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본것같은성지순례] 벳새다 (Bethsaida)

벳새다 (Bethsaida)

“어부의 집”이란 뜻의 벳새다는 신약성경에서 갈릴리 호수가 주변 가버나움, 고라신과 가까운 위치에 있던 도시로 기록되어 있다. 이곳은 갈릴리 바다 해변가로부터 1.5 km북쪽에 위치해 있는 고대 도시로, 물수로(Aquaduct)와 로마 시대의 도로에 의해 북쪽의 큰 도시들과 연결되어 있다. 1830년 미국 성경학자 에드워드 로빈슨에 의해 엣텔은 신약성경의 벳새다로 주목받기 시작했고, 1987년 미국 네브라스카(Nebraska) 대학의 라미 아라브(Rami Arav)팀에 의해서 발굴이 시작되어 지금까지 이르고 있다.

20에이커 넓이의 마을인 벳새다는 상부 요단강의 동쪽에 위치해 있으며, 헐몬산에서 흘러내린 눈녹은 물은 골란고원의 현무암 토양을 운반해 갈릴리 호수 북쪽에 삼각지대가 형성되었는데, 그 삼각주에 위치한 곳이 벳새다다. 지형학적으로 과거에 이 삼각주는 갈릴리 바다의 한 부분이었다고 지질학자들은 말한다. 주변의 평야지대보다  30미터가 높은 곳에 위치한 고대도시 벳새다는 전체 갈릴리 바다를 조망할 수 있는 곳이다. 벳새다의 산당터에 올라가 갈릴리 바다를 바라보면, 멀리 골란고원, 거라사, 7병이어와 5병이어의 장소, 벳새다 들녁, 가버나움, 타브가, 아르벨산, 막달라, 그리고 티베리아스까지 한눈에 보인다.

고고학자들은 벳새다가 기원전 12세기에 이미 거주지가 형성되었고 성벽으로 둘러싸여 있었다는 것을 발굴해 냈다. 그 당시 갈릴리의 북쪽과 동쪽은 그술 지역의 한 부분이었다. 다윗 왕은 그술 왕 달매의 아름다운 딸 마아가와 결혼함으로 그술 왕국과 친분을 맺었고, 마아가는 자신을 빼닮아 외모가 수려한 압살롬과 다말을 낳았다.

… 세째는 압살롬이라 그술 왕 달매의 딸 마아가의 아들이요 (삼하 3:3)

그 후 다윗이 우리아의 아내 밧세바를 취한 뒤 그의 가문에 재앙이 찾아왔다. 압살롬의 누이 다말이 다윗의 첫번째 아들 암논에 의해 성폭행을 당하게 되었고, 그 보복으로 압살롬은 이복형 암논을 살해하고 외할아버지 집인 그술로 피신하게 된 것이다.  

압살롬이 도망하여 그술로 가서 거한지 삼년이라 (삼하 13:38)

삼년 뒤 압살롬은 아버지 다윗에게로 돌아왔지만, 헤브론에서 백성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후에 아버지 다윗에게 반역을 일으켰다.

그 후 그술은 기원전 9세기 말 하사엘에 의해 아람왕국으로 병합이 되었고, 기원전 734년 앗수르의 디글랏 빌레셋 3세에 의해 멸망하였다. 그술의 수도였던 이 도시는 동쪽에 두개의 큰 망대와 4개의 방을 갖는 성문구조로 건축되었고, 성문 앞에는 황소얼굴로 허리에 칼을 찬 사람모습의 주상이 서 있었다. 이것은 메소포타미아의 신인 하다드(Hadad)를 아람 사람들이 자신들의 주신으로 차용했던 것이다. 30 미터에 달하는 벳새다의 성문 거리를 통과하면 현무암으로 지어진 집들의 흔적이 보인다. 앗수르에 의해서 멸망한 벳새다는 로마시대에 들어서면서 로마의 문헌에 등장하는 도시로 다시 등장하게 된다. 큰 도시의 중요 요소였던 로마식 도로는 벳새다를 거쳐 북쪽 가이사랴 빌립보에 이르렀고, 남동쪽으로는 가다라와 길르앗 산지, 서쪽의 가버나움을 통과해 남서쪽의 게네사렛 평야, 막달라를 지나 해변길의 남쪽까지 이어주었다. 이곳은 헤롯대왕의 아들 헤롯 빌립의 영토에 속하게 된 후, 서기 30년 쥴리어스로 이름이 바뀌게 된다. 이 이름은 로마의 황제 옥타비아누스의 딸, 리비아 쥴리아 (Livia-Julia)에서 유래한 것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이 도시를 벳새다 쥴리아스로 불렀다.  기원전 4년 헤롯의 요단강 동쪽편 땅을 이어받은 헤롯 빌립은 서기 34년 운명한 뒤 벳새다에 묻혔다. 왕이 죽어서 묻힐 만큼 이름이 있었던 벳새다에는 포도주 만드는 집도 있고, 향을 담는 청동삽이 발견된 로마식 신전터도 있지만 그 중에 가장 눈에 띄는 곳은 마을 중앙에 어부들이 살던 집이다. 이스라엘의 전통가옥은 한옥과 비슷하게 마당을 중심으로 방과 부엌이 꾸며진다. 이 어부들의 집에 예수님의 제자 베드로, 안드레 그리고 빌립이 살았을 것이다.

예수님께서는 부르신 12명의 제자들 중 세명, “베드로, 안드레 그리고 빌립(요 1:44; 12:21)”이 벳새다 출신이었다. 2세기의 유명한 랍비였던 시몬 벤 가말리엘과 로마의 황제 하드리아누스는 이 도시의 어부들이 갈릴리 바다에서 많은 물고기를 잡았으며 또한 가금류가 많이 생산되는 곳이라고 말했다. 예수님께서는 벳새다 근방에서 가장 중요한 기적들을 베푸셨는데, 오병이어의 기적(막 6:34-45, 눅 9:10-17)과 소경이 눈을 뜰 수 있게 해 주신 것이다(막 8:22-26). 또한 예수님께서는 벳새다 근방에서 물위를 걷는 기적을 베푸셨다. 예수님께서 배에서 내리시니 병든 자를 침상채로 메고 나아왔고, 예수의 옷 가에라도 손을 대는 자는 다 고침을 받았던 것이다 (막 6:56). 그러나 물질적 풍요와 로마식 문화에 익숙했던 벳새다의 사람들은 전무후무한 기적과 말씀을 듣고도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는 것에 인색했다. 그리하여 예수님께서는 벳새다를 두로와 시돈보다 더 회개를 하지 않는 강팍한 도시로 간주하셨다.

화가 있을진저 고라신아 화가 있을진저 벳새다야 너희에게서 행한 모든 권능을 두로와 시돈에서 행하였더면 저희가 벌써 베옷을 입고 재에 앉아 회개하였으리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심판날에 두로와 시돈이 너희보다 견디기 쉬우리라 (마 11:21, 24)

로마식 문명으로 경제적으로 넉넉한 삶을 누렸지만 회개하기를 주저했던 벳새다는 주님의 예언처럼 서기 67년 제1차 유대인 전쟁으로 폐허가 되어, 땅속에 묻혀버리는 비극의 도시가 되었던 것이다.

사진, 글_이호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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