 목사(뉴저지찬양교회)

할렐루야! 죽음을 이기시고 부활 승리하신 예수님께서 성도님들의 삶 속에 능력으로, 축복으로, 평강으로 함께 하시기를 바랍니다.

오늘 함께 읽은 본문은 첫 번째 부활주일에 있었던 일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2절을 다시 보시면 “안식 후 첫날 매우 일찍이 해 돋을 때에”라고 되어 있지요?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토요일이니 안식 후 첫날은 주일입니다. 

주일 날 아침 일찍 해가 뜰 때 즈음에 막달라 마리아와 야고보의 어머니 마리아, 그리고 살로메가 예수님의 시신에 바를 향품을 준비해서 예수님의 무덤으로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무덤으로 향하는 이 여인들에게는 큰 걱정이 하나 있었습니다. 마음에 답답함과 짓누르는 듯한 불안과 염려가 있었던 것입니다.

3절입니다.  “서로 말하되 누가 우리를 위하여 무덤 문에서 돌을 굴려 주리요 하더니.”

유대인들의 무덤은 땅을 파고 묻는 식이 아니라 굴을 파고 그 굴 안에 시신을 넣어두고 밖에서 굴 입구를 큰 돌로 막는 식이었습니다. 가끔 사진으로나, 영화로 보신 적이 있으시겠지만, 이 돌문은 대게 그 무게가 1.5에서 2톤이나 됩니다. 

1톤이 2,000파운드입니다. 그러면 보통 약 3,000, 4,000파운드가 나간다는 겁니다. 1,800킬로그램이 넘습니다. 예수님의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면 무덤 안으로 들어가야 할 터인데 여인들 몇명이 3-4,000파운드 나가는 돌문을 옮기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뿐이 아닙니다. 예수님의 제자들이 시체를 훔칠 것이라 염려해서 그 굴을 인봉하고 군사들에게 지키게 했습니다. 인봉까지 한 돌문을 여인들이 무슨 수로 열겠습니까?그래서 서로 ‘누가 우리를 위하여 돌을 굴려 주리요?’ 걱정을 하는 것이지요.

모든 복음서가 같이 증언하는 바이지만 이 장면에서도 우리는 이 여인들이 예수님을 무척이나 사랑하고 존경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사랑하지 않았다면, 그 새벽에 무덤에 찾아가고, 시신에 향품을 바르려 하지 않았을 겁니다.

이 여인들의 예수님을 향한 사랑과 헌신과 열심은 참으로 대단합니다. 충분히 본받을 만합니다. 그것을 탓할 수는 없습니다. 

하지만 모든 제자와 더불어 너무도 분명하게 이 여인들 역시 예수께서 살아생전 그렇게 몇 번씩이나 말씀해주신 부활에 대해서는 믿지 못했거나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음 또한 분명합니다.

마태복음 28장 6절의 경우는 이 여인들에게 무덤 안에 있던 천사가 이렇게까지 말을 합니다. “그가 여기 계시지 않고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 살아나셨느니라. 와서 그가 누우셨던 곳을 보라!“

그가 말씀하시던 대로….살아나셨느니라. 분명 부활에 대해 말씀하신 적이 있으셨던 겁니다.여인들이 주님의 부활에 대해 분명 들은 적이 있었던 겁니다. 

오늘 우리가 봉독한 7절 말씀에도 ”전에 너희에게 말씀하신대로“ 라는 표현이 있지만, 누가복음 24장 6절에서 8절은 아예 꾸짖듯이 천사가 여인들에게 말합니다. “여기 계시지 않고 살아나셨느니라. 갈릴리에 계실 때에 너희에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기억하라…너희가 기억하지 못하고 있다…믿지 못하고 있다…그 말 아니겠습니까? 어떻게 말씀하셨는지를 기억하라 7 이르시기를 인자가 죄인의 손에 넘겨져 십자가에 못 박히고 제삼일 에 다시 살아나야 하리라 하셨느니라. 한 대 8 그들이 예수의 말씀을 기억하고.”

누가복음에 의하며 이렇게 천사의 꾸짖음을 듣고야 겨우 그 말씀을 기억해냅니다. 그렇지요? 그런데 이 여인들에게만 뭐라 그럴 것이 아닙니다. 제자들은 더 심각했습니다.

