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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동네목사개척이야기]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시세포, 기도

희망을 발견하게 하는 시세포, 기도

영화의 한 장면이다. 저녁 8시경, 갑자기 건물이 흔들리더니 ‘펑’ 하는 폭발음과 함께 전등이 꺼졌다. 매캐한 연기가 자욱해지면서 캄캄한 어둠 속에 갇혀 사람들은 아무것도 볼 수 없었다. 일상의 공간이 갑자기 지옥의 공간으로 변하며 극도의 공포가 엄습한다. 평소 들리지 않던 심장의 박동 소리가 터질 듯 쿵쾅거린다. 그때 어디선가 “허리를 낮추고 손수건으로 코와 입을 가리세요. 그리고 녹색 유도등을 따라가세요!” 라는 소리가 들린다.

재난사고 또는 화재가 발생하면 순식간에 실내는 어두워지고 한 치 앞도 보이지 않게 될 때 복도나 계단 아래쪽 비상 유도등을 따라가야 한다. 그럴 때 비상 유도등은 생존의 희망이다. 여기서 한가지 궁금한 건 비상 유도등은 눈에 잘 띄는 노란색이나 붉은색이 아니라 왜 녹색인걸까? 그 이유는 어두울 때 인간의 눈, 시세포가 가장 잘 식별할 수 있는 색깔이 녹색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제법 어렵고, 재난처럼 느껴지는 상황들이 있다. 그런 상황을 만날 때 사람들은 저마다의 방식으로 비상 유도등을 찾아 난리법석이다. 멘탈이 제법 괜찮다고 자부했던 나 역시 몇 번의 몇 번의 어려움을 겪으면서 마음이 고꾸라지기도 하고, 눈 앞이 캄캄해지고, 등골이 오싹해지는 일들이 있었다. 그런 순간은 더 나아질 게 없다고, 희망이 없다고 여겨질 때이다. 이런 순간은 마치 해리포터 3편에 등장한 아즈카반 감옥의 디멘터들에게 영혼을 빨아먹히는 느낌이 이런걸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희망이 없다면 오늘도, 미래도 보이지 않게 된다.

‘희망’의 한자어는 바랄 희希, 바랄 망望 이다. 뜻으로는 어떤 일을 이루거나 하기를 바람, 앞으로 잘될 수 있는 가능성이다. 얼마나 간절하면 바라고 바란다는 한자어를 두 번이나 사용했을까요? 희망을 바라는 것은 기대의 끈만은 놓치고 싶지 않은 마음일 것이다. 당신에게 희망은 무엇인가? 그 희망에 대한 유도등을 발견했는가?

얼마전 한 성도로부터 전화를 받고 함께 중보기도를 시작했다. 이 여성 성도는 유방암이라는 진단을 받았는데 암이 어느 정도 진행되었는지 검사 결과를 기다리는 동안 얼마 살지 못할꺼라는 생각이 들어 절망했다고 한다. 지금까지 앞만 보고, 열심히 성실하게 살아왔을 뿐인데 암이라니 청천벽력처럼 들렸다고 한다. ‘유방암’이라는 복병에 한순간 모든 것이 무너졌다고 했다. 이런 순간 희망은 증발 되고, 무언가의 얼룩처럼 실체 없는 자국만 남아 있는 것 같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인들은 어떻게 희망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는가? 그리스도인의 희망의 근거는 무엇인가?
세상 사람들은 일차적으로 외부 자원의 유입으로부터 비상구 찾으려 한다. 주변의 인맥이라든지, 통장의 잔액이라든지, 직함의 권력에서 찾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자기 자신의 감정, 의지의 변화에서 희망의 비상구를 발견하려 한다. 희망의 비상구를 외부 자원의 개입과 인간 자신의 내적 변화라고만 한정한다면 이것은 온전한 비상구가 아니다. 아직 희망으로 가는 진짜 비상구를 아직 찾지 못한 것이다. 왜냐하면 사람들의 도움과 개입은 변덕스럽고 약한 선의에 기반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간의 내면의 의지와 감정 조차도 자주 변질되고 왜곡되기 마련이다.

