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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말씀에너지] 바울 대 소크라테스

바울 대 소크라테스

사도행전 17장에서는 사도 바울이 처음 유럽으로 건너간 뒤 그리스 아테네에 도착하는 장면을 목격할 수 있다. 아테네는 500년 전 이곳을 살다간 철학자 소크라테스의 고향이다. 문학, 역사, 종교, 의학, 과학 등 근대 문명의 근원지였던 그리스의 아테네에 바울이 도착한 것이다. 분면 그는 잔뜩 기대에 부풀었을 것이다. 어쩌면 속으로 “만약 이들이 예수에 대해서 듣게 된다면 분명 믿고 제자가 되리라”고 고대하는 마음을 가지고 도시의 중심부로 발걸음을 옮겼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그토록 문명이 발달한 그곳에서 셀 수도 없을 만큼 다양한 우상들을 보게 되었으며 심지어 그 우상들 사이에는 “알지 못하는 신에게”라고 새긴 단도 찾을 수 있었다. 그들의 뿌리깊은 우상숭배에 비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17:22). 이런 그들에게 바울은 가장 세련된 형식으로 하나님의 진리를 선포했으나 큰 호응을 얻지 못했다. 결국 사도는 큰 기대에 반해 지금까지 방문했던 다른 어떤 지역보다 더 차가운 무관심 속에 실망을 안고 아테네를 떠나게 되었다. 혹자는 바울이 소크라테스를 이길 수 없다고 말 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정말 사도가 패배한 것일까?

돌아보면 아테네의 시민들은 바울을 무엇인가를 파는 “말쟁이”로 인식했다. 자신들을 위해 진정 살아계신 창조주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전도자가 아닌 또 다른 이방신을 전파하는 사람으로 취급 했다. 현대 교인들은 흔히 배척과 핍박을 사역의 실패로 인식하곤 하지만 사도에게 이러한 것들은 진리에 대한 거부반응에 불과했다. 정작 실패는 그 사람들이 바울이 전한 복음에 대해 보여준 냉대와 무관심이었다. 아테네에서 바울이 경험한 것은 실패 혹은 패배가 아니라 아쉬움과 안타까움에 지나지 않는다. 

그들의 영혼은 깊은 곳에서부터 자신들의 종교로 눈이 멀어 있었다. 하나님의 진리보다 자신들의 철학을 신으로 삼았다. 자신들의 죄의 문제를 해결해주는 구세주를 주님으로 만나는 특별한 교제를 소망하지 않았다. 반대로 그들이 원한 것은 자신들이 추구하는 가치를 만족시켜주고 논의할 만한 이야기 거리를 주며 원하는 대로 언제든지 새롭게 자신들이 조각해 낼 수 있는 우상을 원했던 것이다. 

그런데 두려운 것은 어쩌면 사도행전17장 바울이 소크라테스의 고향에서 얻은 반응이 유독 그때 그 시절의 이야기만은 아닌지도 모른다. 만약 오늘 바울이 지금 성도들의 교회를 방문한다면 뭐라 할까? 바울은 무엇을 성과로 기록했을 것이며 교회의 리더들은 바울과 그의 복음을 향해 무엇이라고 했을까? 그들에게 진정 영생에 이르는 성경의 진리가 있으며, 자신들의 죄를 자복하고 회복된 성령의 열매가 있고, 스스로가 창조주 하나님과의 뜨거운 교제를 나누고 있다고 확신할 수 있을까? 아니면 그들의 깊은 종교심에 비탄한 마음을 품으며 쓸쓸하게 그곳을 떠나는 사도의 모습을 또 한번 보게 되는 것은 아닐까? 주님을 믿는 것은 주님의 가치를 따르는 것이지만 주님을 따르지 않으면서 믿는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철학적 신념을 숭배하는 아테네의 시민들과 전혀 다를 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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