막 16:11절을 보시지요. 그들은 예수께서 살아나셨다는 것과 마리아에게 보이셨다는 것을 듣고도 뭐라고요? 

믿지 아니하니라.

또 13절입니다. “두 사람이 가서 남은 제자들에게 알리었으되 역시 믿지 아니하니라.”

성경을 살펴보니 제자들과 더불어 이 여인들에게는 부활 신앙이 없었음이 분명합니다. 말씀대로 믿지 않았음이 분명합니다.

사랑합니다. 존경합니다. 눈물 흘리고, 뜨겁게 열정적으로 헌신하고 봉사해도 말씀에 순종하는 신앙이 아닐 수 있음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만약에요, 갈릴리에서 주님 말씀하신 대로 부활을 이들이 기대했다면? 제삼 일에 살아나신다고 하셨으니까, 이제 가서 부활하신 주님을 뵈어야지 하면서 무덤으로 향했다면? 그랬다면, 이 여인들의 마음이 오늘 본문에서 보는 것처럼, 있지도 않을 장애물을 미리 염려하여 답답하고, 막막하고, 걱정으로 가득했을까요? 그렇지 않았을 것입니다.

설렘과 소망과 기대와 기쁨으로 발걸음이 오히려 가벼웠을 것입니다.하나님이 어떻게 역사하실지, 어떤 놀라운 일이 일어날지 흥분이 되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주님 말씀하신 대로 믿고 기대와 소망을 품고 사는 인생과 말씀하신 것 듣고도 믿지 못해 염려와 걱정으로 가득 찬 인생은 참 다르지 않습니까?

말씀하신 것, 기억도 하지 못해 있지도 않을 시신에 향품 바르려면 무덤 문의 돌을 열어야 하는데 하면서 답답한 심정으로 무덤으로 향하는 발걸음과, 말씀하신 대로 부활하셨겠지, 우리 주님 다시 사셨겠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인데 분명 그렇게 되었겠지, 하며 부푼 기대를 품고 무덤으로 향하는 발걸음은 분명 다를 겁니다. 

예수 믿고 교회 다니며 신앙생활 하는 저와 여러분은 어떤 쪽에 속해 있습니까?자신에게 한번 질문해 보세요.

나는 말씀하신 대로 믿으며 신앙 생활하는가? 하나님의 약속과 말씀이 이루어질 것을 항상 기대하며 소망에 차 있는가? 

아니면, 열심히 봉사하고, 바쁘게 헌신하지만 하나님 말씀으로 인한 기쁨과 말씀하신 대로 이루어짐을 체험하는 신앙이 아니기에 늘 염려와 답답함이 마음을 짓누르고 있는가?

성도님들, 오늘 본문의 무덤 앞 돌문은 인간의 힘으로 어찌해 볼 수 없는 장애물의 상징으로도 볼 수 있습니다.큰 돌이 우리가 가는 앞길을 막고 그 앞에서 우리는 때로는 좌절하고, 때로는 절망하고, 때로는 막막함으로 걱정하고 불안에 떨고 그러지 않습니까?

어떤 시험이나, 어려운 수술을 앞두고, 어떤 어려운 결정이라는 큰 돌을 앞에 두고 그 무게에 힘들어합니다. 예전에 한 교회에서 교육부 총괄 목사로 섬겼을 때, 여자 전도사님이 한 분 계셨는데 이분은 대학부를 담당하셨습니다. 그런데 하루는 주일 날 새벽 4시인가? 5시인가 전화가 왔습니다. 제가 책임자니까 저에게 전화하는 겁니다. 그리고는 계속해서 흐느껴 웁니다. 일주일 내내 엎드리고 쥐어 짜냈는데도 설교가 준비가 안 되었다는 겁니다. 토요일 날 밤새 꼬박 주일 날 새벽까지 앉아 있어도 설교 문 한 줄이 쓰이지 않는다는 겁니다. 

너무도 불안하고 그 중압감에 두려워서 이제는 손이 떨리고 계속 눈물만 나와서 도저히 오늘 설교를 못 하겠다는 겁니다. 그런 일이 한 번도 아니고 몇 번 있어 그때마다 제가 급하게 준비해 대타로 설교했는데 이 전도사님은 결국 사역을 그만두었습니다. 그때 전도사님이 하신 표현 중에 기억이 나는 것이, 설교라는 자기가 옮길 수 없는 엄청나게 큰 돌이 자기 앞에 놓여 있는 것 같다고.

