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가본것같은 성지순례] 악고(Acre, Akko)

악고(Acre, Akko)

아셀이 악고 거민과 시돈 거민과 알랍과 악십과 헬바와 아빅과 르홉 거민을 쫓아내지 못하고 32 그 땅 거민 가나안 사람 가운데 거하였으니 이는 쫓아내지 못함이었더라 (삿 1:31)

악고는 여호수아에 의해 갈멜산의 북쪽 아셀지파에 분배된 어촌 마을이었다. 악고(עַכּוֹ) 란 “해협”을 의미하는데, 아마도 가나안 시대부터 고대 항구로 사용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악고의 구도시는 이스라엘에 존재하는 무구한 역사와 전통을 자랑하는 고대 도시들 중의 하나이다. 이곳은 성경에 등장하는 도시로 12세기 십자군이 약속의 땅을 떠나기 전까지 마지막으로 지키고자 했던 항구 도시였으며 지금은 유네스코에서 지정하는 세계 문화유산이다. 오 천년 전 청동기 시대부터 가나안 시대, 헬라, 로마 비잔틴, 이슬람 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악고는 세계에서 가장 오랜 기간 지속적으로 많은 사람들이 거주했던 도시들 중의 하나인 것이다.

1799년 나폴레옹이 오스만 투르크가 통치했던 악고 성채를 둘러싸고 공성전을 벌였는데, 그가 이곳에 왔다고 해서 나폴레옹 언덕(Tel Napoleon) 혹은 텔 악고(Tel Akko)라고 부르게 되었고 바로 이곳이 성경의 도시가 세워졌던 곳이다. 말을 탄 나폴레옹상이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는 이곳은 지형적으로 서쪽 갈릴리와 갈멜 산맥의 줄기에 위치해 있다. 페니키아 사람들의 두로와 가까웠던 악고는 내륙으로는 해변길에 인접해 있었으며 서쪽의 바닷길을 통해 유럽으로 나아갈 수 있었다. 텔 악고를 차지하는 자가 농사가 잘되는 악고 해안평야를 지배했던 것이다. 신구약 중간시대에 들어서면서 악고는 강력한 해변도시로 급속도로 발전하게 된다. 지중해변에 위치한 인공항구 가이사랴와는 다르게 천연의 항구를 품은 악고는 북부 페니키아의 두로에 비길만한 주요 항구도시였다. 1세기 로마 역사학자인 요세푸스는 그의 책 <유대전쟁사>에서 악고의 지리적인 중요성과 천연 항구, 그리고 나아만 강 주위의 흙은 목초지에 적합하다고 특별히 강조했었다.

청동기 시대부터 로마시대까지 사람들이 살았던 악고 언덕(Tell Acre)은 나아만 강의 북쪽 제방가에 위치한 구도시 동쪽에 있다. 기원전 2천년경, 악고는 다른 여느 가나안의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이집트의 영향력 하에 있었다. 기원전 15세기에 기록된 아마르나 편지에 의하면, 이집트와 두로의 두 세력 사이에 반란과 진압이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 편지에 의하면 북부 레반트 항구들이 이집트를 연결하는 통상 교역에 놓여 있었다는 것이다. 곡식을 실은 무역선은 이집트를 출발해 악고에서 그 물품을 내려놓았고, 그 물품의 대가로 페니키아 사람들은 백향목을, 시리아 사람들은 올리브 기름을 교환했을 것이다. 악고에서의 이집트의 지배는 기원전 12세기와 13세기에 끝이 났으며, 기원전 8세기에서 7세기에는 페니키아 사람들의 중요 항구도시였고, 앗수르에 대항해서 반란을 일으켰으나 앗수르 산헤립에 의해 정복당한 후에 파괴되고 만다. 기원전 332년 악고는 알렉산더에게 평화적으로 항복을 하고 자치도시로 남았다가 이집트의 프톨레미 2세에 의해 악고-프톨레미로 이름을 바꾸고 번성하는 해상무역 도시가 되었다. 로마의 폼페이는 기원전 63년 악고를 로마의 땅으로 합병시켰고, 시리아 총독의 관리 감독하에 남게 되었다. 이런 정치적 상황속에서 사도 바울은 그의 3차 전도여행을 마치고 가이사랴로 가기 전 두로 항구에서 배를 타고 악고를 방문했었다.

두로로부터 수로를 다 행하여 돌레마이에 이르러 형제들에게 안부를 묻고 그들과 함께 하루를 있다가 (행 21:7)

악고에 초대교회가 존재했던 이유는 아마도 사도행전 11장 19절에 기록된 것 같이 스데반 집사님의 순교 이후 사도들이 흩어져 복음을 베니게, 구브로, 안디옥까지 전도하는 과정 중에서 생겨난 듯싶다. 구약성경에서는 악고, 신약성경에서는 돌레마이였던 이 도시는 12세기 십자군에 의해서 다시 악고(Acre), 혹은 사도요한의 악고라는 이름으로 되돌아갔다. 서기 636년 비잔틴 왕국은 야르묵 전투에서 무슬림들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당하고, 637년 예루살렘을 상실하고 만다. 그렇지만 사라센 제국은 기독교 순례자들이 약속의 땅을 방문하도록 허락했고 성지를 향한 순례자들의 발걸음은 계속 지속되었다. 그러나 1067년 터키에서 일어난 무슬림들은 예루살렘을 점령한 뒤 기독교 순례자들을 3천명이나 학살했으며, 예수님이 죽고 부활하신 골고다에 세워진 성묘교회를 파괴시켰다. 성지순례는 금지되었으며 전 유럽의 기독교인들은 분노했다. 따라서 성경의 사건이 일어난 그 장소를 다시 찾기 위해 군사들이 모여들었고, 그들은 약속의 땅으로 향했다. 제1차 십자군 원정대는 1099년 예루살렘에 입성했으며 5년후 1104년 악고를 점령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들은 악고를 십자군과 유럽의 본국을 이어주는 지중해 동쪽에 위치한 가장 중요한 항구로 만들었으며, 그 중요성은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와 시리아의 안디옥을 넘어섰었다.

1187년 5월 악고에서 모든 십자군 원정대는 진영을 재정비하고 중근동의 신흥강자 살라딘과의 결전을 위해 갈릴리쪽으로 출전하게 된다. 살라딘은 나사렛과 티베리아스를 진입하는 길목에 있던 핫틴에서 십자군을 유인했고, 십자군의 성전 기사단은 대참패를 당하게 된다. 비잔틴 시대 이후 6백년만에 무슬림으로부터 찾은 예루살렘을 다시 빼앗기게 된 것이다. 남은 십자군들은 악고로 철수하게 되고, 1291년 5월 18일 이집트의 맘룩크에게 빼앗기기 전까지 악고는 제2차 십자군 왕국의 수도가 되었다. 현재 악고 항구는 십자군의 유적과 오스만 투르크의 흔적이 함께 섞여 있다. 성지를 되찾기 위해 목숨을 걸고 유럽을 떠난 십자군들이 건설한 악고 성채와 바다로 연결된 십자군의 비밀 통로인 템플러 터널을 빠져나오면 푸른 빛이 감도는 지중해 바다를 바라보게 된다. 성지를 지키기 위해 치열한 싸움을 벌였던 십자군의 도시 악고 앞에서 바라보는 지중해 바다의 세찬 파도 소리는 마치 지키는 자들과 빼앗으려는 자들의 치열한 싸움의 함성으로 들리는 듯하다.

글, 사진_이호일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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