무엇보다 고질적인 문제는 희망의 등불을 빼앗는 존재, 시시탐탐 노리는 존재가 있기 때문이다. 성경은 우리의 희망의 등불을 빼앗는 존재가 있다고 경고한다. “근신하라 깨어라 너희 대적 마귀가 우는 사자 같이 두루 다니며 삼킬 자를 찾나니 너희는 믿음을 굳게 하여 저를 대적하라 이는 세상에 있는 너희 형제들도 동일한 고난을 당하는 줄을 앎이니라(벧전 5:8-9)”

어느 날 악마가 자기가 사용하는 물건들을 전시했다. 대부분의 도구들은 사용한 흔적은 별로 없어 녹슬어 있었다. 하지만 쐐기처럼 생긴 도구만은 닳고 닳아 반짝 반짝 윤이 나는 것이다. 그 연유를 물으니 악마는 이렇게 대답했다. “그건 내가 가장 즐겨 사용했던 도구인데 사람들을 희망을 갖으려할 때 절망이라는 도구만큼 효과적인 게 없었지. 그것만 사용하다 보니 이렇게 닳아 버렸다오” 악마가 사람을 무너뜨리는 가장 강력한 도구는 절망이다. 작은 희망이 반짝일 때 절망이라는 작은 쐐기 하나만 박아 버리면 금새 낙심이 밀려온다. 절망이 엄습하여 마음에 자리 잡으면 주저앉아버리게 된다. 장자 역시 “마음이 죽은 것만큼 큰 슬픔은 없다”라고 했다. 왜냐하면 몸은 살아 있어도 죽은 것과 다름없기 때문이다. 사단의 권세가 찾아와 소설 헤리포터의 디멘터들처럼 영혼을 빨아 먹어 버린 것이다.

그렇다면 ‘희망’이라는 것은 성실하고, 진실하며 완전한 기도와 예배의 사람들만 누리는 것일까?
그리스도인다운 생활을 하지 못하고, 때로는 믿지 않는 사람들처럼 살기도하는 사람들에게 희망은 없는 것일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희망이 있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지 못하고 있지만, 그럼에도 희망이 있다
과거의 실패를 또 반복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 희망이 있다.

어두울 때 가장 잘 보이는 색상이 무엇이라고 했는가? 녹색이다. 우리의 생존 본능을 사로잡는 외부의 개입과 자신의 의지와 신념은 진짜 녹색 유도등이 아니다. 우리를 안전한 곳으로 인도하는 진짜 유도등이 아니다. 우리 눈을 사로잡아 이끄는 노란색, 빨간색이다. 노란색, 빨간색을 따라가는 것은 비상구로 가는 길이 아니다. 생존의 진짜 유도등인 녹색의 불빛은 기도 속에 발견하게 되는 예수 그리스도이다.

희망이 도무지 보이지 않고 절망하게 되면 그때는 아주 깊은 낙심의 늪에 빠지는 참사가 일어난다. 냉소적이고, 호기심이 사라지고, 간혹 웃을만한 상황에도 가슴에 한기가 서려 마음을 쪼그라트린다. 그럴 때 기도가 필요하다. 그럴 때 예배해야 한다. 희망이 보이지 않을 때 기도하며 예배드리면 희망의 비상구가 열리기 시작한다. 병이 치유되고, 문제가 해결되는 기적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반의 반, 반의 반의 반만한 희망, 하나님의 긍휼의 손이 붙잡고 있는 것을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기도할 때 희망의 비상구가 포착되기 때문이다.

죄악의 불순종으로 고난이 찾아 왔다면 아직 희망이 있다.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기도할 때 십자가의 놀라운 은혜를 확신하게 되기 때문이다. 인생 살이가 힘에 부쳐서 고단한가? 아직 희망이 있다. 기도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와 하나님을 가로막던 성소의 휘장을 찢어버리시고 나의 탄식도 기도로 받으시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품고 기도하는 것보다 더 강력한 믿음의 행동이 어디 있는가?
기도하는 한 사람이 가정을 회복시키시고, 기도하는 한사람이 교회를 회복시킨다. 기도하는 지도자의 가슴 뛰는 기도는 나라를 새롭게 한다. 나의 인생과 가정, 교회와 나라를 위해 기도하는 사람이 있다면 아직도 하나님이 가정과 일터와 교회와 나라를 붙잡고 있다는 증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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