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본것같은성지순례] 벳산 (Tel Bethshean)

벳산 (Tel Bethshean)

해발 113미터에 놓인 벳산은 히브리어로 ‘안전의 집’ 혹은 바벨론의 신 ‘샤안신의 집’이란 뜻이다. 벳산은 요단 골짜기와 하롯 골짜기가 만나는 지점에 위치하고 있으며, 시리아에서 아프리카까지 이어지는 대협곡(Great Rift Valley)에 속해 있어서, 역사상 지진의 영향을 많이 받은 곳에 위치하고 있다. 길보아산지 하부, 하롯샘과 따뜻한 물이 터져나오는 사흐네 샘(the Sahne Spring)은 벳산을 지상의 파라다이스와 같은 정원으로 만들었다. 이곳은 많은 사람들이 지나는 교통의 중심지였으며, 이스라엘 최고의 농경지인 이즈르엘 평야에 접해 있어 대규모의 도시로 성장하기위한 모든 조건을 가졌던 곳이다. 1921년부터 1933년까지 미국 펜실베니아 대학의 발굴을 시작으로 기원전 3,500년전부터 초기 아랍시대까지의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증명되었다. 고고학자들은 벳산 고대 언덕에서 열여덟번에 걸쳐 도시가 세워지고 파괴된 흔적을 발견해 냈다. 기원전 15세기 이집트의 투투모스 3세가 이즈르엘 평야에서 가나안 사람들을 정복한후, 이집트의 군대가 이곳 벳산에 기원전 15세기부터 기원전12세기까지 주둔하고 있었다. 이중성벽과 신전들, 세티 1세와 람세스 2세 기념비의 발견은 이곳이 북부 팔레스타인을 통치했던 이집트인들의 행정 중심지 그리고 군사적 중심지였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이곳은 기원전 12세기 후 블레셋 사람들의 영향권 안에 들어가는데, 고대 벳산 언덕에는 지붕을 지탱하는 두개의 큰 기둥을 연달아 놓은 블레셋 사람들의 건축물 특징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서 보기 드문 블레셋 건축물로, 삼손이 블레셋 사람들에 의해서 두 눈을 뽑힌 채 맷돌을 돌리다가 블레셋 사람들과 같이 죽는 그 모습을 연상할 수 있는 유적인 것이다. 

“집을 버틴 두 가운데 기둥을 하나는 왼손으로, 하나는 오른손으로 껴 의지하고” 가로되 블레셋 사람과 함께 죽기를 원하노라 하고 힘을 다하여 몸을 굽히매 그 집이 곧 무너져 그 안에 있는 모든 방백과 온 백성에게 덮이니 삼손이 죽을 때에 죽인 자가 살았을 때에 죽인 자보다 더욱 많았더라 (삿 16:29-30)

이집트를 떠난 이스라엘 백성들은 40년 광야의 훈련과정을 마치고 요단강을 건너 가나안 땅 정복전쟁에 나섰다. 이곳 벳산은 므낫세 지파에게 주어졌지만 (수 17:11), 가나안 사람들에겐 철병거란 강력한 무기가 있었기에 그 성읍을 차지할 수가 없었다 (수 17:16; 삿 1:27). 이스라엘 백성들은 약속의 땅을 놓고 가나안의 일곱 족속뿐만 아니라 지중해 근방에서 이주해온 블레셋 사람들과도 전쟁을 해야 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사사시대 청동 무기도 변변치 못했던 반면, 그들은 철기로 무장한 사람들이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주변국들처럼 왕을 구했고, 사울은 통일왕국의 초대왕이 되었다. 그가 하나님의 사람이었을 때는 블레셋을 이겼지만, 그가 하나님을 떠났을 때, 실로 비참한 최후를 맞았던 것이다. 

…사울과 그 세 아들이 길보아 산에서 죽은 것을 보고….사울의 머리를 베고  그 갑옷은 아스다롯의 집에 두고 그 시체는 벳산 성벽에 못 박으매 (삼상 31:8-10) 

이 도시는 사울이 죽을 때까지 이스라엘이 아닌 다른 민족들이 통치하고 있었고, 사울과 그 세 아들의 시신은 아스다롯 신전이 있던 벳산 성읍의 성벽에 달리게 되었다. 가나안 사람의 도시 벳산 언덕에 올라가 동서남북을 바라보면 북쪽의 갈릴리, 이즈르엘 평야의 광대한 모습과 요단강 건너 길르앗 산지, 남쪽의 요단계곡이 한눈에 보인다. 블레셋 사람들이 사울을 벳산 성벽에 매단 이유는 그들에게 덤비는 자는 이렇게 비참한 결과가 된다는 것을 모든 사람들에게 알리기 위한 것이었다. 인근을 지나치는 상인들과 주민들은 성벽에 달린 사울을 보고 알았고, 그 중에 트랜스 요르단의 길르앗 산지에 살던, 길르앗 야베스 사람들이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벳산 성벽에서 내려 그들의 땅에 장사 지냈다. 

길르앗 야베스 거민들이 블레셋 사람들의 사울에게 행한 일을 듣고 모든 장사가 일어나 밤새도록 가서 사울과 그 아들들의 시체를 벧산 성벽에서 취하여 가지고 야베스에 돌아와서 거기서 불사르고 그 뼈를 가져다가 야베스 에셀 나무 아래 장사하고 칠일을 금식하였더라 (삼상 31:11-13) 

사울의 시신은 훼손된 채로 불살라서 에셀나무 아래 장사되었다. 사울이 기브아에서 통치할 때, 에셀나무 아래에서 단창을 들고 있었던 것과 같이(삼상 22:6), 그는 죽어서도 에셀나무 아래 묻혔다.  에셀나무는 이스라엘에서 가장 따뜻한 요단계곡이나 사해 인근, 해안평야, 남방 브엘세바 등지에 사는 나무다. 에셀나무는 해발 840미터의 기브아나 길르앗 산지에 사는 나무는 아닌 것이다.  어울리지 않는 지역에 심겨진 에셀나무 아래에 있었던 사울은  애초에 왕이 되어서는 안되었는지도 모른다.  하나님의 기름부으심이 사위였던 다윗에게 이미 옮겨 갔음에도 그것을 인정하지 않았던 사울은 길보아산에서 비참한 최후를 맞았고, 그의 시신은 벳산에 걸렸던 것이다. 

벳산 국립공원에 들어서면, 좌측의 대중목욕탕과 우측의 야외극장이 2천년전에 화려했던 벳산의 영화로움을 지금도 말해주고 있다. 정면의 높이 솟은 구약성경의 장소, 벳산 언덕에는 한때 하나님의 사람이었지만 하나님을 떠났던 사울의 시신이 걸렸다. 그렇기에 그곳은 더욱 더 슬픈 곳이고 그 슬픔을 다윗은 이렇게 노래했던 것이다. 

길보아산들아 너희 위에 우로가 내리지 아니하며 제물 낼 밭도 없을찌어다 거기서 두 용사의 방패가 버린바 됨이라 곧 사울의 방패가 기름 부음을 받지 않음 같이 됨이로다 (삼하 2:21) 

글,사진_이호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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