뭐, 말씀 전하는 목회자만 이런 중압감이 있겠습니까? 그렇지 않지요. 우리가 어떤 자리, 어떤 모양으로 세상을 살더라도 절대 만만하지는 않습니다. 성도님들께서 세상에서 당하는 어려움에 비하면 사실 설교의 중압감은 아주 큰 문제가 아닐 수도 있습니다. 

가장은 가장으로서 처자식을 먹여 살려야 하는 부담감이 있지요. 이민 와서 빨리 자리 잡고 가장의 역할을 해야 하는 책임감이 있습니다. 또 누구는 경제적으로 어려워지거나, 사업이 힘들거나, 혹은 사랑하는 가족 간의 어떤 관계의 깨어짐이나 아픔이 있습니다. 자녀라는 큰 돌문이 가로막고 장애가 되는 때도 있습니다. 변하지 않는 내 성격, 성품이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가로막는 돌문이 되기도 합니다. 

꼭 심리적인 억압만을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어떤 육체적인 질병…이런 것을 다 포함해서 우리가 살다 보면 내가 도저히 움직일 수 없는 그런 돌문을 마주할 때가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앞에서 본문의 여인들처럼 불안해하고, 염려하고, 걱정합니다. 입에서 나오는 말들이 늘…누가 나를 위해 좀 이거 안 해주나? 돌이 막혀있는데 이걸 어쩌지? 하는 염려의 말들입니다.

예수님 사랑합니다. 교회도 잘 다닌다니까요. 진실한 마음으로 헌금도 드립니다. 교회에서 부탁하는 여러 봉사도 합니다. 하지만 머릿속에는 늘 누가 돌을 옮겨 줄 것인가? 라는 질문으로 가득합니다. 

궁극적으로는 예수님의 부활 능력을 체험하지 못한 상태에서…말씀대로 믿지 못하는 신앙생활을 하기에 그 삶 가운데는 능력이 없습니다. 변화도 없습니다. 늘 예수님을 찾아 헤매지만 결국은 부활하신 예수님을 빈 무덤 안에서 찾고 있는 꼴입니다.

바로 여기에 그리스도인의 무능함이 있습니다.여기에 믿는 이들의 불안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예수님께서 약속하신 풍성한 삶이 없습니다. 약속하신 가나안 땅에서의 젖과 꿀의 흐름이 없는 것입니다. 여전히 광야고, 여전히 황폐함이 지배합니다. 

이게 우리 인간 노력의 한계요, 끝입니다. 성경은 그걸 죽음이라 표현합니다. 죽음이 다른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과의 관계의 깨어짐이 죽음인데 말씀하신 대로 믿지 못하는 신앙은, 말씀의 반석 위에 세워지지 않은 신앙은 죽음의 권세에서 벗어날 능력이 없습니다. 그렇게 죽음은 우리의 왕 노릇,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성도님들, 그런데 말입니다, 성도님들!! 첫 부활주일 새벽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습니다. 4절 말씀을 같이 봉독하겠습니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그 돌이 심히 크더라!”

무덤 앞에 돌이 어떻게 되었다고요? 심히 큰 돌이 벌써 돌이 굴려져 있습니다. 할렐루야! 이게 복음입니다.

이게 기쁜 소식입니다.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죽음으로 표현되는 모든 인간의 한계와 절망의 돌이 벌써 굴려져 있다는 것입니다.

누가 돌을 굴려서 무덤을 열었겠습니까? 이 여인들은 아닙니다. 제자들은 그곳에 가지도 않았습니다. 마태복음에는 주의 천사가 하늘로부터 내려와 돌을 굴려 냈다고 했습니다. 누가복음과 요한복음에는 천사 이야기는 없고 돌이 이미 굴려져 있었다고만 합니다. 마가복음에는 보신 것처럼 누가 우리를 위해 돌을 굴려 줄 것인가 하는 여인들의 염려를 담고 있습니다. 분명한 것은 무엇이냐? 벌써 돌이 굴려져 있음은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인간 노력의 결과가 아니라 먼저 베풀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말씀대로 제대로 믿지 못하는 아둔한 이들이지만 택하신 주의 백성이기에 포기치 않으시고 하나님의 은혜가 선행되는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왜 무덤 앞에 돌이 벌써 굴려져 있었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하셔서 이제 그 무덤을 빠져나오셔야 하니까 그랬을까요? 예수님께서 부활을 딱 하고 나셨는데 ‘아, 이런! 문이 닫혀있네!! 그래서 예수님께서 낑낑대시면서 그 돌문을 옮기셨을까요?

부활하신 몸은 분명 보고 만질 수 있는 육체였습니다. 하지만 부활하신 후에 예수님은 제자들이 문 닫고 모여 있는 곳에 문을 열지 않고 쑥 들어오셨던 적도 있습니다. 부활체가 어떻게 생겼는지 정확히 성경이 말해주지 않으니 답할 수 없지만, 분명한 것은 문이 닫혀 있어도 얼마든지 들락날락하실 수 있으셨습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무덤에서 나오시기 위해서는 아니었습니다. 돌문이 죽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을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래서 찬송가 160장 ‘무덤에 머물러’ 가사 가운데 “헛되이 지키네, 예수 내 구주, 헛되이 봉하네 예수 내 주. 원수를 다 이기고 무덤에서 살아나셨네.”하며 우리가 찬송하지 않습니까? 헛되이 지키고, 헛되이 봉한 것입니다. 

그러면 돌문이 왜 옮겨져 있을까요? 예수께서 무덤에서 나오시기 위해 돌문이 옮겨져야 했을 필요가 없었다면 왜 돌문이 옮겨져 있었던 걸까요? 무덤에서 예수님께서 나오시기 위해서가 아니라 오히려 그 반대로 여인들이 빈 무덤에 들어와 부활을 확인할 수 있도록 돌문이 옮겨진 것입니다. 돌문의 옮겨짐은 말씀대로 믿지 못하고, 그 능력을 체험하며 살지 못하는 이들을 위해 다시 한번 그들을 부활의 자리로 초청하기 위해서 였던 겁니다.

인류 역사상 가장 위대한 주님의 부활 사건도 결국 그 여인들을, 제자들을, 더 나아가서는 저와 여러분을 위해 행하신 일이었던 겁니다. 제 주장이 아니라 성경이 그렇게 주님의 부활 사건을 그리고 있습니다.

눈을 들어본즉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데!! 바로 오늘 이 순간에도 주님께서 우리를 그 빈 무덤으로 초청하십니다. 여인으로 대표되는 ‘우리’의 앞길에도 무거운 돌문이 막혀있습니다. 우리는 우리의 한계에 도달하여 그 앞에서 울고, 불안해하고, 어떻게 할 방법이 없어 마비된 경우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바로 그때 눈을 들어 보시기 바랍니다.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돌이 벌써 굴려져 있을 것입니다.

삶의 여러 가지 문제를 가지고, 내가 도저히 해결해 볼 수 없이 꽉 막혀있는 큰 돌문의 무게를 어깨에 짊어지고 있지만….그래서 때로는 그것이 눈물이 되고, 한숨이 되어 마음을 짓누르고 있지만…… 그래도 여전히 이 여인들처럼 예수님을 사랑해서 무덤으로 향하는 주의 백성들을 주님께서 모른다고 하지 않으실 겁니다.

왜 내가 말한 대로 믿지 못하니? 하고 꾸짖고 계시지만 않으실 겁니다. 따끔하게 혼내실 때는 내시더라도 향품을 들고 무덤으로 향하는 우리의 발걸음을 주님께서 내치시지는 않으실 겁니다. 아니, 오히려 우리를 위해 벌써 돌을 굴려 놓으시고 부활의 신앙으로, 능력의 삶을 살도록 저희를 초청해 주실 것입니다.

그러니 성도님들 그 초청에 응답하시지요. 어떤 돌들입니까? 어떤 인간한계의 돌이 가로막고 있습니까? 죽음의 돌 입니까? 믿지 못하는 불신의 돌 입니까? 정신적 고통의 돌 입니까? 관계의 깨어짐의 돌 입니까?

이제 믿음의 눈을 들어 그 돌이 벌써 굴려져 있음을 바라보시기를 바랍니다. 믿음으로 내 것으로 만드시기를 바랍니다.

아직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특히 부활의 능력을 살지 못하는 가운데 있으시다면 이제 빈 무덤 안을 살펴보시기를 바랍니다.무덤 안으로 들어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확인하세요. 천사가 확인해 주는 음성을 또한 들으시기를 바랍니다.

너희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나사렛 예수를 찾는구나…..아하…그런데 어쩌냐? 그가 살아 나셨고 여기 계시지 아니하니라….보라 그를 두었던 곳이니라. 

그리고는 7절입니다. 가서….빈 무덤을 확인한 사람들은 가는 것입니다.

인간의 연약함과 한계를 체험해 철저히 절망하고 자신에게 더 이상 의지 하지 않는 법을 배운 사람들은 이제 사명을 받습니다.가라… 가서 제자들과 베드로에게 전해라! 가서 전하라! 이 사명입니다.

그리고는 8절에 “여자들이 몹시 놀라 떨며 나와 무덤에서 도망하고 무서워하여 아무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하더라” 해서 이 여인들이 이 명령에도 불순종한 것같이 읽히게 번역이 됐습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원래 이 8절의 문장이 우리 한글 성경에서 읽듯이 이렇게 완성된 SENTENCE, 문장이 아닙니다.헬라어 원문에 8절은 GAR이라는 단어….영어로 FOR 이라는 단어로 그 SENTENCE가 끝이 납니다.

FOR은 접속사이지 않습니까? 영어 문장이 FOR 로 끝나는 적은 없습니다. 예를 들어, I LOVE YOU FOR…하고는 그 후가 이어져야지 문장이 말이 되지요. 그냥 FOR 하고 …, 끝나지는 않는다는 말입니다. 예를 들어 I LOVE YOU FOR YOU ARE MY SON. FOR YOU ARE MY WIFE. 뭔가 FOR 뒤에는 따라 오는 말이 있어야 합니다. FOR은 이렇게 중간을 잇는 말인데 8절에서는 FOR하고 점점점 하고 문장이 끝이 납니다. 그리고 그 뒤가 없습니다. 

여러분, 가지고 계시는 성경 9절부터 20절을 보세요. 괄호 해 놓았지요? 9절 괄호 앞에 제 성경에는 2라고 숫자가 붙어 있고요…그래서 아래 주석을 보시면, “어떤 사본에는 9-20절까지 없음”이라고 적혀있습니다.

그러니까, 8절이 본래 마가가 쓴 복음서의 끝 구절인 겁니다. 그런데 8절이 말씀드린 대로 for … (점점점). 하고 이상하게 끝이 나니까 후대 사람들이 그 나머지를 채워 넣지 않았는가 하는 겁니다. 그런데 요즘 학자들이 주장하기를, 이렇게 이상하게, 여운을 남기고 끝내는 것이 본래 마가의 의도였다는 겁니다.

왜냐? 이 여인들이 벌써 돌이 굴려져 있음을 보고 무덤에 들어가 천사의 하는 말을 듣고는…. 다시 말하면 부활을 목격하고는 몹시 놀라 떨며 나와서 되어지는 일들에 대해서는 이제 독자의 상상에 맡기는 문학적 기법을 사용하였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뒤에 나오는 자세한 설명 때문에 그 CLIMAX가 반감이 되었다는 주장을 학자들이 합니다. 그래서 저도 마가의 방법을 사용해 보렵니다. 자세히 이 말씀을 어떻게 적용할 것인가까지 제가 다 집어 드리는 것이 아니라…그저 벌써 돌이 굴려져 있는 빈 무덤으로 초청해 드립니다. 무덤 안으로 들어와 보시지요. 그리고 놀라시기를 바랍니다. 부활을 목격하시고 말씀대로 부활하셨음을 믿는 부활 신앙을 가지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가라…가서 전하라는 사명을 받으시고는….그 놀라움과 흥분을 간직하신 채로 그 무덤에서 나오시기를 바랍니다.

그리고는…..그 후의 마가복음 뒷부분을 직접 기록하시지요. 마가복음 16장 9절부터는 내가 적어 가는 겁니다. 어떤 기록을 남기시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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